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08)화 (108/153)

#108

“……어떻게.”

어떻게 아리엘 블란테가 살아 돌아왔을까를 말한 게 아니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긴 했으나 그녀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펜티움 7세의 검을 바칠 때부터 불길함이 들더라니.

‘폐하, 제 아버지 블란테 후작의 반역 혐의에 대한 재조사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어리석은 황제 같으니.

블란테가 보검을 바칠 땐 당연히 원하는 게 있어서란 걸 알았어야지. 애초에 그녀가 원하는 것은 뻔하지 않은가.

블란테 후작의 무죄.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에도 그것만 파헤치다 갔었는데.

멜리쉬는 검을 들고 웃던 황제의 얼굴을 생각하며 이를 까득 악물었다.

“멍청하긴.”

하지만 멍청한 놈은 비단 황제 하나가 아니었다.

‘폐하, 저도 머리 숙여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시 후작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저는 추가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고 결국 후작은…….’

카일런스 그 어리석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서쪽 숲 토벌을 나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싶었다. 역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라, 카일런스가 블란테를 잊었다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었지만.

토벌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초월자가 되어 돌아온 카일런스는 단숨에 제국의 영웅이 되었다. 차기 황제 자리에 오르기 충분할 만큼.

멜리쉬는 찬란한 미래만을 상상했었다. 카일런스가 그녀를 대놓고 무시하기 전까진.

여전히 어둠에 젖은 눈빛,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절망에 젖어 있었다. 오죽하면 귀족들이 그걸 눈치챘을까.

그래도 멜리쉬는 포기하지 않았다. 카일런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블란테가 죽었다고 확신했으니까.

그런데 버젓이 돌아왔지.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원하는 것도 손에 쥐었고.

멜리쉬는 블란테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불렀던 황제를 떠올렸다.

‘카일런스가 후작의 증거를 조작했다 들었다. 너도 알고 있었느냐.’

‘…….’

‘하긴 물어 뭐하겠느냐. 알렉스를 죽인 게 블란테 후작이라 처음 말한 것이 멜리쉬, 너인데……. 하아, 내가 어리석었다. 카일런스에 대한 믿음과 순간의 분노로 이성을 잠시 잃었어. 블란테 후작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폐하, 하오나 증거가…….’

‘닥치거라! 알렉스의 죽음을 떠나 넌 블란테 후작에게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웠다. 네가 한 짓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것이냐!? 카일런스가 관련되지만 않았다면 내 당장 너를 재판에 세웠을 것이다!’

‘…….’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다 물었다.

‘후작의 진짜 서신, 카일런스의 말로는 그걸 네가 블란테 영애에게 보여 주었다던데. 그건 확실히 처리했겠지?’

‘……물론입니다.’

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에 멜리쉬는 고개를 숙였다.

거짓을 고하며.

후작의 진짜 서신은 블란테의 손에 있었으니까.

그땐 손에 쥐여줘봤자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준 것이었다. 비참함을 극대화하고자.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카일런스가 부실 수사를 스스로 인정했기에 그 서신이 나오는 순간 후작의 무죄가 증명될 것이다.

거기다 하필 수사장은 포르테 백작. 황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대쪽 같은 사람.

정말이지 모든게…….

“다 틀어졌어. 젠장.”

멜리쉬는 거친 욕지거리를 뱉었다.

밤새 생각해 봐도 그 서신에 대한 수사를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블란테가 그 서신을 들고 황제를 만날 것 같았다. 그럼 황제의 분노는 당연히 자신에게 올 테고…….

“잠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멜리쉬가 멈칫했다.

“왜 후작의 서신을 바로 황제에게 알리지 않은 거지?”

자신의 손에 증거가 있는데. 

적법한 절차에 따라 무죄를 밝히고 싶었다 해도 증거를 먼저 내놓고, 재수사를 허락해 달라 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더 빠른 길이었다.

특히 어제처럼 블란테에게 여론이 기울었을 땐. 거기다 한 가지 더 이상한 게 있었다.

왜 1년이나 지나서 돌아온 거지?

바닷속에 1년을 잠겨 있었을 리도 없는데. 그 기간 동안 대체 어디서 무얼 했단 말인가.

살아있었다면 바로 돌아왔어야 함이 맞았다. 돌아온 날, 황제 앞에서 후작의 무죄를 밝혀달라 하지 않았던가.

그녀에겐 반드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1년을?

카일런스가 전제국을 뒤졌지만 그녀를 찾지 못했었다.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돌아올 수 없었던 건가…….”

후작의 서신도 어쩌면…… 지금 블란테에게 없는 걸지도 몰라.

