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처음에야 그런 대공을 대부분 대단하게 생각했었다.
이미 파혼한 사이인데, 거기다 반역자의 딸이건만 시신이라도 찾으려 이리 애를 쓰다니.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젠 여론이 바뀌었다.
이건 수색이 아니라 집착에 가까웠으니까.
꼭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는 듯한 집착 같았다. 배를 띄울 때마다 의원이 빠지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시신을 찾는 데는 굳이 의원이 필요치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병사들도 이젠 다 알게 된 것이다.
대공이 블란테 영애의 시신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블란테 영애를 찾는다는 걸.
그렇게 요란하게 파혼했으면서 이제 와서 왜?
병사들은 감히 입 밖으로 직접 꺼내지 못하지만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대공이 미친 게 아니냐고.
“봐, 너도 부정 못 하겠지?”
동료가 병사의 팔을 툭 치며 덧붙였다.
“이건 진짜 부질없는 짓이야. 다들 지쳤어. 칼이 어제 그러더라. 매일 배를 타고 나가는데 들고 돌아오는 건 없으니, 자기가 이젠 뭘 하는 건지도 모르겠대.”
정말이지 공감 가는 말이었다.
병사가 쯧, 혀를 차며 그래도 우리가 어쩌겠냐, 입을 떼려던 순간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케스케이드 해변 통제선, 그들이 지키고 있는 출입선을 향해 오는 것이었다.
이 새벽에 대체 누가…….
병사 둘은 느슨해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윽고 윤기가 흐르는 흑마가 출입 제한선 앞에서 멈추었다. 짙은 푸른 로브를 모자까지 쓰고 있는 풍채 좋은 남자가 흑마에서 병사들을 내려 보았다. 병사들은 모자 속 잘 보이지 않는 얼굴에 미간을 좁히다 말했다.
“여기는 통제 구역입니다. 신분을……”
하나 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흑마 곁을 지키듯 갈색 말을 타고 있는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가 신분패를 내보였다.
패를 본 병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황궁 제 1기사단만이 가질 수 있는 금패.
황제를 호위하는 직속 기사들의 신분패였다. 그럼 설마 흑마 위 로브를 입은 남자가…….
병사들이 넋이 나간 얼굴로 흑마 위를 향해 고개를 들던 순간,
“헉.”
히이잉 발을 높이 쳐든 흑마가 그대로 출입 제한선을 넘어갔다. 병사들은 감히 막지 못했다.
병사들은 양쪽으로 길을 내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검은 제복의 기사가 신분패를 거두고 흑마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들 모두가 출입 제한선을 넘어가고 나서야 병사들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게 뭔 일이야…….”
“뭔 일이긴…… 곧 사달이 난단 징조지.”
병사 둘은 불안한 눈빛으로 대공의 막사로 향하는 말들을 보았다.
* * *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막사의 나무 책상 위, 넓게 펼친 지도에 카일런스의 절망적인 한숨이 닿았다.
제국의 항구가 있는 도시란 도시는 전부 뒤졌다.
그런데도 아리엘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그마저도 없었다.
수색단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
블란테 영애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다, 시신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조용히 속닥거린다 한들 그 말들이 어떻게 카일런스의 귀에 안 들릴까.
거의 모두가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물론 그의 심복인 로웰과 데릴은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병사들과 다를 게 없었다.
두 사람도 아리엘이 죽었다 확신하는 것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카일런스는 부정했다. 그리고 더 수색에 집착했다.
병사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란 명까지 내리며.
하나 하루, 하루 지나며 카일런스는 두려워졌다.
그들의 말이 맞는 거 같아서.
아리엘이 정말…… 죽은 거 같아서.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두려움만큼이나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귓가를 맴도는 말이 있었다.
‘블란테 영애는 다시는 당신에게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겁니다. 설령 시신으로라도.’
마탑주가 했던 잔인한 말.
시신으로조차 그에게 돌아오고 싶지 않을 거라니.
그럴 리 없다, 만약 아리엘이 죽었다면 분명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을 것이다.
그리 생각했지만 그때도, 지금도 입 밖으로 그 말을 뱉진 못했다.
정말 아리엘이 돌아오고 싶을까?
스스로도 그런 의문이 들었으니까.
그녀의 고국……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고국은 오히려 그녀의 가문을…… 버렸다.
자신 때문에.
카일런스는 지도 위 얹어진 손을 꽉 그러쥐었다.
