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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바보가 되었습니다-742화 (743/850)

742화. 실마리

울리는 통화연결음.

세연의 머릿속에는 아까 시은이와 나눴던 대화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정확히는 시은이가 했던 말들이.

‘알 거 같아. 엄마가 왜 아빠 얘기 안 해 줬는지.’

‘바보네, 아빠는.’

‘근데 궁금해졌어. 아빠는, 진짜 내가 보고 싶었을까?’

아무렇지 않은 듯 뱉는 말처럼 보였으나 그 속에는 묻어났다.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

그 아픔을 자신뿐 아니라 시은이마저 겪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자연히 드는 의문.

‘대체 왜……’

7년이 지났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서로 어떠한 교류도 없이 보냈는데, 이제 와서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이유가 뭘까.

대체 뭘 위해서?

실은, 아까 시은이가 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아빠는, 진짜 내가 보고 싶었을까?’

7년 전.

관계를 끊어낸 건 신세연 쪽이었다.

얼핏 보면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연상호는 버림받은 쪽이 아니었다.

갈라섬에 있어서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차갑게 관계를 끊어냈다.

양육권따위는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이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만약에 변한다 해도 딸과의 이별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재회가 아니었어야 했다.

아빠로서 조금이라도 딸을 위한다면 이렇게 찾아와서 상처를 줬을 리 없다.

그렇다.

연상호라는 사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달칵.

연결음이 멈췄다.

그 뒤에 귀를 파고드는 건 날선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

핸드폰을 든 손이 떨렸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또다시 들려왔다.

“무슨 일이니? 먼저 전화를 다 하고. 그렇게 전화해도 안 받더니……”

“.. 엄마지?”

“뭐?”

한이 서린 목소리.

그렇다.

세연이 전화한 건 그녀의 어머니인 윤인주였다.

“엄마 맞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상호에게 시은이가 다니는 학교를 알려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니길 바랐다.

이번만큼은 예상을 빗나가고 아니라는 답이 들려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 만났니?”

되묻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게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흘러나오는 실소.

“하, 하하..”

실성한 듯 헛웃음을 뱉다가 세연은 입을 뗐다.

“왜 그랬어?”

“세연이 너……”

“엄마는 다 알잖아. 나랑 그 사람 관계에 대해서. 그런데 어떻게……”

터트리듯 말을 이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래?”

이쯤 되니 윤인주도 알 수 있었다.

잘은 몰라도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흐르지는 않았다는 걸.

뒤이어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

“누구 아이디어야?”

“뭐?”

“궁금해서. 연락도 없이 학교에 무작정 찾아오는 거, 그런 말도 안 되는 발상은 대체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거냐고. 그 사람이야, 아니면 엄마야?”

“...”

“엄마인가 보네. 대답 없는 거 보니까.”

정곡을 찔린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윤인주가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계속해서 쏘아붙이는 걸 가만히 듣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네가 연락만 됐으면 그럴 일은 없었어!”

“아니?”

평소와는 달랐다.

곧바로 반박이 들어왔다.

“메시지 정도는 얼마든지 남길 수 있었어. 엄마는 그냥 말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 뭐?”

“책임감같은 건 없고 일단 저지르고 보지. 잘 되겠거니 하고.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회피하고, 도망가고, 남한테 탓을 돌려. 지금처럼.”

세연은 덧붙였다.

“그게 엄마라는 사람이니까.”

지금까지 말을 못해서 안 한 게 아니었다.

참았을 뿐이다.

참고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참는 건 바보다.

만만하게 보고 더 함부로 대하게 만들 뿐이다.

‘나는 약한 사람이야.’

세연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JUNE’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활동하는 것도 그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시은이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강해질 수 있었다.

“너.. 너 지금 말 다 했니?”

“아니.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넘치도록 많아. 입이 아파서 안 하는 거야. 어차피 엄마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시간낭비인 것도 알아. 그러니까.. 이건 그건 화풀이야.”

