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네?”
대공이 화가 난 것이라 생각하고 황급히 용서를 구하던 로웰이 멈칫했다.
“파혼에 관한 일들을 네가 납득하지 못한단 거, 알고 있어.”
“……전하.”
카일런스는 로웰의 주황빛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로웰은 그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충신이었다. 모든 사실을 안다 해도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카일런스는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 로웰, 너도 앞으로 블란테 영애와 관련된 일들은 머릿속에서 지워라.”
카일런스는 더는 생각도 말라 선을 그었다.
복수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했지만, 로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네.”
블란테 영애가 어찌 되든 파혼한 이상 더 이상은 그와 상관 없다 생각하며, 불편한 감정을 애써 가슴에 묻었다.
“그만 나가 봐.”
로웰의 무거운 얼굴을 보던 카일런스가 짧은 한숨과 함께 축객령을 내렸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로웰이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집사가 말했다.
“전하, 로우스 경이 왔습니다.”
“들여보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데릴은 카일런스에게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라.”
“전하께서 명하신 일을 수행하고 왔습니다. 블란테 영애가 사인한 파혼 합의서입니다.”
데릴은 일어나자마자 합의서를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카일런스의 시선이 새하얀 봉투 위로 닿았다.
파혼 합의서.
그가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데릴에게 사인을 받아 오라 명했었다.
마지막이니만큼 그녀와 마주 보고 끝을 낼 수도 있었지만 블란테 후작을 그리워하고 있을 아리엘의 얼굴을 보기가 싫었다.
원수를 닮은 얼굴로 슬픔에 잠겨 있는 꼴을 한순간이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여 데릴이 서둘러 파혼 합의서를 처리해 가져오길 바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깔끔히 연을 끊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기분이 왜 이렇게 더러운 걸까.
서명된 합의서를 보면 홀가분할 줄 알았었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순순히 합의서에 사인했나?”
“예, 별다른 말 없이 바로 사인하셨습니다.”
“바로 했다고…….”
사인할 수 없다고 패악을 부리지 않았으면 다행인 거잖아.
카일런스의 이성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기분은 이미 바닥이었다.
분명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은 그인데, 꼭 아리엘이 그를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겠다고 매달리기라도 바랐나.
스스로에게 묻던 카일런스는 비소를 흘렸다. 차마 매달릴 수도 없게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 자신이었다.
아리엘에게 대체 무엇을 원했던 것인지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다 끝이야.
카일런스는 파혼 합의서로 손을 뻗었다. 봉투를 책상 두 번째 서랍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넣은 그는 데릴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서 쉬어.”
“……저, 전하.”
데릴은 카일런스의 명령에 나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다른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카일런스의 물음에 데릴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 말을 전하는 것이 맞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주군을 생각한다면 삼가야 할 듯했다.
하지만 꼭 전해 달라 했던 블란테 영애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비록 이렇게 되었지만, 데릴은 블란테 영애에게 악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블란테 영애의 곧은 심성이 대공 부인의 자리에 잘 어울린다 생각했었으니까.
데릴은 딱 한 번만 눈감기로 했다.
“……블란테 영애께서 전하께 전해 달란 말이 있었습니다.”
“아리엘이?”
“네.”
“……말해.”
“난 마지막까지 네 약속을 믿었었다고……. 꼭 전하께 이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무감하던 카일런스의 표정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그러쥐며 입을 열었다.
“……그만 나가 봐.”
데릴은 뼈가 도드라진 카일런스의 주먹을 보다 인사를 올렸다.
데릴이 나가고 집무실 안에는 다시 그만이 남았다.
카일런스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약속…….”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듣자마자 알아챘다.
그녀에게 청혼했던 그 날의 기억은 눈앞에 바로 그려질 만큼 아직 선명했으니까.
죽을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겠다, 무릎을 꿇고 했던 약속.
“……차라리 패악을 부리지.”
패악을 부렸다면 그녀도 그와 같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생각하며 홀가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를 믿었단 그녀의 말에 카일런스는 홀로 시궁창으로 처박혀 버린 듯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궁지로 몰아갔음에도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손을 먼저 놓지 않았다.
신성한 약혼의 맹세를 지킨 것이다. 자신과 달리.
“하긴……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리 고고할 수 있는 거겠지.
네가 만약 복수란 명목으로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알면 어떤 표정을 할까.
