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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바보가 되었습니다-803화 (804/850)

803화. 밤나무 숲

“오늘 저녁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구한다.”

“.. 으응?”

“직접 구하지 못한다면 저녁은 없다. 상추밖에 못 딴다면 상추만 먹는다. 알겠나!”

그렇게 시작됐다.

생존을 위한 시골에서의 식재료 구하기 서바이벌이.

콘텐츠인 만큼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었다.

서바이벌답게 규칙은 간단했다.

조미료를 제외한 식재료를 모두 직접 구해온다, 그럼 할머니가 그 재료들을 활용해 저녁을 만들어준다.

‘할머니의 시골밥상.’

처음 해보는 콘텐츠라 그런지 나도 설레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콘텐츠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할머니는 뛰어난 요리사였다.

비록 이호연처럼 직업이 요리사는 아니지만, 수십년에 달하는 요리 경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골 밥상의 권위자라고 해야 할까.

‘재료만 충족된다면 분명히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을 거야.’

직접 준비한 재료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뿌듯함도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마냥 희망적으로 볼 건 아니었다.

지금은 가을이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을에 얻을 수 있는 작물은 한정되어 있었다.

진짜 상추밖에 못 따는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상추만으로 맛있는 식사를 만드는 건 불가능해.’

이호연셰프를 데려와도 불가능하다.

요리사로서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재료는 있어야 하니 말이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는 고려해야 한다.

만약 그런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떡하긴 어떡해.’

장난이 아니라 산이라도 탈 생각이다.

나 혼자라면 그냥 다 포기하고 굶는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연두를 굶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이들이 끼니를 거르게 만들 수는 없다.

“.. 윽.”

외마디 소리를 내뱉은 유리는 말했다.

“상추만 먹는다고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상추인데.”

“풋.”

유리의 말에 곧바로 반응한 건 선동이였다.

“벌써부터 겁을 잔뜩 먹었네. 상추 먹기 싫으면 다른 걸 구하면 되지.”

“누, 누가 겁 먹었대?”

“그냥 오빠 뒤만 보고 따라와. 그럼 맛있는 거 먹게 해 줄 테니까.”

“필요없거든!”

발끈한 유리는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내가 먹을 건 내가 직접 구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무슨.”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선동이는 얘기했다.

“그럼 내기할래?”

“뭐? 내기?”

“응. 너랑 나 둘 중에 더 많은 식재료를 구해온 사람한테 존댓말을 하는 거지. 내가 이기면 오빠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하는 거야.”

내기 제안에 유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럼.. 내가 이기면?”

“누나라고 부를게. 그리고 존댓말도 하고.”

“.. 풋.”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지 유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좋아. 해, 내기.”

동의해버렸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기 덕분에 유리의 근로의욕이 고취되긴 한 거 같은데, 왜인지 승패가 눈에 보이는 느낌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곳은 선동이의 영역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리도 꿰고 있을 테고.’

선동이도 괜히 그런 내기를 제안한 게 아닐 터였다.

어쨌거나 둘 사이에 내기는 결성됐다.

낄낄 웃는 선동이와 승부욕을 불태우는 유리, 그 외의 아이들은 세상 설레는 표정이었다.

“헤헤, 재밌겠다...”

“뭐 있을지 엄청 궁금하다. 그치.”

“꿀떡 있스면 좋겠다...”

“근데 꿀떡은 못 만들걸?”

“왜?”

“꿀떡 만들려면 꿀이랑……”

대화만 들어도 웃음이 번진다.

그런 우리를 향해 할머니는 재료를 구해도 되는 영역에 대해 설명해줬다.

당연한 얘기였다.

아무리 시골이라고 해도 무지성으로 남의 집 마당이나 텃밭을 침범해서 작물을 구하는 건 도둑질이니까.

다행히 그 외에도 활동할 수 있는 장소는 많았다.

“좋아. 그럼 가 볼까!”

“네에!”

그런 우리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잘 다녀와, 얘들아.”

할머니가 아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로 앉아있는 외삼촌 김윤호였다.

그때였다.

삼촌을 향해 할머니가 입을 뗀 건.

“잘 다녀오긴 뭘 잘 다녀와?”

“응?”

“너도 갔다와야지.”

흠칫한 삼촌이 대꾸했다.

“.. 나도?”

“그래, 너도. 너는 저녁 안 처먹을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갔다 와, 이 놈의 새끼야! 일 안 한 놈한테 저녁은 없어!”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삼촌이 몸을 일으켰다.

세상 얼떨떨한 표정.

허나 반박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의 시골밥상.’

콘텐츠의 주인공은 할머니였다.

