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강하게 밀어붙였겠지만, 지금으로선 애매해져 버린 것이다.
벌을 받아야 할 자는 죽어 없고 후작가의 가족묘엔 선대의 보검이 남아 있으니.
더군다나 현 황제는 황후의 소생이 아니었다. 하여 정통성이 그의 약점이었기에 절대 선조의 유지에 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처벌은 작위 강등이나 영지 몰수 정도겠지. 어느 쪽이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재정 상태라면 황제 폐하가 살려 줘도 알아서 굶어 죽을 거 같지만.
아리엘은 재정 기록을 살피며 근심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가장 급한 건…… 쿠노 상단의 빚인데…….”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상단인 쿠노 상단.
아버지는 선박 회사가 망하며 후작가의 재정에 큰 타격이 생겼을 때 쿠노 상단에서 막대한 돈을 빌리셨다.
그때는 반역 사건이 터지기 전이라 상단에서 후작가의 신용을 믿고 무리 없이 큰 금액을 내주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쿠노 상단주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빚을 갚으라 독촉하고 있었다.
계약서상 원금 납부 기한은 30년 후였기에 당장 갚을 의무가 없었지만 상단은 막무가내였다.
이미 힘을 잃은 후작가가 자신들을 어찌할 수 없단 걸 알고 계약서도 무시하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법정 싸움으로 간다면…….”
아리엘은 미간을 좁혔다.
법정 싸움으로 간다면 변제를 늦출 수야 있겠지만…… 변호사를 구할 돈이 없어.
그리고 법정에서 이긴단 보장도 없었다. 재판이라고 해 봤자 다 인맥, 권력 싸움이었으니까.
하여 아리엘은 일단 쿠노 상단에 양해를 구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고 후작가에 남은 돈이 될 법한 것들을 전부 팔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그녀의 선조들이 모아 온 귀한 보물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들을 다 팔아도 빚을 전부 변제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아리엘은 재정 기록을 내려놓으며 테이블에 있던 다른 양피지를 들었다. 그곳엔 후작가에서 돈을 빌려준 하급 귀족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아직 받지 못한 돈이 많았다. 아리엘은 이틀 전 그들에게 빚을 갚아 달란 서신을 보냈었다. 아직까지 돌아온 답신은 없었고.
“……계속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겠어.”
아리엘이 테이블 위의 종을 흔들자 곧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집사, 아직 이들 중 아무도 답신이 오지 않은 거지?”
집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엘은 한숨과 함께 양피지를 내려놓으며 다른 소식에 대해 물었다.
“그럼 아버지 친우들 쪽에선……? 그쪽에서도 아무도 답신이 없어?”
아리엘은 하급 귀족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연이 있었던 고위 귀족들에게도 편지를 보냈었다.
후작가를 조금만 도와 달라고 말이다.
물론 그들 중 아무도 아버지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신을 보냈었다. 간절한 호소 가득한 내용으로.
그러나 역시 그곳도 실패인지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 곳에서도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한 사람쯤은 아버지의 진실을 믿어 주는, 아버지를 기리는 이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현실은 냉혹했다. 아리엘은 실망감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닌걸. 괜찮아.”
고개를 든 집사는 뭔가를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할 말 있으면 편히 해. 이제 웬만한 거엔 놀라지도 않아.”
아리엘은 가볍게 웃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여기서 더 충격받을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미 벼랑 끝이니, 더 밀려나면 추락이겠지.
집사가 아리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후작가의 재산을 절반이나 처분하였지만……. 도저히 빚을 감당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후작가의 운영도 마찬가지고요. 하니 차라리 파산 신청을 하는 것이…….”
아리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럼 정말 완전히 무너지고 말 거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버텨야 해.”
돈을 끌어올 수 있는 방법.
‘……카일런스.’
순간 그가 떠올랐지만, 아리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녀에게 남은 익숙함이 그를 떠오르게 만든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일런스는 그녀에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였으니까.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힘들다고 그에게 기댈 수 없었다.
