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5)화 (145/153)

145화

“카일런스!!”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연회장을 갈랐다.

그녀는 황급히 카일런스를 향하여 몸을 낮추었으나 카일런스는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쿨럭…….”

덩어리진 붉은 피가 그의 손을 넘어 새하얀 대리석 사이 사이로 흘러넘치자 귀족들은 뒷걸음질 치며 경악했다.

“이게 대체 무슨…….”

“대공 전하께서 피를……!”

그러나 아수라장 속에서도 카일런스에게로 향하는 사람이 있었다.

굳은 표정의 아리엘은 무거운 걸음을 힘겹게 앞으로 내디뎠다.

‘여기가 끝이야.’

그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네가 말한 끝이 이거라고?

널 희생해서……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을 잡으려 한 거였어?

아리엘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이렇게 죽을 생각이냐고. 자신이 이런 결말을 바란 것 같냐고.

그녀가 바란 끝은 피로 얼룩진 비극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기억이 돌아온 그날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하지 않았다.

피는 또다시 피를 부르는 법. 그 끝에서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카일런스, 당신은 이렇게 죽으면 안 돼. 법정에서 서서 정의에 따른 심판을 받아야 해.

털썩-

그때, 카일런스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듯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정확히 아리엘을 보았다.

검붉은 핏빛으로 물든 입술이 움직였다. 아리엘도 그 움직임을 따라 입술을 뗐다.

“……날 ……절대, 용……서……하……지마.”

카일런스는 그 말을 끝으로 쿵-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리엘은 석상처럼 멈추었다.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네.

당신은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카일, 카일런스! 정신 차리거라! 갑자기 대체 왜 이러는 것이야!!”

비아스테 공작 부인의 비명이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고 동시에 갑자기 핑- 현기증이 돌았다.

뭐지.

아리엘은 흔들리는 시야에 고개를 내저었으나 곧 일시적인 현기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으니까.

“아리엘!”

놀란 제드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아리엘은 흐려지는 시선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 피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털썩-

황급히 달려온 제드란이 아슬아슬하게 아리엘의 몸을 받아냈으나 그가 아리엘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전에 비명이 울렸다.

“꺄악! 또 쓰러졌어!!”

“블란테 영애가 의식을 잃다니…….”

“대체 이게 무슨…….”

사람들의 혼란이 더욱 커지던 찰나,

“컥!”

카일런스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카일런스!!”

멜리쉬가 황급히 그를 붙잡았으나 그는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낼 듯 다시 피를 토했다.

카일런스를 붙든 멜리쉬의 손끝이 떨렸다. 진득한 선혈이 그녀의 드레스를 적히고, 비릿한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켰다.

멜리쉬의 이성도 점점 바스러져 갔다. 대체 왜.

그때 누군가 외쳤다.

“독……! 독이야! 이 차에 독이 들었던 거야!”

“퉤! 퉤!!”

“우웩!”

차를 시원하게 들이켰던 몇몇이 목을 부여잡으며 먹었던 것을 뱉으려 했다. 공포심은 순식간에 홀 안을 뒤덮었다.

“독…….”

멜리쉬의 얼굴도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귀족들과는 다른 이유였지만.

그녀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바뀐 것인가.”

멜리쉬는 굳은 얼굴로 아수라장 속에서 한 사람을 찾았다.

아리엘 블란테. 제드란 품에서 축 늘어진 계집.

그래, 쓰러져야 했던 건 저 계집 하나였다.

멜리쉬의 머릿속으로 사흘 전 카일런스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동방국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독초가 많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모님께선 동방국의 독초에 대해 많은 걸 알고 계시겠죠. 선 황비 마마의 취미가 약초를 키우는 것이었으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서서히 숨통을 끊을 독. 블란테 후작 때와 같은 실수가 있어선 안 되니까요.’

‘피에두 공작이 동방국을 통해 제국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니 여기 독초의 이름을 적으시면 됩니다.’

독은 공작이 들고 올 테니.

멜리쉬는 블란테 후작에게 쓰려했지만 차마 구하지 못했던 독의 이름을 적었다.

카일런스는 미소를 그리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여시지요. 그날은 고모님께도 저에게도 아주 특별한 날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왜. 카일런스 네가 왜…… 피를 토한단 말인가.

모든 게 완벽했었는데.

대체 어디서 일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카일, 카일런스!!”

멜리쉬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멜리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일런스의 머리를 들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 그 얼굴 위로 싸늘한 시신이 되었던 아들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두 번이나 자식을 잃을 순 없어.

