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꿈이었는지, 사후 세계였는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아리엘을 만나고, 눈을 떴으나 엄청난 고통과 함께 바로 의식을 잃었었다.
그러나 그땐 꿈을 꾸지 않았다.
그저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거처럼 그는 오늘 아침 어렵지 않게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커녕 잘 자고 일어난 사람 마냥 개운했다.
맹독을 먹었던 게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해서 대충 예상했었다.
황궁의도 그의 몸이 지나치게 멀쩡하단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고 말이다.
애초에 그가 눈을 뜨자마자 벅찬 눈물을 흘리며 모든 의원들을 부른 로웰만 아니었다면 진료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오랜 기사 생활을 하며 스스로의 몸 상태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았으니까.
카일런스는 황궁의에게 말했다.
“고생했네. 난 보다시피 아주 멀쩡하니 어서 폐하께 돌아가시게나. 폐하의 걱정이 크실 테니.”
“예. 폐하께서 전하를 정말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하니 전하, 감히 말씀드립니다. 다시는 무모한 선택을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이리 멀쩡히 깨어나신 것은 제 의술 덕분이 아니라 하늘의 기적이니까요.”
부디 하늘이 주신 기회를 외면하지 마시옵소서.
황궁의가 묵직하게 말을 더했다.
카일런스는 진중히 답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걸세. 내 세이어드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세이어드의 이름에는 그 하나만이 아닌, 그의 선조들의 명예까지 함께 걸려 있었다.
그만큼 진심이란 뜻이었다.
“믿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지금 몸 상태가 매우…… 건강하긴 하오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력을 회복하는 데 좋은 약을 지어 놓고 가겠습니다. 보름 동안은 매일 거르지 말고 드십시오.”
“그러지.”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궁의는 시종장과 함께 의원들을 데리고 침실을 나갔다.
침실엔 이제 카일런스와 로웰, 그리고 데릴만이 남아 있었다. 카일런스는 자신의 오른팔 왼팔이라 불리는 두 충신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했기에.
그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었다. 그가 없어도 그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자리를 다 마련하고 떠났었지만 사실 그건 허울 좋은 변명일 뿐이었다. 그들이 십 년이 넘도록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자들이었으니까.
아무리 좋은 자리를 준다 한들 자신이 모시던 주군을 잃었는데…… 그 허탈함과 죄책감이 얼마나 클까.
로웰도 로웰이지만 특히 데릴은 그를 지키지 못했단 죄책감을 영원히 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걸 다 알면서도…… 카일런스는 아리엘을 선택했다.
그래도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고 그들의 충정을 외면하며.
비겁하게도 말이다.
독을 마시던 그 순간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으니까.
아리엘이 없는 세상, 그녀에게 죄를 빌 수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 숨 쉰다는 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환상이라 하더라도 아리엘을 만나고 다시 깨어난 지금은 이성이 돌아왔다.
그래서 저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침실에 내려앉아 있던 때 데릴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리 무사히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전하.”
나직한 저음 속에 서린 떨림.
그 떨림을 놓치지 않은 카일런스가 시선을 들었다.
이번엔 두 사람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감추는 것이다.
카일런스는 그들에게 진지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변명하지 않으마. 내가 비겁했고 이기적이었어. 하나 다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카일런스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러니 부디 나를 용서해 다오.”
그 순간 로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용서라뇨!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모든 일은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저희의 잘못…….”
“아니. 로웰. 전부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 나를 더 못난 놈으로 만들지 말아 줘.”
로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달싹이던 때 데릴이 답했다.
“예. 전하. 용서하겠습니다.”
“데릴…….”
로웰이 너 미쳤냔 눈빛으로 데릴을 쏘아보았지만, 카일런스가 로웰을 불렀다.
“로웰. 신분은 잠시 잊어.”
카일런스를 떨리는 눈빛으로 보던 로웰은 이내 큼, 잔뜩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전하께서 눈을 뜨셨을 때 전 이미 용서했습니다.”
로웰다운 답에 카일런스가 피식 웃었다.
로웰과 데릴이 오랜만에 보는 주군의 웃음에 멈칫하던 때 카일런스가 물었다.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열흘이 흘렀다고 했나?”
“네. 전하.”
데릴의 답에 로웰이 빠르게 말했다.
“전하, 혹시라도 바로 일을 시작하시려는 거라면 안 됩니다. 아까 황궁의가 혹시 모른다 했으니 약을 먹는 보름 동안은 푹 쉬셔야…….”
“해야 할 일이 있어.”