거기다…… 카일런스는 아버지의 장례식날 보란 듯이 그녀에게 파혼 합의서를 내밀었었다.
그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니.
그가 도와주지도 않겠지만 그녀도 그렇게까지 비참해지고 싶진 않았다.
정말 카일런스란 답밖에 안 남는다면 차라리 파산을 선택해야겠지. 저택까지 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에게 손 내밀진 않을 것이다.
아리엘은 순간이나마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집사, 아무래도 내가 직접 움직여야겠어.”
“네? 직접이라 하시면……”
“내가 직접 만나야겠어. 서신은 무시해도 나를 대놓고 문전 박대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아가씨……. 아무도 방문을 요청하는 서신에 답장을 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무작정 찾아가 보려고. 조금 무례하지만 말이야.”
“전 아가씨께서 고초를 겪으실까 걱정됩니다.”
“……고초를 겪는 게 파산하는 것보단 나아. 집사, 마차를 준비해 줘.”
아리엘은 결심을 굳히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블란테 후작가의 마차가 향한 곳은 바이에른 후작가였다.
바이에른 후작가는 블란테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광산 사업이 성공하며 급부상한 후작가였다.
단번에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기는 했으나 부족한 정통성 때문에 블란테 후작과 친분을 두텁게 쌓았었다.
그렇게 선대부터 이어져 온 인연으로 아리엘은 바이에른 시에르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었다.
사교계에 적응하지 못하던 시에르를 그녀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에르라면 그녀를 차갑게 내치진 못할 것이다.
약혼을 한 뒤 대공가에서 대공비 수업을 받느라 시에르를 자주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옛정을 부디 기억해 주었으면.
아리엘은 떨리는 마음으로 친구에게 전해 줄 선물 상자를 꼭 쥐었다.
“블란테 후작 영애이십니다. 바이에른 후작 영애를 뵈러 오셨습니다.”
마차 밖에서 마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 예정 없이 찾아온 것이기에 경비대를 거쳐야 했다.
잠깐의 소란 이후 얼마나 흘렀을까, 경비병의 답이 들려왔다.
“들어가시죠.”
혹시나 문전 박대를 당하면 어쩌나 긴장하고 있던 아리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영애, 내리시지요.”
성문을 넘은 마차가 짧게 더 움직이고 곧 멈추었다.
마부가 열어 준 문으로 내리던 아리엘은 저택 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마차에 당황한 낯빛을 했다.
“설마…….”
다른 귀족 가문의 마차들 그리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 바이에른 후작가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아가씨, 돌아가시겠습니까?”
마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으레 무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무작정 찾아오긴 했었지만 아직 수많은 사람 앞에서 조롱과 괄시를 당할 각오까진 되지 못했다.
시에르에게 민폐가 될 것이다. 불청객이 갑자기 파티의 물을 흐리는 꼴이 될 테니.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오늘은 아닌 거 같다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그때, 하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블란테 영애, 아가씨께서 파티장으로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시에르가 날……?”
아리엘은 멈칫했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시에르가 모르지 않을 텐데.
파티의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게 분명한데 내게 들어오라고……?
아리엘은 멈칫했지만 하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영애를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아리엘은 묘한 눈빛으로 파티장이 있는 곳을 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래. 가지.”
멋대로 온 손님이 또 멋대로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시에르가 파티장으로 들어오라 한 이상 돌아갈 순 없었다.
그리고…… 시에르가 날 조롱거리로 만들려 부를 리는 없잖아.
아리엘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하며 하녀와 함께 파티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파티장에 들어선 아리엘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파티장에 그녀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카일런스 세이어드.
그리고 파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 그는 모르는 사람도 아닌 그녀의 친구 곁에 서 있었다.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던 아리엘은 생각했다.
어쩌면 시에르를 더 이상 그녀의 친구라 부를 수 없을 수도 있겠다고.
그때, 굳은 채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한 귀족들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