로마에 오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이 콘텐츠에서는 할머니의 말을 전적으로 따라야 했다.

아들인 삼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건 콘텐츠를 빙자한 서바이벌이었으니까.

“하하...”

결국 체념하고 너털웃음을 짓는 삼촌.

“잘 부탁해, 얘들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건 바구니와 작은 삽이 전부였다.

그렇게 결성됐다.

오늘 저녁을 위한 서바이벌 팀이.

***

집을 나섰다.

손에 바구니를 하나씩 든 아이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새어나온다.

복장도 한 몫 했다.

직접 할머니가 준비해 준 따뜻한 겉옷을 걸친 상태니까.

전에 김장하러 갔을 때와 같은 옷인데 공교롭게도 아이들 수와 딱 맞았다.

‘왜 이렇게 귀엽냐.’

비주얼이 장난이 아니다.

화려한 옷을 입어서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복장이라 더더욱 그랬다.

슥.

촬영은 아까부터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이야기를 꺼내고 ‘할머니의 시골밥상’ 콘텐츠가 확정된 시점부터 말이다.

한참동안 아이들의 모습을 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막상 집을 나오니 가장 먼저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다.

“삼촌.”

“응, 주원아.”

“그래도 여기 동네 지리에 대해 잘 알지 않으세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한때 삼촌이 살았던 동네였다.

서울은 시시각각 모습이 변해가지만 시골은 그 특성상 시간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였다.

삼촌이 큰 조력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고등학생 때였지.’

삼촌이 했던 말에 따르면 서울에 상경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그 말은 중학생 때까지 이 곳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미친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

여행을 가서 한 번 들른 식당의 이름도 기억할 정도의 기억력을 가진 삼촌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해도 잊었을 리가 없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지리를.

“잘 알지.”

역시나.

기다리던 대답을 들은 내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그것도 알고 있으세요?”

“어떤 거?”

“지금 시기에 어떤 작물을 얻을 수 있는지.”

“지금 시기라면……”

모두가 삼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삼촌의 이야기에 따라 우리의 저녁 메뉴가 결정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윽고 이어지는 삼촌의 말.

“솔직히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야. 이 시기에 구할 수 있는 작물은.”

“그런가요..”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으나 삼촌 입으로 직접 들으니 씁쓸한 기분이었다.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거 같아서.

그런 내 귀에 들어왔다.

“그래도 없지는 않아. 내가 기억하기에……”

몇 가지가 쭉 나열됐다.

그 얘기를 들으니 다시 희망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밤도 있지.”

“밤이요?”

“응.”

밤.

꼭 요리가 아니더라도 단독으로 먹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거 같기도 하다.

아빠랑 같이 어딘가에 가서 직접 밤을 구해서 숟가락으로 파 먹었던 기억이.

‘설마 그게 여기였나.’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렸을 때까지 나는 아빠를 따라서 한 번씩 시골을 갔으니까.

나는 모두를 향해 제안했다.

“그럼 밤부터 구하러 가 볼까?”

“저 알아요!”

기다렸다는 듯이 선동이가 번쩍 손을 든다.

“밤나무 어디 있는지!”

“오, 정말?”

“네.”

생각해보니 그랬다.

삼촌과 더불어 선동이도 우리 입장에서는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훗.”

유리를 향해 씩 웃어보이는 선동이.

“.. 흥.”

유리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나는 빙긋 웃으며 얘기했다.

“그럼 밤나무로 안내 부탁해도 될까?”

“네.”

앞장서며 선동이가 말했다.

“저만 따라오세요.”

길지 않은 이동 끝에 선동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마을의 초입.

고개를 돌린 선동이를 향해 말했다.

“여기야, 선동아?”

조금은 의아함이 담긴 물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밤나무의 모습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생긴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밤나무라면 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선동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가야 돼요.”

“그럼 왜 여기서 멈췄어?”

그런 내 말에 선동이는 살짝 쪼그려앉았다.

“이건 필요 없으세요?”

그 말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열매가 있었다.

정확히는 작은 나무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열매들이 포착됐다.

“.. 이게 뭐야?”

낮은 위치에 있어서 아이들도 손쉽게 딸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전에 이게 뭔지는 알고 따야겠지만.

“이건 대추네.”

답변을 대신한 건 김윤호였다.

“대추요?”

“응. 색깔을 보니까 아직 완벽하게 익지는 않은 거 같은데 이 정도면 먹을 만 할 거야.”

“우와...”

대추나무가 이렇게 생겼구나.

밤나무를 향해 가던 길에 마주한 뜻밖의 수확이었다.

