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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7)화 (147/153)

147화

아리엘의 머리 위로 황제의 성난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리엘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저를 많이 걱정하셨을 거 같아 의식을 찾자마자 이리 바로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제가 괜찮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또.”

아리엘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황제는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아리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납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것과 달리 황제는 그녀를 내쫓지 않았다.

내쫓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녀가 무얼 알고 있는지 황제도 똑똑히 들었으니까.

아리엘은 고요히 황제의 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숨을 가다듬은 황제가 입술을 뗐다.

“시종장. 궁인들을 전부 물리거라.”

“예, 폐하.”

시종장이 궁인들을 데리고 집무실에서 멀어지자 황제가 그녀에게 덧붙였다.

“들어와라.”

탁-

집무실 문을 굳게 닫은 아리엘은 털썩, 소파에 앉는 황제를 보았다. 황제의 위엄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몹시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하나 아리엘은 그 모습에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못했다.

방관자도 공범이었으니.

황제는 이마를 짚으며 아리엘에게 손짓했다.

“앉지.”

아리엘은 예법대로 상석의 오른쪽 소파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황제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 아리엘을 보며 비소를 흘렸다.

“독을 먹은 사람 치곤 혈색이 보기 좋군.”

“대륙 최고의 치료사인 마탑주님께서 치료를 해 주셨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혹 제가 이리 멀쩡해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아무렇지 않게 되받아치는 아리엘에 황제가 얼굴을 구겼다.

“네가 내 신경을 거스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네가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네 아비도 마찬가지였고.”

“바란 적은 없으셨다지만 죽었다 해도 죄책감 따윈 없으셨겠죠. 잠시 동정하셨을지언정 제 아버지 때처럼 제 죽음으로 인해 황실에 오명이 생길까 사태를 수습하느라 바쁘셨을 테니까요.”

아리엘의 신랄한 비아냥에 황제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었다. 그러나 황제는 아리엘의 무도함에 화를 내기보단 날카롭게 직시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벌인 것이냐. 내가 절대 덮지 못하도록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네 아비를 죽인 멜리쉬를 함정에 빠뜨리고, 죗값을 받지 않은 카일런스에게 독을 먹이고, 때맞춰 피에두 공작에게 자백을…… 하.”

황제는 싸늘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네가 돌아왔던 그날 짐작은 했었다. 네가 복수를 하러 돌아왔다는 것을. 후작이 독살을 당했다는 걸 알았을 땐 더욱 확신했지. 넌 반드시 카일런스를 벌하고, 끝까지 가겠구나.”

아리엘은 가만히 황제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침묵이 인정이라 여긴 듯 황제가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리고 결국 이리 성공하였어. 멜리쉬, 카일런스 그리고 나까지 보기 좋게 네 함정에 빠졌으니.”

황제는 그러다 갑자기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그런 맹독을……. 카일런스가 초월자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카일런스 역시 피해자란 것을 알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잔인했어야 했느냐!”

“…….”

“네가 어떻게 멜리쉬가 저지른 참혹한 짓을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피에두 공작을 잡아 함정을 팔 게 아니라 내게 와 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가…….”

황제가 울분에 차 말을 잇던 순간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아리엘이 입술을 열었다.

“그랬다면 폐하께서 절 믿으셨겠습니까? 피에두 공작이란 증인도 없이 불쑥 찾아와 진실을 말했다면 폐하께서 정말 저를 믿고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을 잡아들이셨을까요? 단순한 사건도 아닌 황족이 황족을 죽인, 반역죄인데요.”

황제는 멈칫했다.

아리엘의 말이 맞았으니까.

처음 들었을 때도 믿고 싶지 않던 소식이었는데 만약 눈에 가시였던 아리엘이 그에게 찾아와 불쑥 그런 얘기를 했다면…….

황제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되려 선을 넘었다, 분노하였겠지.

아리엘은 부정하지 않는 황제를 보다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황제의 착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리고 폐하.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이번 독살사건과 피에두 공작은 제가 준비한 함정이 아닙니다. 저보다 먼저 선 대공 전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안 자가 일을 꾸민 것이지요.”

“……뭐? 너보다 먼저 아놀드의 죽음을 안 자가…… 있다고?”

황제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마 그의 머릿속으로 스치는 사람이 있어서리라.

