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내가 찾던, 희망의 불빛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그래도 아셔야 할 거 같아서요.”
“아니, 이거 웃긴 놈이네. 네 휴가가 남아서 쓰는 건데 그걸 왜 나한테 보고하냐고.”
나는 내 남은 휴가를 일시에 사용하려고 한다. 이미 비서를 통해 인사처에선 승인이 났다. 허나, 왠지 부사장에겐 따로 보고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이러고 있다.
“글쎄요,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그 이유는?”
“특별히는 없습니다.”
“오케이, 알았다. 근데 며칠이나?”
“10일 썼습니다.”
“네가 웬일이냐, 뭔 일 있냐?”
이상할 거다. 한 번도 휴가를 쓴 적이 없었으니까. 매번 연차가 남아서 자동소멸되는 게 나한텐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그냥 쉬고 싶습니다.”
“음… 좀 시원하게 말해 주지? 갑자기 왜 쉬고 싶은 건데.”
분식집 때문에요.
“가벼운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습니다. 한 번도 그래 보질 못해서요.”
부사장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우와, 너… 정수찬 맞냐?”
“맞습니다.”
“솔직히 말해라,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이 양반은 항상 보면, 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거 같더라.
“저 못 믿습니까?”
“믿지, 믿는데… 본부장 정수찬은 믿는데 인간 정수찬은 잘 모르겠네?”
내가 분식집 한다는 걸 눈치라도 챈 걸까. 아니다, 그냥 떠보는 거겠지.
“본부장과 인간 정수찬은 같은 사람입니다.”
“알았다, 그리 알고 있을게. 들어가 봐.”
“근데 요즘 들어 수행비서가 안 보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부사장 근처에 항상 있어야 할 사람이 수행비서다.
“아, 내가 일 좀 시켰어. 앞으로도 당분간은 회사에 없을 거야.”
부사장은 뭔가 큰일이 있을 때마다 수행비서 오원식을 사용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부사장의 해결사 노릇까지 도맡아서 처리한다.
“그럼 휴가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그래라, 잘 쉬고.”
“감사합니다.”
휴우, 이제야 진짜 휴가가 완전 처리된 느낌이다.
이제 제대로 취미 생활을 즐기러 가 볼까? 부사장한테 말한 가벼운 여행을 할 생각이다. 떡볶이 투어!
* * *
창문을 열고 송용진에게 말했다.
“타라.”
“형님, 어쩐 일이세요.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오늘부터 휴가야.”
대낮부터 내가 부르니, 놀랄 수밖에.
“그럼 저희 어디 가요?”
“떡볶이 먹으러.”
오늘은 동생의 친구 송용진과 떡볶이를 먹으러 갈 생각이다. 일전에 용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떡볶이는 좋아해?”
“형님! 저는 떡볶이 없어서 못 먹죠. 엄청 좋아해요! 분식은 다 좋아해요.”
그 말이 떠올라서 오늘 부른 거다.
내가 분식집을 하려고 했던 이유. 돌이켜 보면 어릴 적 추억이 있어서였다. 동생 수환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떡볶이였다.
“와, 근데 형님 차 진짜 죽이네요!”
용진이가 부사장이 사 준 람보르기니의 실내 여기저기를 만져 보며 말했다.
“죽이긴… 타다 보면 내가 먼저 죽을 거 같다, 불편해서.”
부우웅!
액셀러레이터를 조금만 밟아도 차가 미친 듯이 튀어 나간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도로에 기름을 뿌리고 달리는 격이다. 연비를 체크해 보면 한숨이 다 나온다.
“이거 사신 거예요?”
“너는 날 뭘로 보냐, 내가 이런 걸 왜 사?”
“뭐예요 그럼! 선물받은 거예요?”
“후… 그래서 타야 돼. 성의를 생각해서 가끔씩 밟아 줘야 된다고.”
이 차의 가장 거슬리는 점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이다. 왜 하필 꼭 사 줘도 황금색을 사 주냐고.
우리는 강남 한복판도 아니고 하남으로 가고 있다. 외곽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눈에 띌 거다. 난 이런 게 참 불편하다.
신호가 걸리자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잠깐만…….”
부사장이 사 준 롤렉스 시계를 찬 손목이 보이도록 각을 잡고 람보르기니 핸들 사진을 찍었다. 포인트는 손목과 자동차 핸들이 동시에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을 부사장에게 보냈다.
[부사장님 덕분에 행복한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송용진이 물었다.
“누구한테 보내시는 거예요?”
“내 보스한테.”
이런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지만 별수 있나. 그래 봐야 난 직장인이고 사 준 사람이 회사의 오너다.
부사장의 성의도 있고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이 정돈 해 줘야, 앞으로 내 회사생활이 수월할 거다.
