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남자를 의심스레 보고 있던 아리엘이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움찔한 순간, 남자가 태연히 말했다.
“도착했나 봅니다.”
아리엘은 그제야 마차가 멈춘 것을 깨달았다.
남자에 대해 생각하느라 마차가 멈춘 줄도 몰랐던 것이었다. 아리엘은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같네요.”
때마침 마부가 마차 문을 열었다.
“아가씨, 테이란 거리에 도착했습니다.”
테이란 거리는 블란테 후작가와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향한 것은 남자가 원한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아리엘은 마부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마차에서 내려 그를 배웅하려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신은 없어도 어쨌든 그에게 큰 도움을 받은 건 맞았기에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남자가 손을 저었다.
“배웅은 괜찮습니다, 영애. 덕분에 편하게 왔으니까요.”
“그래도…….”
어떻게 그러냔 말을 하려던 때 남자가 회중시계를 들어 보였다.
“배웅보단 제게 이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영애. 회중시계를 제가 하루만 가지고 있다 돌려드려도 될까요?”
남자는 깨진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회중시계를 고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해서요. 대신 완벽하게 고쳐 제가 블란테 후작가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시계를 쓰다듬는 남자의 손길이 퍽 애틋했으나, 아리엘은 선뜻 그러라 답하지 못했다.
“아…….”
아직 남자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기에. 자신을 도와준 건 고마우나 여전히 마법사란 확신이 없었다.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의 의심을 간파한 듯 신분패로 보이는 것을 내밀었다.
“물론 귀한 물건을 저에게 무작정 맡기실 수 없으실 테니……. 이걸 담보로 드리겠습니다.”
남자의 신분패를 본 아리엘의 눈이 커졌다.
“이건…….”
마탑의 금패.
금패는 고써클 마법사들 중에서도 7써클 이상 최고 클래스의 마법사들이 받는 패였다. 그리고 이건 함부로 복제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대마법사들이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리엘은 금패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정말 마법사가 맞으셨군요.”
“말했잖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마법 앞에선 절대 착각도 실수도 하지 않는다고요. 당연히 거기엔 거짓말도 포함되어 있답니다.”
아리엘은 장난스레 미소 짓는 남자를 다시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의심은 사라졌으나 의아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니, 궁금증은 처음보다 더 깊어졌다.
현재 대륙에 알려진 대마법사는 마탑주를 포함해 스무 명.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이미 수도 없이 배포된 초상화 덕분에 어린아이들도 알 정도였다.
그러니 이 얼굴은…… 마법으로 바꾼 게 맞는 거야.
하지만 대마법사가 왜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걸까.
대마법사는 황족 정도는 되어야 만나볼 수 있었다. 겨우 후작가의 마차에서 마주할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가 말한 빚.
대마법사가 제게 빚을 질 만한 일이 있을까. 혹시 제가 너무 힘들어 환각을 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 남자가 그녀의 손에 금패를 쥐어 주었다. 차가운 금패의 감촉은 절대 환상이 아니었다.
남자는 멈칫하는 아리엘에게 능청스레 말했다.
“이 마탑의 패가 제 신분을 보증해 줄 겁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제가 시계를 들고 도망가면 이 패를 마탑에 보여 주십시오. 그럼 마탑에서 영애를 아주 극진히 모실 테니까요.”
그는 아리엘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아리엘이 황급히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었지만 남자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방금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아가씨.”
순간이동 마법에 눈이 휘둥그레진 마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탑에서 영애를 아주 극진히 모실 테니까요.’
남자가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던 중, 아리엘의 머릿속으로 번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대마법사 중, 가장 유명한 한 사람.
“설마…… 아니겠지.”
아리엘의 머릿속으로 남자의 정체가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진짜 그 사람이라면 제국이 이렇게 조용할 수 없었다. 저렇게 혼자 다닐 리도 없었고.
마탑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아리엘은 근거 없는 추측을 애써 부정하며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개운치 않은 기분에 아리엘은 후작가로 돌아가는 내내 남자가 남기고 간 금패를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 * *
아리엘이 후작가로 돌아간 그 시각.