멜리쉬의 머릿속으로 오래전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습지 않니. 과거엔 그렇게 나를 경멸했으면서 머리를 좀 다쳤다고 사람이 저리 달라지다니.’

‘네 삼촌이 기억 상실이라더구나, 멜리쉬. 그래서 내게 했던 짓들은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고……. 잘못한 게 있다면 용서해달라, 처량한 모습으로 사과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다른 사람 같았어.’

너무 달라져서 화도 나지 않았어. 내 분노는 그렇게 갈 길을 잃었단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학대하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 늙은 황제에게 어머니를 넘겼던 이복 삼촌.

어머니는 두 자식을 낳고 황실에서 자리를 잡았을 때 삼촌에게 복수하려 했었다.

삼촌이 낙마 사고로 머리를 다치지만 않았다면.

“……기억 상실.”

왜일까. 멜리쉬는 그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절벽에서 떨어진 블란테가 머리를 크게 다쳤다면……?

1년간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기억에 문제가 생겨서였다면.

멜리쉬의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득였다.

그녀는 축 처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침대로 향했다.

긴 줄을 잡아당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캐롤라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마님.”

“목욕물을 준비해. 새 드레스와 장신구도 꺼내놓고.”

멜리쉬는 창밖으로 완전히 떠오른 해를 보며 말했다.

“블란테 후작저에 사람을 보내. 오늘 후작 영애와 차 한잔 마시고 싶다고. 정중하게 청하렴.”

“예, 마님.”

* * *

“어떤가, 차는 입맛에 맞는가?”

나른한 오후 두 시. 비아스테스 공작가의 정원에선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의 물음에 아리엘은 차분히 답했다.

“과일향이 상당히 좋군요.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내가 직접 우린 차네. 우리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준 차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떠난 그대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말이지. 그때 이곳에서 내놓은 차가…….”

“캐모마일 홍차였지요. 물론 기억합니다.”

흔들림 없는 답에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캐모마일 홍차는 맞지만 차를 준 곳은 정원이 아닌 그녀의 침실, 테라스였으니까.

하지만 겨우 이거 하나에 블란테의 기억이 없다 단언할 수 없었다.

그녀를 대하는 태도와 눈빛, 기억이 아예 없다기엔 너무 완벽했다.

그러니 어디까지 기억을 하는가, 이게 관건인 건가.

공작부인은 낯빛을 어둡게 바꾸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기억할 수밖에 없겠지. 그날 내가 그대에게 준 모욕을 그대가 어찌 잊겠는가.”

“그 모욕을 상기시켜 주려 절 다시 부르신 겁니까?”

아리엘이 건조하게 되물었다.

멜리쉬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대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 보장했네.”

“……사과요?”

처음 보이는 흔들림. 멜리쉬는 아리엘의 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미안하네, 영애. 그때 내가 그대에게 너무 무례했어. 그땐 후작의 죄가 진짜라 굳게 믿었네. 그래서 그대를 카일런스에게서 떼어놓아야겠단 생각뿐이었지.”

“…….”

“하여 그대에게 돈주머니를 내밀며 제국을 떠나라고…… 참으로 천박한 짓이었지. 황족이자 공작 부인인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는데…….”

사실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은 빠져 있는 텅 빈 진실.

멜리쉬는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아리엘을 보았다.

모든 걸 기억한다면, 빈껍데기 진실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엘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멜리쉬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거처럼.

그녀가 말한 것에 대한 사죄를 기다리는 거처럼 말이다.

‘내 예상이 맞았어.’

아리엘 블란테의 기억은 온전치 못하다. 그녀는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해. 서신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야.

멜리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테이블 위에서 내렸다.

무릎 위로 손을 그러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미안하네, 영애. 이런 말 따위로 그대의 분이 풀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용서를 빌고 싶었네. 정말 진심으로 미안……”

그런데 멜리쉬가 말을 마치기 직전, 굳게 다물려 있던 아리엘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하지 않으시겠죠.”

차디찬 목소리. 아리엘은 방금까지의 어두운 얼굴은 거짓말이었단 듯 싸늘한 비소를 머금었다.

“정말 미안하셨다면, 제게 사죄하고 싶었다면.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나 이리 떠보진 않으셨겠죠.”

“……그게 무슨 말인가.”

멜리쉬의 가면에 금이 가던 찰나, 아리엘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 아버지를 반역자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공작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죽은 알렉스 세이어드 대공과 대공 부인 그분들을 죽게 만든 사람이 내 아버지라 철석같이 믿었으니까.”

“…….”

아리엘은 굳어버린 공작 부인을 두고 태연히 주변을 둘러보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공작 부인 말씀이 맞네요. 지금의 장미들이 그때보다 덜 핀 걸 보니 딱 그 시기에만 만개하나 봅니다.”

그날을 아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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