“.. 화풀이?”

“그래, 화풀이.”

핸드폰을 쥔 윤인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진짜 엄마랑 인연 끊을 생각으로 이러는 거니?”

“인연은 진작에 끊었어.”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래!!”

결국 시한폭탄이 터지듯 윤인주가 고함을 발사했다.

“그래, 알려줬다! 학교 어디 다니는지 알려줬어! 아빠가 딸이 보고 싶다는데 그거 하나 알려준 게 그렇게 큰 잘못이니?”

“...”

“뭐라고 말 좀 해 봐!”

잠깐의 침묵.

세연이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역시, 엄마는 그런 사람이야.”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윤인주는 소리쳤다.

“그런 사람이라고 그만해!”

당연한 이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방어기제는 맞는 말을 할 때 가장 강하게 발동한다.

즉, 팩트폭행을 할 때이다.

바보한테 바보라고 하는 것만큼 심한 욕이 없는 것처럼.

“더 엄마랑 할 말은 없어.”

애초에 세연은 길게 말을 섞을 생각으로 전화한 게 아니었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건 더더욱 아니고.

목적은 하나였다.

“번호 줘.”

“.. 뭐?”

“그 사람, 번호 달라고.”

모든 건 스스로 끝맺을 생각이었다.

***

세연이 나간 방.

잠든 걸 확인했다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시은이는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여전히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으니까.

‘시, 시은아..’

처음 아빠를 본 순간.

교문 앞에서 아빠와 아저씨가 언쟁을 나누던 장면들.

그리고 마지막에 아빠가 한 말까지.

‘아빠야.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

‘자, 이리 와. 아빠랑 가자. 응?’

처음 본 순간부터 아빠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왜일까.

‘.. 싫어요.’

아빠를 따라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언젠가 아빠를 만나게 됐을 때의 모습을 그리곤 했는데, 아빠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생각하곤 했는데.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떠올린 그 장면 속에는 바닥에 널브러진 꽃다발이 있었다.

아빠가 들고 있던 꽃다발이었다.

‘나한테 주려고 했던 걸까.’

엉망이 된 채로 바닥을 뒹굴던 꽃다발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은이는 눈을 꾹 감았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캄캄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몸을 웅크린 채로 이리저리 뒤척이던 시은이는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드륵.

깜짝 놀란 시은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숨죽인 채로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다 보니 손에 잡힌 물건의 윤곽이 느껴졌다.

‘.. 꽃?’

자연히 떠올랐다.

아까 침대 옆 의자 위에 올려뒀던 게.

오늘 아저씨가 학교에 데리러 오자마자 손에 쥐어줬던 선물이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꽃이었다.

연상호가 사 왔던 것도, 그리고 주원이 준비한 깜짝선물도.

‘이거 봐. 이렇게 버튼을 누르면 색이 들어온다? 여기 시은이 것도 있어.’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서 얘기하던 아저씨의 표정.

분명히 버튼을 눌렀었지.

‘어때. 신기하지? 이게 밤이 되면……’

그 말을 떠올린 시은이는 두 손으로 더듬거려 버튼을 찾아냈다.

꾹 누르자 펼쳐지는 장면.

두 손 위에 꽃이 피어나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꽃잎들이 반짝인다.

줄기와 풀잎은 연두색과 초록색으로, 꽃잎들은 각양각색의 빛을 낸다.

“.. 우와.”

자연히 시은이는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신기하지? 이게 밤이 되면……’

중간에 멈췄던 아저씨의 말, 그 뒤에 어떤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거 같았다.

옆으로 누운 시은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꽃을 응시했다.

천천히 감기는 두 눈.

덜컥.

방문이 열린 건 그로부터 조금 뒤였다.

세연의 눈에 비치는 건 편안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있는 딸의 모습이었다.

***

내 일이 아니라고는 해도 세연씨와 시은이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다.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었다.

‘아이들도 다 봤다고 하고.’

