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비슷한 시각, 마탑에선 마숲의 거래를 합의한 대공과 마탑주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먼저 사인을 마친 아스터가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솔직히 이번 토벌에 도움을 드리지 못해 마숲 탐사까진 허락해 주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탑주로서 전하는 진심이었다.
카일런스는 정말 아스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쉽게 모든 걸 허락해 줬으니까.
오로지 대공의 힘으로 토벌에 성공했기에 마숲의 모든 권리는 제국에 있었음에도 말이다.
입씨름 한번 없이 마숲 탐사부터 대량의 마물 시체까지 정가에 넘겨주었다.
얼마든지 비싸게 부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의외였다. 아무리 그가 미리 친필 서신을 보내 직접 온다고 했어도, 세이어드 대공이 좋은 감정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으니까.
그에게 할 질문 역시 유쾌한 것은 아닐 거라, 그리 생각했다.
마숲 토벌 지원을 하지 않은 것을 떠나, 세이어드 대공과 아스터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 자체가 최악이었으니.
그때, 아스터는 카일런스에게 비수를 꽂았었다.
블란테 영애는 죽어서도 그에게 돌아가길 원치 않았을 거라고.
평생 대공이 저지른 죄를 마주하고 살라 했었다.
블란테 영애를 향한 미련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라기엔 과할 정도로.
그때로부터 불과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하니 대공은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했던 말들을 말이다.
그러나 대공은 마탑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분 나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적으로 아스터를 대했다. 예의를 갖춰서.
아스터는 여전히 묵묵히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하는 대공을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마탑주로서의 역할은 서류에 사인을 하는 순간 끝이 났다.
하여 아스터는 마탑주가 아닌 개인으로서 세이어드 대공이 아닌 카일런스에게 말했다.
“한데 감사함과 별개로 자꾸 드는 의아함은 어쩔 수가 없군요. 어떻게 이리 아무렇지 않게 저를 마주하실 수 있을까. 그날 제가 했던 말들이 그리 가벼운 말들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
카일런스가 사인을 다 마친 그때, 아스터가 말을 이었다.
“혹 벌써 다 잊으신 겁니까? 블란테 영애를.”
카일런스를 보면 볼수록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공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게 진심인 건 아닐까.
블란테 영애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을 다 잊고 일어난 게 아닐까.
그래서 토벌에 나가고, 죽지 않고 더 강해져 돌아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토벌에 나간다 했을 때부터 블란테 영애를 떨쳐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아스터답지 않은 비틀린 생각들이었다. 그리고 사실 아스터가 이런 생각을 할 자격은 없었다.
자신이 덧씌워져 보이는 대공에게 과하게 비수를 꽂았지만 그게 다였다.
대공이 블란테 영애를 잊든 말든 그건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으로선 그가 블란테 영애에게 미련 두지 않는 게 더 좋은 상황이었다.
라리에트와 그를 위해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기가 뒤틀리는 것인지.
아스터는 아무렇지 않은 대공의 모습에 화가 났다.
이번엔 대공의 모습 위로 페일린을 버린 그 개자식의 모습이 덧씌워져 보여서.
이 모든 게 정상적이지 않은 사고라는 걸 알면서도 아스터는 이미 말을 뱉고 말았다.
그때, 테이블 위로 펜을 내려놓은 카일런스가 시선을 들었다.
“잊지 않았습니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심장엔 아리엘이 선명히 박혀 있습니다.”
카일런스는 표정이 굳는 아스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 거래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탑주님에 대한 원망 같은 게 있다는 건 아닙니다. 그날…… 제게 하셨던 말들은 여전히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요.”
“…….”
“토벌 지원 또한 마탑주님께서 빠지길 바라고 나선 것이니 거기에 대해서도 별다른 감정은 없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서쪽 숲은 고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마나의 숲입니다. 제국의 이권을 떠나 마숲을 마탑에서 제대로 연구한다면 대륙의 마법이 크게 발전할 수 있겠죠. 하여 마탑에만큼은 공익에 중점을 둔 거래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솔직함을 더하자면, 마탑주님께 얻고 싶은 게 있어 더 양보하기도 했고요.”
아무런 말 없이 카일런스를 보던 아스터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내게 얻고 싶은 게 있다? 제게 물어볼 말과 관련된 겁니까?”
“예.”