“정말…… 죽어서도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소리 없이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지도 위로 떨어졌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래도 믿지 않을 거야?
모든 상황이 그에게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는 믿고 싶었다. 아리엘이 돌아올 것이라고.
썩은 동아줄이란 걸 알면서도 이걸 타고 오르면 빛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 어리석은 자처럼 카일런스는 헛된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염치없지만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기에.
제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그는 주저 없이 목숨을 버릴 것이다.
그만큼 네가 보고 싶어.
“아리엘…… 그러니…… 제발…… 돌아와.”
카일런스는 두 눈을 감으며 지도 위로 고개를 숙였다. 후드득- 그의 비참한 눈물이 지도를 적셨다.
혀가 잘린 것마냥 소리 없는 무거운 슬픔이 막사 안을 가득 채웠다. 카일런스의 손에 점차 힘이 빠지고 그의 몸이 책상 위로 쓰러지려던 찰나 막사의 문이 거칠게 펄럭였다.
그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막사로 들어오다니.
빠르게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카일런스는 무슨 무례냐, 싸늘히 말하려 했다.
익숙한 저음이 먼저 들려오지 않았다면.
“설마 설마 했는데, 멜리쉬의 말이 맞았구나.”
이어지는 깊은 탄식.
카일런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책상에서 나와 다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그랬다. 방금 막사로 거칠게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펜티움 제국의 황제였다.
“일어나.”
카일런스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로브 모자를 벗은 황제가 혀를 찼다.
“쯧. 꼴이 대체 이게 무엇이냐. 북방을 다스리는 대공이, 황족이 이런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니.”
“……송구합니다. 수색에 집중하느라 단장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카일런스가 고개를 숙였으나 황제는 거센 콧바람과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내가 네 단장을 뭐라 하는 것 같더냐. 네 얼굴을 말하는 것이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지. 멜리쉬가 네가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고, 제발 가서 말려 달라 부탁했을 때도 난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
“수색의 진척이 없으니, 네 신경이 좀 예민하긴 하겠지. 멜리쉬는 늘 네 걱정에 밤잠 못 이루는 사람이니 멜리쉬가 좀 과하게 말한 것이겠지, 그리 생각했다. 네가 이리 쉽게 무너질 정신을 가진 아이가 아니라 믿었으니까!”
황제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일런스의 처진 어깨를 보았다. 그것이 황제의 분노를 더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꼴이라니!”
수척하다 못해, 창백한 낯빛.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빛까지.
황제는 그 모습이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황제는 카일런스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으니까.
황제는 거친 숨을 고르며 잠시 고개를 돌렸다.
나무 책상 위 제국의 지도가 펼쳐진 것이 보였다.
지도 곳곳에 검은 엑스자가 그려져 있었다. 블란테 영애를 발견하지 못한 지역들인 것이다.
‘폐하. 블란테 영애는 죽은 게 확실합니다. 그 수많은 인력이 투입되었음에도 블란테 영애의 옷자락 하나 건지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의 수색은 의미가 없어요. 하나 카일런스는 수색을 포기하질 않습니다. 폐하께서 수색을 멈추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블란테 영애처럼 카일런스도 잃게 될 것입니다.’
황제의 머릿속으로 멜리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는 하아, 긴 숨을 내쉬었다.
그는 노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카일런스를 불렀다.
“카일런스.”
“……네. 폐하.”
“블란테 영애를 찾는 수색을 그만 중단하거라.”
“!”
카일런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제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황제의 앞으로 가 빠르게 말했으나.
“폐하, 제가 그간 수색에 진척이 없어 제 몸을 돌보지 못한 것은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제 몸을 돌보며 수색을 이어 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황제는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온도 없는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블란테 영애는 이미 죽었다.”
카일런스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리엘은…….”
황제는 카일런스의 어깨를 잡으며 쐐기를 박았다.
“영애는 죽었고, 이젠 그 시신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카일런스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결국 그를 덮쳤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어.
아직은 널 보낼 준비가…… 아니 그런 준비는 영원히 할 수가 없는데.
자신과 똑같지만 흔들림 없는 황제의 검은 눈을 보던 카일런스는 목을 죄어 오는 현실감을 참지 못하고 황제의 손을 뿌리쳤다.
감히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으나 카일런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커다란 파도가 그를 덮쳐 어디로 빠져나가야 할지도 모르며 허우적거리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외쳤다.
“반드시! 제가 반드시 찾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