카일런스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로웰의 말을 잘랐다.
“북방의 겨울 준비라면 저와 데릴이…….”
“아니, 그 일이 아니야. 부모님을 죽인 진범, 그리고 블란테 후작의 죽음에 대해 전부 다시 알아볼 것이다.”
블란테.
그 이름이 나오자 로웰과 데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아직도 아리엘에게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미쳐 있는 걸까, 또 죽으려 할까 봐 두려운 거겠지.
아직 그가 일어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으니.
하나 그는 정말 죽을 생각이 없었다.
아리엘이 말한 대로 아무것도 모르고 죽을 순, 아니 죽어선 안 됐다.
부모님을 죽인 진범도, 그의 오해로 죽은 블란테 후작의 억울함도 전부 풀어야 했다.
그렇게 아직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 뒤엔 그가 이 나라와 블란테 후작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생의 끝이 찾아올 때까지 조용히 살 것이다.
그녀가 비겁하게 죽지 말라 하였으니까.
하나 이 모든 걸 두 사람에게 설명하기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의 결심은 행동으로 증명하면 될 일.
카일런스는 로웰과 데릴에게 각각 명했다.
“로웰, 첫 번째 지하 창고 로이망 화가의 그림 뒤에 비밀 금고가 있다. 그 금고의 열쇠를 줄 테니 그 안에 있는 부모님 마차 사고 자료들을 집무실로 전부 가져와.”
“……네.”
“그리고 데릴, 넌 지금 바로 동부의 끝에 위치한 헥스턴 영지로 가. 거기서 데오빅을 아는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라. 그가 무얼 하고 살았는지, 성격은 어땠는지 대공가에 대해 한 말은 없는지 전부 알아 와.”
“알겠습니다.”
로웰과 데릴이 명을 받들고 나갔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드레스룸으로 갔다. 정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그는 곧장 방을 나섰다. 전부 처음부터 다시 조사할 것이다.
하여 반드시 진범을 찾아내리라.
그래야 블란테 후작의 억울한 죽음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가짜 증인. 그 증인을 만든 게 진범일 테니까.
대체 왜 블란테 후작을 죽이려 한 것인지…….
그 이유도 진범만이 알고 있겠지.
하니 진범을 찾아야 꼬여 버린 모든 실타래가 풀릴 것이다.
카일런스는 결연한 얼굴로 빠르게 집무실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마탑.
새롭게 만들어진 마석 분리 연구실에서 라리에트는 홀로 책상 앞에 서 있었다.
물론 마석 분리연구실의 직원이 그녀뿐만인 건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은 점심시간이라 다들 식사를 하러 간 것일 뿐.
당연히 직원들은 그녀에게 점심을 먹으러 가자 말했지만 라리에트는 거절했다.
오늘은 영 식욕이 없어서였다.
어젯밤 꾼 이상한 꿈 때문에.
그녀는 어제 꿈에서 한 남자를 구했다.
아주 아주 깊어 보이는 어둠 속에 누워 있는 남자를 그녀는 환한 빛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아서.
그랬다. 그녀는 꿈속의 남자를 몰랐다. 근데 이상하게 그를 그대로 두면 안 될 거 같았고, 이상하게 고요히 눈을 감은 모습에 심장이 저릿했다.
그래서…… 그를 구했는데.
“……얼굴이 기억이 안 나.”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구했는데 꿈에서 깨자 그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른 건 다 기억나는데 남자의 얼굴만은 꼭 누가 흑색을 칠한 거처럼 떠오르지가 않았다.
라리에트는 다시 한번 떠올려 보려 했으나 너무 집중한 탓일까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눈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은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익숙한 목소리였다. 라리에트는 이마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스터가 걱정스러운 눈빛이 보였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그녀의 옅은 미소에 아스터의 심각하던 표정이 풀렸다.
“아픈 곳 있으면 숨기지 말고 바로 말해. 항상 말하지만 네가 당한 사고는 작은 사고가 아냐. 후…….”
“후유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항상 조심해야 해.”
라리에트가 아스터가 하려던 말을 대신했다.
아스터에게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기에 이젠 외워 버린 것이었다. 라리에트는 눈썹이 삐죽 올라간 아스터를 보며 작게 웃었다.
예전이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감히 마탑주의 말을 뺏고, 마탑주의 불만 서린 표정에 웃다니.
다른 마법사들이 보았다면 식겁했겠지만 라리에트는 그들과 달랐다.
그녀는 마탑주의 의남매였으니까.
마탑주는 그녀가 정식으로 마탑에 등록된 다음 날 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