“따도 되는 거예요?”

이번에는 선동이가 대답을 대신했다.

“네, 따도 돼요. 어차피 대추는 다 먹고도 남을 만큼 많거든요.”

“그렇구나.”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많이 따는 건 좋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조금씩만 따서 바구니에 넣자, 얘들아. 최대한 연두색 부분이 없는 거로.”

그러자 연두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응, 연두야.”

“왜 연두색 없는 거로 따여..?”

뭔가 어감이 재미있다.

연두가 하는 질문이 왜 연두색이 없는 열매를 따는지에 대한 질문이라니.

나는 웃으며 대답해줬다.

“연두색이 많다는 건 열매가 덜 익었다는 뜻이거든. 잘 익은 열매를 따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아!”

납득한 듯 연두는 말했다.

“그럼 연두색 하나도 없는 열매로 딸래요!”

“하하, 그래.”

나도 눈에 보이는 대추 하나를 따서 바구니에 넣었다.

고 놈 참 잘 익었네.

“좋아, 그만!”

적당한 타이밍에 나는 대추 수확 종료를 선언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

자연스레 전략이 세워졌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마주하면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구니에 넣는다.

그리고 할머니를 믿는다.

어떻게든 만들어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믿습니다, 할머니.’

그래도 안심이었다.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는 불상사는 벌써부터 피한 셈이니까.

대추를 구했다.

활용할 여지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제 다시 가 볼까?”

그러나 밤나무는 확실했다.

설사 저녁거리를 구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더라도 밤은 단독으로 먹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심지어 맛있다.

물론 저녁으로 밤만 파 먹고 싶지는 않지만, 안전빵으로 마련해 둘 필요성은 확실하다.

다시 걷기 시작한 시골길.

“.. 여기예요!”

이번에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성하게 펼쳐진 밤나무의 향연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

무성한 밤나무.

생각 이상으로 웅장한 비주얼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선동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얘기했다.

“여기예요. 엄마가 그러는데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할아버지가 심은 밤나무래요.”

“우와, 정말?”

“네.”

“그런데 마음대로 따도 돼?”

“따도 돼요. 보세요. 엄청나게 많잖아요.”

스토리가 있어서인지 더욱 멋지게 느껴졌다.

연두도 입을 헤 벌리고 있다.

그런 만큼 대추와 마찬가지로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음..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요.”

“그러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밤들을 공략하려 했는데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보였다.

선동이와 삼촌은 그걸 구별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거 같았다.

해결책을 내놓은 건 선동이였다.

“직접 따야 할 거 같아요.”

“나무에서?”

“네. 제가 볼 때는 이 나무 밤들이 진짜 맛있을 거 같아요.”

선동이가 콕 집은 나무는 척 보기에도 근본이 느껴지는 노목이었다.

확실히 열매가 실할 거 같긴 하다.

그러나 나는 의문을 표했다.

“어떻게 따지? 손이 닿을 거리도 아니고 나무에 올라가기도 어려울 거 같은데.”

이 정도면 김병만이 와도 쉽지 않은 높이였다.

선동이는 말했다.

“당연히 못 따죠.”

“응?”

“저걸 어떻게 올라가서 따요. 알아서 떨어지게 만들어야죠.”

“떨어지게 만든다고?”

“네.”

“어떻게?”

그 말에 선동이는 냅다 밤나무를 발로 찼다.

“으악! 내 발!”

효과는 없었다.

부상을 얻었을 뿐.

“괜찮아, 선동아?”

“.. 네.”

다행히 크게 다친 거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괜찮았다.

방금 선동이의 행동을 보고서 밤을 얻을 수 있는 단서를 얻었으니까.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잠깐 뒤쪽으로 가 볼래, 얘들아? 위험하니까.”

“아빠는요..?”

“아빠는 괜찮아.”

몇 발자국 뒤로 이동하는 아이들.

전부 안전거리를 확보한 걸 확인한 뒤에 나는 숨을 크게 뱉었다.

“후우...”

머릿속에 떠올랐다.

태권도 원데이클래스에서 성일수 관장님에게 배웠던 발차기가.

날아차기.

호흡을 고른 뒤에 나는 무쇠처럼 돌진했다.

“하앗!”

퍼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내 머리 위로 무수하게 열매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그건 다름아닌, 밤나무가 무수한 가시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억! 억!”

그리고 또 하나.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으아아악!”

선동이.

매번 할머니에게 밤톨이라 불리던 게 복선이었던 걸까.

이어지는 밤나무 폭격.

“.. 아빠! 선동이오빠!”

한동안 밤나무숲에는 나와 선동이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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