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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화 (1/153)

#1

펜티움 제국의 평화로운 아침.

햇살이 가득한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여자의 목소리가 대공성을 울렸다.

“대공 전하를 뵐 것이다. 비켜.”

대공의 약혼녀이자, 유서 깊은 블란테 후작가의 하나뿐인 영애 아리엘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기사들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여자의 앞을 막았다.

순간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영애. 송구하오나 전하께선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영애께서 방에서 편히 쉬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하!”

결국 그녀는 참고 참았던 격한 실소를 머금었다.

감금해 놓고 편히 쉬라니.

말장난도 아니고 이게 무슨 헛소리일까.

“비켜. 말로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아리엘이 싸늘히 경고 했으나 방문 앞을 막아선 기사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아리엘은 그런 기사들에 더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바였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분명히 경고했다. 말로 하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고.

“송구합니다. 그만 방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영애.”

“……말이 안 통하면 어쩔 수 없지.”

“네?”

그녀의 낮은 중얼거림을 다 듣지 못한 기사 하나가 다가온 순간, 아리엘은 기사의 검집으로 손을 뻗었다.

놀란 기사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았지만 아리엘은 역으로 기사의 손을 꺾으며 순식간에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릉-

스산한 소리가 울리고 예리한 검날이 아리엘의 목으로 향했다.

“대공 전하께서 날 가두라 했지, 죽이라 명하진 않았을 거야. 그렇지?”

“영, 영애…….”

미동도 없던 기사들은 그제야 당황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리엘 그들의 흐트러짐을 놓치지 않으며 목에 검날을 더 바짝 갖다 댔다.

“안 됩니다!”

놀란 기사가 소리를 질렀으나 그녀는 태연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물러나. 그렇지 않으면 이 검이 내 목을 그을 것이다. 그럼 너희는 대공의 약혼녀를 지키지 못한 대역 죄인이 되겠지.”

“영애, 제발 이러시지……”

“함께 목이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 닥치고 물러나.”

검을 든 아리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날에 붉은 핏방울이 묻어난 순간 기사들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탕—

동시에 아리엘은 검을 던졌다. 기사들의 시선이 검에 향한 틈을 타 아리엘은 복도를 내달렸다.

“영애!”

다급히 그녀를 부르는 기사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서.

그렇게 그녀가 목숨을 걸고 미친 듯이 달려간 곳은, 자신의 약혼자이자 이 커다란 저택의 주인이 있는 곳.

세이어드 대공의 집무실이었다.

아리엘은 마침내 도착한 그의 집무실 앞에서 거친 숨을 골랐다.

“영애……. 영애께서 여길 어떻게…….”

방에 갇혀 있어야 할 그녀가 달려온 것이 몹시 당황스러운지 노련한 집사가 말을 더듬었다.

“영애, 목에 피가…….”

집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아리엘은 피가 흐르는 목을 손등으로 닦으며 차갑게 말했다.

“이런 상처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 대공께 고해. 내가 왔다고.”

“영애 일단 진정하시고……”

“그대가 못 하겠다면 내가 하지.”

아리엘은 집사의 말을 끊으며 그대로 집무실 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집사가 움직이기도 전에 문고리를 잡은 그녀는 벌컥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거칠게 열리는 문에 책상에 자리한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무저갱 같은 어둠을 입힌 듯한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와 신이 빚은 듯한 수려한 얼굴.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저 남자가 바로 그녀의 약혼자였다.

황제의 하나뿐인 조카인 카일런스 세이어드 대공.

아리엘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맹수를 닮은 눈빛.

사람들은 그래서 그를 똑바로 보기 무섭다 했었지만 아리엘은 아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는 늘 다정하기만 했으니까.

물론 그것도 이젠 옛말이 되었지만.

온기 없는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아리엘은 차갑게 식어 가는 피부를 느꼈다. 등줄기에 서리는 식은땀까지.

이래서 당신을 두려워했구나. 사람들이.

그래도 그녀는 아직 버틸 수 있었다. 그녀는 평범한 타인이 아닌 그의 약혼녀였으니까.

적어도 아직은.

아리엘이 욱신거리는 심장에 입술을 깨물던 때, 집사가 그녀를 말리려 다가왔으나.

“영애, 아무리 약혼녀라 하셔도 이러시면……”

카일런스의 서늘한 음성이 울렸다.

“세오, 됐으니 물러가.”

“……네.”

집사가 조용히 물러가고, 아리엘도 정신을 차리며 멈추었던 걸음을 집무실 안으로 내디뎠다.

하나 방금까지 미친 듯이 복도를 내달렸던 사람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한 걸음, 한 걸음이 느릿했다. 마치 그녀의 발에 무거운 쇳덩이라도 단 것처럼.

타인도 아닌 자신의 약혼자에게 향하는 것인데 발걸음이 가벼워야 정상이 아닐까.

그러나 언제부터였는지 아리엘은 카일런스에게 향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를 마주하는 것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마 더는 그의 눈빛에서 다정함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때부터가 아닐까.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를 울린 순간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그가 자리한 책상 앞에 섰다.