카일런스의 망설임 없는 답에 아스터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카일런스가 그에게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일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그만큼이나 강한 초월자가 된 카일런스에게 그가 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설마…… 라리에트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온 건 아니겠지.
아스터는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거래는 다 끝났으니, 말씀해 보시죠.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리엘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다던 대공의 말이 아스터의 심장을 불안하게 뛰게 했다.
그 순간, 카일런스가 말했다.
“만티코어의 심장에 얽힌 전설을 현실화시키고 싶습니다. 그 전설이 정말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 알고자 합니다.”
“전설을 현실화시키다니 그게 무슨…….”
아스터는 일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만티코어에 관한 전설이라니, 이건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말이었다.
아스터는 말끝을 흐리며 카일런스를 다시 보았으나 그는 여전했다.
카일런스는 잘못 말한 게 아니란 듯 다시 말했다.
“만티코어의 심장에 관한 전설을 모르십니까?”
아스터는 멈칫하다 이내 흐트러졌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답했다.
“만티코어 심장의 전설이라면…… 죽은 자를 만날 수 있게 하는, 그걸 말하시는 겁니까?”
줄곧 미동 없던 카일런스의 흑안에 이채가 스쳤다.
“네. 맞습니다.”
아스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카일런스의 눈빛에 초조함이 짙어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카일런스의 분명한 답에 아스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스터는 카일런스가 했던 말과 그가 갑자기 마숲 토벌에 나갔던 때를 다시 떠올렸다.
방금 그가 말한 만티코어의 심장까지 함께.
그러자 이제까지 이해되지 않던 대공의 모습이 이해되었다.
그가 왜 토벌에 나간 것인지도 알 거 같았다.
그는 정말 죽으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블란테 영애를 잊은 것도 아니었다.
아스터의 예상은 전부 틀렸다.
세이어드 대공은 살아남아 블란테 영애를 만나기 위해 토벌에 간 것이었다.
마수의 심장을 얻어, 그녀의 영혼이라도 보기 위해서.
정말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스터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대공이 블란테 영애를 향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버리지 못했기를 바랐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져야 정상이건만 그의 마음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더는 카일런스의 위로 페일린을 버린 개자식이 덧씌워 보이지 않았음에도.
분노만 사그라들었을 뿐 그 자리엔 금세 또 다른 어두운 감정이 들어찼다.
지독한 우울감과…… 카일런스에 대한 불편함.
카일런스에게 블란테 영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기에 느끼는 불편함이었다. 그렇다고 미안함이나 죄책감까진 들지 않았다.
아스터는 여전히 카일런스가 싫었으니까.
그를 보면 자꾸만 자신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올랐기에.
못난 스스로의 모습과 페일린을 버린 개자식, 카일런스에겐 그 두 가지가 다 있었다.
아스터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던 찰나, 카일런스가 테이블 위로 작은 나무 상자를 올려놓았다.
상자 뚜껑을 열자 핏빛의 마석이 아스터의 눈에 들어왔다.
“……만티코어의 심장.”
아스터가 나직이 상자 속 내용물의 이름을 읊조리자 카일런스가 말했다.
“맞습니다. 이게 만티코어의 심장입니다. 심장을 도려내자마자 바로 마석으로 변하더군요. ……아무리 빌어 보아도 영혼이 보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카일런스는 물끄러미 만티코어의 심장을 내려다보는 아스터에게 말을 이었다.
“혹 영혼을 부르는 다른 주문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심장 안의 마력을 이용해 영혼을 부를 순 없는 것인지…….”
“…….”
“……어느 쪽이든 마탑주님께선 방법을 아실 듯하여 묻는 것입니다. 전설을 현실화할 방법이 있을까요?”
카일런스답지 않게 말이 빨라졌다. 그만큼 조급한 것이었다. 그에겐 마탑주가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아리엘을 만나게 해 줄 유일한 희망 말이다.
현존하는 마법사들 중 가장 높은 써클의 마법사.
그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반대로 그가 안 된다면…… 진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제발, 이번엔 너를 만날 수 있기를.
카일런스가 간절히 바라던 그때 마침내 아스터가 입술을 뗐다.
“전설을 현실화시키는 방법은 없습니다.”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단호한 답이었다.
견고하던 카일런스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어느새 마석에서 시선을 든 아스터가 굳은 얼굴의 카일런스를 직시했다.
아스터는 싸늘히 쐐기를 박았다.
“애초에 만티코어 심장에 얽힌 전설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