그로 인해 시은이가 또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런 우려와 달리 며칠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나만 평화롭다고 느낀 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괜찮아보였다.

세연씨는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등굣길 하굣길을 함께하면서도 딱히 그 문제에 대해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그 일은 내 손을 떠났으니까.

의도치 않게 엮이긴 했지만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세연씨는 애가 아니다.

“무려 나보다 두살이나 연상이지..”

“.. 뭐라고요?”

이런.

속으로 생각한다는 걸 그만 입 밖으로 꺼내버렸다.

“하, 하하.. 그냥 혼잣말이에요.”

“흐응..”

다행히 제대로 듣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기야 거의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니까 못 들은 게 당연하다.

조심해야겠군.

어쨌거나 평소와 같은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또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

‘미안하다고 안 해.’

내심 생각했다.

세연씨 성격이라면 이번 일로 인해 나를 불편하게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래서일까.

노력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연씨는 나를 무척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전보다 더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와.. 진짜라니까요?”

지금은 그녀의 학창시절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다.

“겉보기엔 덜렁대보여도 저 의외로 꼼꼼했어요. 막 글짓기 그런 거 하면 맨날 상 타고 그랬고요.”

“글짓기요?”

“네.”

“우와..”

“뭐예요, 그 반응은?”

“솔직히 말해도 돼요?”

“네.”

“글이랑은 거리가 많이 멀어보이는데……”

“와, 진짜…… 와……”

억울해하는 표정을 보니 진짜긴 한 모양이다.

그러다 뭐라 중얼거린다.

뛰어난 내 청각으로도 듣기에 무리가 있는 음량이라 입을 뗐다.

“뭐라고요?”

“저도 혼잣말 좀 했네요~”

“하하, 복수하는 거예요?”

한편 연두와 시은이도 꽁냥꽁냥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다.

“진짜?”

“응! 누렁이는 연두가 힘든 거 같으면 와서 코를 때려!”

“코를?”

“으응.. 근데 하나도 아프지는 않아.”

보다시피 이런 사소한 얘기였다.

여담이지만 연두의 말은 사실이다.

뭘 알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렁이는 축 처져있을 때마다 와서 냥냥펀치를 날리곤 하니까.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하나도 아프지는 않은데 맞으면 기분이 나쁜 거.

‘그래도 정신이 들지.’

어쩌면 정말 그런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 사건이 있었던 날에도 시은이를 걱정하는 연두에게 가서 누렁이는 어김없이 냥냥펀치를 날렸다.

신기하다는 듯이 시은이는 물었다.

“그럼 힘든 척 하면?”

“힘든 척은 안 해 봤는데……”

“다음에 내가 해 볼래. 힘든 척 해도 코 때리는지 궁금해.”

“응! 다음에 해 보자..!”

잘 모르겠다.

이게 무슨 대화인지.

그래도 평소와 같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넌지시 말했다.

“시은아.”

고개를 돌려 시은이가 대답한다.

“네.”

“엄마가 학교 다닐 때 글짓기 상 받았다는 거 진짜야?”

“진짜래요.”

어깨를 으쓱하는 신세연.

그러나 한 마디가 더 들려온다.

“근데 상을 본 적은 없어요.”

“.. 푸흣.”

상을 받았는데 본 적은 없다니.

흠칫하는 세연씨를 향해 장난스레 말했다.

“이거 약간 그런 거 아니에요? 밥은 먹었지만 식사는 하지 않았다.”

개똥 비유였다.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세연씨가 나를 노려본다.

빠른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두고 봐요.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어떻게든 찾아서 보여줄 테니까.”

“.. 그래도 없으면요?”

“...”

“취소요.”

더이상의 도발은 금물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갈림길.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시은이도.”

“네, 주원씨도요.”

신세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연두도 잘 가!”

“네!”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 아저씨.”

시은이가 나를 불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의미심장한 눈으로 시은이는 자그맣게 입을 뗐다.

나한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혹시.. 준이 누군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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