“아냐, 아냐……. 네가 이러면 안 돼…….”

멜리쉬가 이성을 잃어가던 그때, 캐롤라인이 다급히 외쳤다.

“마님! 어서 대공 전하를 안으로 옮기고 의원을 불러야 합니다!!”

“카일…….”

“마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멜리쉬를 보다 못한 캐롤라인이 무례를 무릎 쓰고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멜리쉬가 캐롤라인을 돌아보았다.

“마님, 어서 전하를…….”

찰싹-

캐롤라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멜리쉬가 그녀의 뺨을 내려쳤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야!? 무슨 실수를 했기에! 카일이…….”

“마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멜리쉬가 소리치려던 순간 캐롤라인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멜리쉬는 그제야 멈칫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어느새 그녀와 대공을 경악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멜리쉬는 번득 깨달았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라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캐롤라인에게 지시를 내리려던 찰나, 멜리쉬는 사람들 틈 사이로 군화를 보았다.

귀족들이 흠칫하며 길을 트자, 그 사이로 황실 제 1기사단장 스토로펠이 대공가의 사람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본 순간 멜리쉬는 직감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탁-

스토로펠이 멜리쉬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소란스럽던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와 함께 멜리쉬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차디찬 눈빛들이 느껴졌다.

이윽고 스토로펠이 싸늘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 당신을 블란테 후작 살해 및 황실 암살 시도, 블란테 영애와 대공 전하의 독살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헉!”

“히익!”

경악을 넘어 기겁하는 귀족들의 격한 소리가 하나둘 터졌다.

“뭐? 난 아냐……! 누가 감히 나에게 이런 누명을 씌우……!”

멜리쉬가 눈을 번득이며 소리치려 한 순간 로웰이 차갑게 말했다.

“부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피에두 공작이 모든 것을 자백했으니까요.”

“뭐……?”

“하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피에두 공작에게 하시지요.”

로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멜리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전하를 뫼시거라.”

로웰의 명을 받은 대공가의 기사들이 카일런스를 들것에 태웠다.

“죄인을 포박해라.”

스토로펠의 명에 기사 둘이 멜리쉬를 거칠게 일으켜 두 손에 구속구를 채웠다.

“당장 이것 풀지 못하겠느냐! 난 아니야!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가지.”

멜리쉬는 발악했으나 스토로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목줄에 끌려가는 개처럼 멜리쉬는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 * *

“윽…….”

지끈거리는 두통에 아리엘이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곧 그녀의 이마 위로 얹어진 손에서 나온 빛에 두통은 금세 가라앉아 아리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고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낯익은 그녀의 침실 천장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로 왔더라…….

의식이 느릿하게 돌아오면서 쓰러지기 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멜리쉬의 짙은 미소와 동방국의 차, 카일런스의 피.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 했던 마지막 말.

“……!”

아리엘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괜찮습니까?”

“……아스터 님.”

줄곧 연락을 피했던 그가 지금 여기, 그녀의 침대 바로 옆에 있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대답 대신 질문을 건넸다.

“카일런스가 죽을 거란 걸 알고 계셨나요? 그의 계획을 다 알고 계셨잖아요. 그래서 절 피하고…….”

아스터는 흠, 난감한 듯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뗐다.

“영애, 진정하세요. 대공의 계획을 알고 도운 것은 사실이나, 대공은 죽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피를 정말 많이…….”

아리엘은 눈앞에 선명히 떠오르는 검붉은 선혈에 말끝을 흐렸다.

아스터는 침대맡에 걸터앉으며 아리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대공은 초월자입니다. 그 어떠한 맹독도 그를 죽일 순 없습니다, 영애. 단지 좀…… 많이 고통스러울 뿐이죠.”

“……일부러 독을 먹은 건 맞군요. 그럼 제가 먹은 건 뭐죠?”

자신도 쓰러졌었다. 카일런스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는 아니었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쓰러질 만큼 심약하지 않았으니까.

“약한 수면제였습니다. 물론 공식 발표에선 산야초란 동방국의 희귀 독으로 발표될 거지만요.”

공식 발표까지 다 준비되었다…….

아리엘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아스터를 보았다.

“전부 말해 주세요. 카일런스의 계획이 무엇인지.”

아스터는 후, 짧은 숨을 내쉬곤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억하실 겁니다. 페일린의 장례식에서 대공이 영애께 자리를 비켜 달라 했던 때.”

“네.”

“그때 대공이 부탁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할 맹독을 구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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