아리엘은 조금씩 무너지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답했다.

“네. 전 이번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피에두 공작이 잡혔다는 것도, 세이어드 대공이 스스로 음독하리란 것도요.”

“……!”

황제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아리엘은 그에 쐐기를 박았다.

“독을 준비한 것도, 독을 먹은 것도 피에두 공작을 잡아 폐하의 앞에 바친 것도 전부 카일런스 세이어드, 세이어드 대공 전하께서 직접 준비한 함정이었습니다.”

“카일런스가 왜……. 그럴 리가 없다! 정말 카일런스가 먼저 진실을 알았다면 내게 말을 하였겠지! 다른 자도 아니고 내가 카일런스의 말을 믿지 않을 리 없지 않느냐!”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으나 아리엘은 여전히 침착했다.

“믿으셨겠죠. 하지만 흔들리셨을 겁니다. 선 대공 전하께서 죽은 지도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 진실을 밝혀 봤자 황실의 치부가 될 뿐일 테니.”

“…….”

“폐하께선 아마 그 사실은 묻고 다른 죄를 덮어씌워 공작 부인을 벌하셨겠죠. 세이어드 대공은 그 사실을 저보다 더 잘 알았겠지요. 폐하의 성정을 저보다 더 잘 알고, 이미 한 번 폐하께서 진실을 묻으시는 것을 보았으니.”

“네가 무얼 안다고 감히……!”

아리엘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마주했다.

잔뜩 성난 목소리와 달리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아니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아리엘은 검은 눈동자를 옭아매듯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카일런스는 결국 폐하를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여 제 스스로 맹독을, 그것도 엄청난 양을 스스로 털어 넣은 것입니다. 죽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 자신을 덮칠 것을 알면서도, 폐하께 전하고 싶었던 겁니다. 다시는 진실을 외면할 생각 따윈 하지 말라고.”

“…….”

아리엘은 돌처럼 굳은 황제에게 말을 이었다.

“폐하의 외면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자들이 희생되었으니까요.”

아리엘은 무거운 숨과 함께 가져온 서신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황제의 시선이 단단히 묶인 양피지에 닿았다.

“제 아버지께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적은 일지입니다. 이 안에 모든 비극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적혀 있습니다.”

황제는 느릿하게 자리에 다시 앉으며 떨리는 손끝으로 양피지의 끈을 풀었다.

“시작은 수로 사업이었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가장 크게 벌였던 수로 사업. 친우셨던 제 아버지와 선 대공 전하는 수로 사업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두 분께서 친분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전 폐하께선 알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황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폐하와 선 대공 전하께선 매우 가까우셨고, 아버지는 반정 공신이셨으니……. 폐하께서 두 분 사이의 친분을 몰랐을 리 없겠죠.”

아리엘은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폐하의 업적이 될 수로 사업에 가장 큰 반대를 외친 자가 제 아버지였으니……. 눈엣가시처럼 여겨지셨겠지요.”

“…….”

“그리고 이것이 폐하의 첫 번째 외면이었습니다.”

“……뭐?”

황제는 순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 아리엘은 황제가 위태롭게 들고 있는 양피지로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외면은 선 대공 전하의 죽음. 폐하께선 수로 사업의 실패로 실추된 황권이 흔들릴까 대공 전하의 사망에 대해 미심쩍은 부분이 있음에도 서둘러 사고사로 마무리 지으셨죠.”

“…….”

“세 번째는 외면은 홀로 남은 세이어드 대공. 카일런스를……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에게 맡긴 것이었습니다.”

내내 덤덤하던 아리엘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선 비아스테스 공작 부인이 그리 좋은 성품을 가진 자가 아니란 걸 아셨을 겁니다. 설령 모르셨다 한들, 황후 폐하께서 언질하셨을 것이고요.”

황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리엘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했기 때문에.

“네 번째 외면은 제 아버지. 세이어드 대공의 말만 믿고 제 아버지를 반역자로 낙인찍으셨죠. 후에 모함이란 것을 아셨음에도 덮으셨고요.”

“…….”

“폐하.”

아리엘은 시선을 들어 황제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나는.”

“폐하의 외면이 이 모든 비극을 자초하였음을요.”

아리엘이 망설임 없이 비수를 꽂은 순간 황제의 손에서 양피지가 툭, 떨어졌다.

더는 현실을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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