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옳은 일도 아니었다.
이 유물을 빌미로 마탑에 블란테 후작가를 다시 일으킬 힘을 청탁하는 것은, 마탑은 각국의 정세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절대적인 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니까.
대륙의 금기를 어기고 일어난 블란테 후작가…….
난 과연 선조들과 아버지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
개국 공신의 가문으로서 몇백 년 동안 블란테 후작가는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고귀한 명예를 내가 엎어뜨린다고?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돌아가신 지금 상황에서?
아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옳은 일이 아니니까요.”
아스터는 그럴 줄 알았단 듯 피식 가볍게 웃었다.
“그 선택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영애에게서 다른 답이 나왔다면 솔직히 실망했을 겁니다. 그런 확고한 신념은 대단한 거니까요.”
벼랑 끝에서 신념을 지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아스터의 덧붙임에 아리엘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벼랑 끝에서 멋있을 게 뭐가 있겠어요. 남들이 보기엔 바보 같을 거예요.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면서 자존심 세운다고, 아마 욕이나 듣겠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전 명예를 목숨보다 중시하는 블란테 가문에서 자랐는걸요.”
아스터는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래도 지금은 영애 자신을 좀 생각하세요. 기댈 곳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 다 버텨 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곡선 하나 없는 나무일수록 부러지기 쉬운 법입니다. 특히 비바람이 몰아칠 땐 더욱 위험하죠. 그러니 지금은 그 신념은 잠시 내려놓으세요.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만이라도요.”
“…….”
아스터는 흔들리는 아리엘을 보다 살짝 풀어진 그녀의 손을 다시 꽉 쥐여 주었다. 회중시계가 단단히 그녀의 손안에 담기도록.
그는 손을 거두며 태연히 말을 더했다.
“그리고 어차피 회중시계 안에 있는 마법진, 연구하고 싶어도 연구할 수가 없거든요.”
아리엘이 멈칫하며 되물었다.
“왜요?”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제일 중요한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시동어나 조건을 모릅니다. 그러니 결국 강제로 봉인을 풀어야 한다는 건데…… 그러기엔 제힘으로 부족하거든요.”
아스터는 머쓱한 듯 볼을 긁적이며 설명을 이었다.
“마탑주 체면에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저보다 훨씬 더 높은 써클의 마법사가 만든 마법진이라서요. 자칫하단 봉인을 풀기도 전에 제가 먼저 죽을 겁니다.”
마법진에 담긴 힘의 반동으로.
“아.”
아리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터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 짧은 순간, 아스터는 아리엘 모르게 회중시계를 힐끗거렸다.
사실 방금 그가 그녀에게 한 말은 반은 맞고 반은 거짓이었으니까.
그보다 높은 써클의 마법사가 만든 마법진. 그 말은 진짜였지만 봉인을 풀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마탑의 대마법사들을 전부 모아 섬세하게 접근한다면 몇 년의 시간이 걸리긴 해도 마법진을 꺼낼 수 있었다.
그리 꺼낸 마법진은 치유와 결계 마법의 막대한 성장에 기여하겠지만…….
아스터의 짙은 시선이 회중시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아리엘을 향했다.
그녀는 씁쓸해하던 아까와 달리 회중시계를 보며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 회중시계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욕심난다 해도 적어도 지금은 받을 수 없었다.
저것마저 없다면 블란테 영애는 많이 외로울 테니…….
후작가의 가보기도 했고, 거기다 다른 마법도 아닌 보호 마법이다. 현재 저 시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블란테 영애가 맞지 않겠는가.
마법의 발전이야…… 조금 미룬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어쩌면…….
아스터는 말했다.
“하나 혹시 압니까, 그 마법진이 우연히 후작가로 들어온 게 아니라 정말 후작가를 위해 만들어진 거라면.”
아스터는 어느새 시선을 든 아리엘을 직시하며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영애께서 그 봉인을 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기적처럼.”
아스터의 표정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농담도 위로도 아닌 진심인 것이다.
아리엘은 느릿하게 읊조렸다.