그는 블란테 후작의 무죄를 밝혀 줄 수 있는 증거를 없앴다. 그 사실을 알고도 지금처럼 홀로 고고할 수 있을까.
내가 널 배신한 걸 알면 분명 너도 나처럼…….
생각을 잇던 카일런스는 조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그녀를 끌어내리려 해도 도저히 아리엘이 복수에 미쳐 그처럼 망가지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설령 그의 입장이 되었다 해도 아마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아리엘은 어리석은 복수에 자신의 모든 걸 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할수록 자기 자신도 함께 망가지는 법이야. 카일, 그러니 카일은 절대 그런 수렁 속에 빠지지 마.’
카일런스는 오래전 아리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블란테 후작에게서 어떻게 그런 딸이 태어난 것인지.
카일런스는 답답함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몸을 돌렸다.
저택의 너른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막바지에 접어든 가을의 풍경이었다. 나무 아래로 떨어진 낙엽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난 널 잊을 거다.”
그녀와 함께한 기억들을 전부 다 잊을 것이다.
나를 바라보던 네 미소와 목소리, 녹음을 담은 눈빛까지 깨끗하게 지워 버리리라.
시간이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럼 이 까마득한 우울감과 상실감도 떨쳐 버릴 수 있겠지.
하지만 만약……. 시간이 흘러도 잊지 못한다면,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난…….
카일런스는 무언가 텅 빈 듯한 서늘함에 주먹을 쥐었다. 두 눈을 감았다 뜬 그는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의 어둠을 대변하는 듯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 꼭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 * *
나흘 내내 쏟아지던 가을비가 마침내 그치고 화창한 날이 밝았다.
나흘 만에 내리쬐는 햇빛과 물기에 젖은 땅이 부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햇볕이 좋았다. 그 기분이 오래가진 못했지만 말이다.
아리엘은 햇살에 미소를 그리다 번쩍 든 현실감에 입꼬리를 내렸다.
내가 지금 이렇게 햇볕이나 즐길 때가 아니지.
아리엘은 테이블 위로 흩어진 후작가의 장부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런스와 파혼하고 나흘 동안 후작가에 머물며 아리엘은 현 후작가의 상황을 파악했다. 재정부터 밀린 영지의 일들과 후작가의 사업 전부에 대해서.
절망스럽게도, 확인을 할수록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다.
영지에 가뭄이 크게 들어 세금을 거둘 형편이 못 됐고 후작가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선박 회사가 하루아침에 갑작스레 파산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쩌다 40년 넘게 멀쩡하던 선박 회사가 갑작스레 망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완전히 바닥난 후작가의 재정 상태가 문제였다.
이런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역죄까지.
정말이지 당장 제국에서 후작가의 이름이 사라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다른 자들이었다면 어차피 반역죄까지 더해졌으니 그냥 다 포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엘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믿겠다 결심했으니까.
그러니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이다. 아버지의 누명과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자, 전부 다 말이다.
하지만 그러러면 일단 가문부터 지켜야 하는데……
아리엘은 솔직히 말해서 폐하께서 후작가를 멸문하진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자들은 망상을 한다 비웃겠지만 블란테 후작가와 황실의 연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펜티움 7세. 아놀드 드 펜티움 황제.
아놀드 황제는 당시 블란테 후작이었던 아킬레 블란테와 무척이나 가까웠다. 어린 아놀드 황제의 스승이 바로 아킬레 블란테였기 때문이었다.
아놀드 황제는 황위에 오른 뒤에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아킬레를 찾아 조언을 구했고 후작이 명을 다하였을 땐 장례식에 참석해 눈물까지 흘렸다.
그리고 후작의 영면을 기원하며 황가의 보검을 관에 함께 묻어 주었다.
이 검이 후작가의 가족묘에 있는 한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후작가를 멸할 수 없을 것이라며.
물론 몇백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검은 아직 선대 후작의 관에 함께 묻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폐하께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황족들이 배우는 역사 수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니…… 폐하께선 절대 제 손으로 후작가를 멸하지 못할 것이다.
그랬다간 자신이 제 7대 황제의 뜻을 짓밟는 게 될 테니.
거기다…… 반역을 도모한 주요 인물이자 후작가의 가주인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으니…….
찢어지는 마음과는 별개로, 카일런스가 했던 말처럼 후작가엔 기회가 생겼다.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