“우와, 형님 진짜 멋지시네요.”
이 녀석은 대체 뭐가 멋지다는 거야. 직장 상사한테 아부 떠는 게 멋지다고?
“이것도 직장 생활의 일부야.”
[맘에 들 줄 알았다! 휴가 즐기시길!]
우리 부사장님 좋단다. 이럴 때 보면 참 단순한 양반이라 핸들링하기 편한 성품이다. 거기다 회사에선 맺고 끊는 게 확실해 깔끔한 직장 상사다. 다만, 개인적으로 들어가면 좀 질척거리고 잔소리가 심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거야 뭐, 사람마다 다 장단이 있으니까.
“그래도 부럽네요, 회사에서 이런 것까지 준 거 아니에요?”
“이런 것까지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야. 그게 사회 생활이다.”
“저는 이런 차 타 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오늘 소원 성취 하나 했네요. 하하!”
송용진. 이 녀석은 서글서글한 성품이 장점이다. 돈도 많은 놈이 어쩜 이리 착하고 순박해 보이는지.
“너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아?”
“그게 어디 제 돈인가요? 아버지는 제가 돈 쓰는 거 싫어해요. 하는 것도 없는 놈이 돈만 축낸다고 잔소리 장난 아니에요.”
용진이의 아버지는 주류 도매업을 하신다. 요식업 계통에선 제법 알려진 회사의 오너다. 내가 동생 수찬이에게 듣기론 건물만 5채를 소유한 재력가다.
“그래도 자식인데 뭐라도 남겨 주시겠지.”
“유산은 남겨 줄 테니까 자기 죽거든 그 돈 쓰래요. 제가 허투루 돈 쓰는 걸 엄청 못 견뎌 하시거든요.”
사람마다 환경도 제각각이고 나름 고민거리가 있구나. 다행인 건, 깐깐한 아버지의 성격을 용진이가 닮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녀석을 보고 있자면 덩치가 크고 착한 골든리트리버 같은 느낌이다.
“다 왔다.”
시장 입구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이곳에 유명한 떡볶이 맛집이 있다.
점심시간 전인데도 손님이 제법 있었다. 누추해 보이는 이곳이 전국 5대 떡볶이 맛집이랜다. 나도 실제론 처음 와 봤다.
“여기 떡볶이 2인분이랑 꼬마김밥 1인분 주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했다.
“형님, 순대도 시킬까요?”
“아니, 배부르면 안 돼.”
이곳에선 가장 유명한 게 떡볶이와 꼬마김밥이다.
“미리 식사하셨어요?”
“여기 말고도 가 봐야 할 데가 있거든.”
음식은 금방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떡볶이. 꼬마김밥은 속재료가 부실해 보였고, 참기름이 듬뿍 발라져 있었다. 요리의 완성은 역시 참깨라는 걸 보여 주듯이, 깨가 가득 뿌려져 있었다.
“먹자.”
우선, 떡은 쌀떡이었다. 밀떡에 비해 쌀떡은 간이 덜 밴다는 단점이 있는 대신 오래 끓여도 쫀득쫀득하다는 장점이 있다.
“쫄깃하네.”
식감은 만족스러웠다. 적당히 쫄깃거리면서도 퍼지지 않고 탱글한 떡의 탄력까지 남아 있었다.
“맛이 어때?”
“맛있는데요!”
“난 좀 아쉬운데.”
내가 생각하는 떡볶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좀 더 달아야 할 것 같았다. 이 떡볶이는 고추장 특유의 매콤한 맛이 아니고 고춧가루의 매큼한 맛이 났다. 나도 고추장보다는 고춧가루가 많이 든 떡볶이를 선호한다. 헌데, 여기는 단맛과 매운맛의 조화가 모자랐다. 약간 슴슴한 맛과 짭짜름한 맛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굵은 고춧가루를 썼는지 떡볶이 국물의 뒷맛이 텁텁했다.
“김밥도 먹어 봐.”
꼬마김밥은 진짜 성의가 없었다. 김밥 속엔 단무지와 시금치, 당근이 전부였다. 엄지만 한 김밥 6개가 3천 원. 카드도 받지 않는 시장인 걸 감안하면, 비싸다.
“난 별로야. 또 와서 먹을 거 같진 않은데.”
“저도 그래요, 양이 너무 적어요.”
이미 속재료와 사이즈, 가격에서 마이너스가 되어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떡볶이도 가격에 비해 양이 적었다. 어묵 국물도 주지 않는다. 따로 어묵을 주문해야만 국물을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분식은 야박해선 안 된다.
“가자.”
“넵!”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용진이는 잽싸게 일어났다. 어쨌든 이 떡볶이집은 내가 원하던 맛이 아니었다.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종로구의 떡볶이집이다. 이 집의 특이점은 24시 영업이라는 것이다.