세이어드 대공 저택에선 카일런스가 굳은 얼굴로 집무실에서 해 질 녘의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이야.”
적어도 블란테 후작가가 망하기 전까진 그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을 직시하던 녹안이 또다시 선명히 떠오르자 카일런스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목을 조이는 듯한 갑갑함. 카일런스는 커프스 단추를 풀곤 집무실의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싸 안자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가 조금은 식었다. 카일런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붉은 노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카일런스는 속에서 올라오는 역함에 붉게 물든 하늘에서 시선을 내렸다.
이 역겨움은 아리엘 때문이 아니었다. 바이에른 그 후작 영애 때문이었지.
바이에른 후작 영애, 그녀를 처음 본 것은 황성 건국제였다.
그날 아리엘이 시에르를 데려와 소개했었다. 자신의 친한 친구라며 말이다.
카일런스는 예를 갖추어 시에르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첫 만남부터 시에르가 싫었다.
시에르 바이에른은 아리엘을 동경하는 척하며 음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남들 몰래 말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보다 타인의 기척에 예민한 카일런스에겐 정확히 보였다.
그리고 이젠 그 음험한 마음을 더 이상 숨기지도 않았다.
블란테 후작의 장례식, 아리엘이 파혼당했던 바로 그날 아리엘과 친했던 영애들을 모아 티파티를 열었다지.
카일런스는 싸늘한 비소를 머금다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닦았다.
대공가에 돌아오자마자 연미복을 벗어 버리고 몸 전부를 씻어 내렸다. 하지만 바이에른 영애와 직접 닿았던 이 입술만큼은 몇 번을 닦아 내도 불결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러운 벌레가 입술 위를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며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벌레…… 그래, 인간이라면 그래선 안 돼.
그래도 한때는 아리엘과 친구였으면서, 그녀에게 그리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서 그녀가 무너지길 기다렸단 듯 연이은 파티라니.
정말 벌레만도 못한 악질이 아닌가.
카일런스는 그리 생각하며 이젠 손등이 아닌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았다. 살갗이 벗겨질 때까지.
이윽고 카일런스의 손이 멈추었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고 손수건에 붉은 선혈이 묻어 나왔다.
결국 입술이 찢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카일런스가 멈춘 이유는 입술의 아픔 때문이 아니었다.
문득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어서였다.
네가 시에르 바이에른과 뭐가 다르지?
그렇지 않은가.
바이에른 영애가 아리엘을 마음껏 짓밟을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준 게 바로 그였다.
블란테 후작가를 무너뜨리고, 후작의 장례식에서 그녀에게 파혼 합의서를 보낸 장본인.
거기다 겉과 속이 다른 음습함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도 시에르가 아닌 그일 것이다.
그는 복수심을 숨기고 아리엘의 곁에 있었으니까.
그녀가 하루하루 불행해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았다.
하니 시에르 바이에른과 그는 다를 게 없었다.
“……아니지. 내가 더 최악이군.”
적어도 시에르 바이에른은 직접적으로 아리엘에게서 빼앗은 건 없었다.
그녀의 모든 걸 빼앗은 그와 달리.
게다가 그는 오늘 아리엘이 상처받는 얼굴을 보고 싶어 보란 듯이 바이에른 영애의 손등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누가 누굴 역겹다고 하는 건지.”
시에르 바이에른이 억울하다 항변해도 할 말 없을 정도가 아닌가.
카일런스는 픽, 조소를 흘렸다.
그에 입술이 더 찢어지며 피가 흘렀지만 카일런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고모님께서 그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짝을 찾았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와 많이 닮은 여자로 말이다.
시에르 바이에른이 정말 대공 부인이 된다면 그와 그녀는 정말 완벽하게 역겨운 벌레 한 쌍이 될 것이다.
카일런스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입술을 핥던 그때,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들어온 사람은 데릴이었다.
카일런스는 일그러졌던 표정을 갈무리하며 데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주군을 뵙습니다.”
카일런스는 곧장 물었다.
“그자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