“기적…….”
씁쓸하게 입 안을 맴도는 단어였다. 그녀는 기적을 바라기엔 너무 많은 절망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스터에게 더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아리엘은 가라앉았던 감정을 갈무리하며 그에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네.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난다면 꼭 제일 먼저 마탑주님께 알려 드릴게요. 마탑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요.”
“그래 주신다면야, 그땐 제가 제대로 값을 드리고 회중시계를 받아 가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때까지 흠집 하나 안 나게 잘 보관해 주세요. 영애.”
“그럴게요.”
아스터는 아리엘의 한결 편해진 얼굴을 보다 이내 마차의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을 확인한 그가 아리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거 같으니……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마지막이라면…….”
“예. 그만 마탑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여기 더 있겠다고 했다간 대마법사 한 명이 제 명에 못 살 상태라.”
아스터는 가볍게 웃곤 아리엘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럼 잘 지내십시오. 영애. 그리고 부디 너무 오래 힘들진 않길 바랍니다. 진심으로요.”
“마탑주님도 공주님 때문에 너무 오랜 시간 괴로워하진 마세요. 공주님께 상처를 준 사람은 마탑주님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공주님도 분명 마탑주님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다 괜찮아지셨으니.”
처음으로 아스터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실 아리엘은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엔 아스터에게 너무 큰 위로를 받지 않았던가. 그녀도 조금은 그의 상처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물론 그가 해 준 것에 비하면 너무 작은 위로였지만.
아스터는 잠시 시선을 낮추다 이윽고 아리엘을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위로 감사합니다, 영애. 기회가 된다면 또 뵙죠.”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스터는 그렇게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그녀가 짧은 꿈을 꾼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 없게 말이다.
아리엘은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보다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직이 내뱉었다.
“정말…… 고마웠어요.”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그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감사 인사를 말이다.
우연한 만남이었던 파티에서 지금까지, 알게 된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아스터는 그녀가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댈 때,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헤어지는 게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아쉬웠지만 그녀가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마탑주와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이 신기한 일이었지.
아리엘은 아쉬움을 달래며 손에 들고 있는 회중시계를 챙겼다.
시계 줄을 감던 그녀는 문득 마탑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부디 너무 오래 힘들진 않길 바랍니다.’
“이대로라면…… 오래가진 않겠네.”
폐하께서 위패까지 치워 버렸으니…… 블란테 후작가에 내려질 처분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기적이라…….”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녀는 티끌 하나 없이 빛나는 회중시계를 꽉 그러쥐었다.
그리곤 작은 창 너머로 어느새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노을빛이…… 핏빛 같다 생각하며 그녀는 그렇게 후작저로 돌아갔다.
* * *
지친 아리엘이 후작저에서 쓰러진 시각.
비아스테스 공작가에선 아름다운 하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연주자는 다름 아닌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하는 하프 연주였다. 어머니에게 배웠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론 하프를 꺼내 보지도 않았으니까.
하프를 보면 어머니가 그리워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늘 기쁜 일이 있을 때만 하프를 연주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현황이 황위에 오르고 지금까지 기쁜 일이라곤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였다.
카일런스 그 아이가 끝내 자신을 선택했으니까.
카일런스의 주청으로 개국 공신 위패에서 사라진 블란테 후작가.
카일런스가 그녀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그의 아비와 달리,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옳은 선택을 했다.
이게 다 내가 그 아이를 잘 키운 덕분인 게지.
아니, 어쩌면 카일런스는 처음부터 내 자식으로 태어났어야 했던 아이가 아니었을까.
신의 농간으로 알렉스 오라버니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뿐, 결국 그녀의 품 안에서 자라 이리 훌륭하게 크지 않았는가.
그리고 날 많이 닮았지.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목표를 이루는 강인함.
그건 알렉스 오라버니의 강점이 아니었다. 그 인간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날 내 손을 잡았다면, 더 큰일을 할 수 있었을텐데.
바보처럼 딱 저 같은 놈의 손을 잡았지.
공작부인은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비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