“신기하네요. 떡볶이집이 24시라니.”
“그러니까… 사장님 여기 떡볶이 2인분이랑 순대 1인분 주세요.”
이 집은 떡볶이와 순대가 유명하다. 24시 연중무휴 영업이라 그런지 음식 가격이 대체로 비쌌다.
이제 맛을 보자.
“음… 떡이 진짜 쫀득거리네요.”
신기했다. 쌀떡인 거 같은데 과하게 쫄깃쫄깃하다. 이 식감 하나만으로도 이 집 떡볶이는 특별했다. 아까 그 시장 떡볶이보다 두 배는 더 쫀득쫀득했다.
“떡볶이 양념도 맛있네.”
적당한 단맛과 매운맛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떡볶이 맛이었다. 그래, 이게 떡볶이지! 반딱반딱 윤기 나는 걸 보니, 설탕보단 물엿을 더 많이 쓴 것 같다. 먹다 보니 어느새 숟가락으로 떡볶이 국물을 떠먹게 된다. 걸죽하고 진한 양념이 일품이었다.
“밀떡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원하는 떡볶이는 밀떡이 베이스다. 하지만 밀떡이었다면 지금처럼 과할 정도로 쫀득한 식감은 포기해야 할 거다. 대체 떡에 어떤 가공을 했길래 이렇게 쫄깃거리는 걸까.
“와, 형님…….”
“왜.”
“순대 대박!”
용진이의 표정을 보며 나는 순대를 입에 넣었다.
“진짜 맛있네.”
순대 특유의 돼지 비린내는 거의 나지 않았다. 탱글탱글한 당면이 단연 압권이었다. 거기다 짭조름하면서 감칠맛도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순대를 씹었을 때 나오는 육즙도 상당했다. 전체적으로 맛이 진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한번 먹어 보면 또 생각나는 맛이다.
‘이 집은 순대만 포장해 가는 사람이 많다던데, 그 이유가 있었네.’
떡볶이도 훌륭했지만 순대가 더 먹을 만했다. 기성품을 쓰는 것 같지는 않고 따로 어디 공장과 계약을 맺었나? 일반 분식집이라 순대를 직접 만들진 않을 텐데. 이 분식집은 묻고 싶은 게 많은 집이었다.
“24시를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겠네.”
괜히 가게를 풀로 돌리는 게 아닐 거다. 다 그만한 수요와 수익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연중무휴를 해도 남는 장사란 소리다.
“됐다, 가자.”
“이제 어디 가요?”
“혹시 배불러?”
“에이, 형님 저를 뭘로 보고. 아직 반도 못 채웠어요!”
송용진은 두툼해 보이는 뱃살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좋다, 그런 자세. 갑시다!”
이곳은 내가 원하는 맛에 근접한 떡볶이였다. 다만, 밀떡이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나는 밀떡을 사용할 생각이다.
그렇게 오늘 하루 총 7군데를 돌아다녔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 8시를 넘겼다.
“뭔가, 입맛은 없는데 배부르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조금씩 여러 번 나눠 먹어서 위에 부담이 많이 갔을 거다. 나 역시 더는 못 먹겠지만 배가 부르다는 느낌은 없다. 소화기관에 부담을 줘서인지 좀 피곤했다.
“오늘 고생 많았다.”
“원하시는 맛은 찾았어요?”
“글쎄다.”
차로 용진이를 데려다주는데, 언덕 위로 허름해 보이는 가게가 보였다.
[먹보 떡볶이]
낡은 간판인데 밝게 빛났다. 왠지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나는 자연스레 차를 돌려 그 떡볶이집 앞에 주차했다.
가게는 경사로 중간에 위치했다. 그 위로는 초등학교가 보였다.
‘학교 앞 떡볶이는 거의 정석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영업 끝났나요?”
“아뇨, 떡볶이 좀 남았어요. 드려요?”
“네.”
철판을 보니, 2인분이 좀 안 되는 양이었다.
“그냥 남은 거 다 주시죠.”
“그래요.”
자리에 앉았다. 벽에는 온통 학생들 낙서로 즐비했다. 이런 분위기 좋다.
“이 집이 마지막이겠죠?”
용진이도 조금 지친 모양이다.
“약속할게. 마지막.”
사장님이 떡볶이를 내왔다. 옛날 학교 앞 떡볶이집에서나 볼 수 있는 초록색 무늬 플라스틱 쟁반에 담긴 떡볶이. 반가웠다.
“잘 먹겠습니다.”
기다랗게 휜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어?”
바로 하나를 더 먹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이 맛이야…….’
내가 찾던, 오래전 먹었던 그 맛의 떡볶이였다.
순간, 소음을 내며 깜빡이는 가게 형광등마저 희망의 불빛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