여전히 차가운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목에 닿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을 뿐 짜증이 서린 그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그녀의 상처를 보자마자 달려와 안절부절못했을 텐데. 지금 그녀에게 들려오는 건 시리도록 냉정한 그의 말뿐이었다.

“네가 왜 왔는지 알아. 하지만 안 돼. 그러니 그만 방으로 돌아가.”

“……내가 왜 왔는지 안다면서, 근데 그냥 방으로 돌아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

“지금 이 순간, 나한테 할 말이 정말 그것뿐이야?”

아리엘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으나 카일런스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힐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무감한 눈빛으로 아리엘의 슬픔을 응시했다.

“위로라도 바라는 건가? 그렇게 해 주면 더 소란 피우지 않고 조용히 돌아갈 건가?”

정 구걸한다면 작은 적선 정도는 해 주겠단 식이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취급이라니.

그래도 적어도 아직은 내가 저의 약혼녀라고 믿었는데. 그것도 이젠 아닌 것 같았다.

가슴을 찌르는 비정한 그의 말에 아리엘은 울컥했지만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더 이상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난 블란테 후작가의 유일한 적녀이자 아버지의 하나뿐인 딸이야. 네가 아무리 내 약혼자라 해도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겠다는 날 막을 수 없어. 제국법상 난 아직 블란테 후작가의 사람이니까.”

카일런스는 피곤하단 듯 낮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맞아 넌 법적으로 블란테 후작가의 사람이지. 그런데 그 신분이 지금 너에겐 독 아닌가?”

“……뭐?”

“네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왜 갑자기 죽음을 선택했는지, 설마 잊은 거야?”

아리엘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블란테 후작은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죄인 그린트의 세력에 자금과 제국의 정보를 주고 있었어. 거기다 이 나라와 늘 국경 싸움을 하고 있는 브레타 왕국에 그를 연결해 주기까지 했지. 브레타 왕국과 그린트가 손을 잡고 제국 침략할 수 있도록 말이야.”

“……아냐…….”

아리엘의 음성이 가늘게 떨린 순간 카일런스는 쐐기를 박았다.

“부정해도 소용없어. 증거는 확실했고,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후작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역죄가 확정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이 날아갈 테니, 두려웠겠지. 그래서 비겁하게 죽어 버린 거야. 모든 죄를 묻기 위해서.”

비겁한 죽음, 아버지를 모욕하는 말에 감정이 터진 아리엘이 매섭게 소리쳤다.

“아버지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야! 감히 내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

아버지는 누구보다 올곧은 사람이었고, 제국에 충성을 다했다.

모든 일에 있어 설령 돌아가야 할지라도 결단코 편법은 쓰지 않았던 분이신데.

그리고 자신에겐 언제나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던, 따스한 아버지였다.

그만큼 그녀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걸 누구보다 카일런스가 잘 알고 있었고.

그런데…… 내 앞에서 아버지를 모욕하다니.

아리엘은 카일런스가 미치도록 밉고 원망스러웠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이라.

그러니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네 감정을 쏟지 말거라.

아버지께서 늘상 하셨던 말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 말을 따르기 힘들었다.

참고 또 참기엔 그가 너무 잔인했다.

아리엘은 끝내 소리쳤다.

“참고 기다린 결과가 결국 이거라니. 처음 네가 내 아버지의 죄를 고발했다 들었을 때도, 아버지의 심문을 굳이 네가 직접 맡았다 했을 때도 다 이유가 있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쨌든 증거가 나왔으니, 너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기다렸다고!”

“…….”

“네가 아버지의 무죄를 밝혀 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내 약혼자니까…….”

최선을 다해 참았던 감정의 둑이 무너지면서 아리엘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런데 아니었어. 넌 아버지가 아닌 증거를 믿었고, 아버지의 죽음까지 모욕하고 있어. 억울함의 호소가 아닌 비겁한 자의 최후라고. 그 말을 들으면 내가 무너질 거란 걸 알면서도, 넌 이토록 아무렇지 않아.”

“…….”

“난 네가 꽂은 비수에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아픈데……. 넌……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녀는 끝내 오열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카일런스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

고요한 집무실에 그녀의 울음소리만이 울렸다. 아리엘은 자신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 그의 차가운 표정을 본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거 같았으니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인정한 아리엘은 울음을 멈추며 떨리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때, 기다렸단 듯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하.”

“너도 네가 직접 보면 현실을 알게 되겠지.”

카일런스는 종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집사가 들어왔다.

“영애를 블란테 후작가로 모셔다드려라.”

“예, 대공 전하.”

집사는 곧 쓰러질 듯 주저앉아 있는 아리엘을 부축했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시선을 들었을 땐 카일런스는 이미 서류로 시선을 내린 뒤였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귀찮다는 듯이, 잘 가란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일면식이 없는 남에게도 이 정도로 무정하진 않으리라.

“하…….”

운명이라 믿었던 사랑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지다니.

아리엘은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허망함에 탄식을 흘리다 그만 몸을 돌렸다.

그렇게 집무실을 떠나며, 아리엘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제 정말 끝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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