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국적 분식생활-26화 (26/210)

26. 다이나믹 휴가 (2)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달라진 할아버지의 말투만큼 그의 표정 역시 진지하고 사뭇 젠틀하게 느껴졌다.

“뭐, 뭡니까?”

“하하, 잠시만요.”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뒤로 움직이더니, 헤어 무스를 꺼내 손에 한가득 뿌렸다.

‘요즘에도 무스를 쓰는 사람이 있나.’

그러곤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모두 넘겼다. 올백스타일로.

“잠시만요, 거의 다 됐습니다…….”

그가 입고 있던 마을 이장님스러운 민방위복을 벗었다. 깔끔한 은색 수트가 나왔다. 수트의 핏이나 떼깔로 보아하니 명품 같았다.

‘이 사람, 뭐야 대체.’

나는 놀라운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쓰고 있던 두툼한 돋보기 안경을 벗고 얇고 세련된 무테 안경으로 바꿨다.

“다 됐습니다.”

내 앞에 있던 촌스러운 노인이 도시의 젠틀한 중년 신사로 변모했다.

“누구십니까?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중년 신사는 손거울을 들어 한 올 떨어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저 사실 서울 출신입니다.”

“아깐 사투리 쓰셨잖아요.”

민망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짓는 중년 신사.

“취미라고 해 두죠. 이런 외진 곳에 복덕방을 하면서 전원생활 즐기는 게 로망이거든요. 현재 보는 바와 같이 낭만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게 취미? 로망이라고? 이럴 수도 있나.

“하지만 아직도 저는 현역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근방에 제 사무실이 있습니다.”

그는 나를 복덕방 뒷문으로 안내했다. 문밖에는 새빨간 페라리가 주차돼 있었다.

‘와우…….’

그가 차 문을 열고 말했다.

“차분히 달리면 10분. 야생마처럼 달리면 5분입니다. 타시죠?”

이 사람 진짜, 뭔가 대단한 위인처럼 보인다.

심지어 주차장도 원격 리모컨으로 문이 열렸다. 누추해 보이는 가옥인데, 이 주차장만 새로 리모델링한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았다.

“자, 가 볼까요?”

부웅!

두툼한 배기음을 내며 페라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민망하게도 차의 뚜껑이 열리기까지 했다. 차는 하드탑 컨버터블이었다.

“느껴 보십시오, 손님. 이 바람을! 이 행복을요!”

이 사람 괜찮은가, 음주운전은 아니겠지?

그의 말대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규모가 있네요.”

좀 놀랐다. 동네 공인중개사 수준이 아니었다. 일하는 직원만 5명이었고 넓은 공간을 2층으로 나눠서 사용하는 사무실이었다. 인테리어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다이나믹 벤처스]

부동산 이름이 특이하다. 투자회사인데 공인중개를 겸하는 건가.

“거기 앉으시죠.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시원한 커피로 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여기, 아이스커피 두 잔.”

“아까 말씀드린 그 땅을 사고 싶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뭣 때문에 사려고 하시는지는, 참! 궁금하군요. 용도가 뭔가요?”

“땅 투자야 뭐 뻔한 거 아닙니까.”

말이 좋아 투자지. 재테크의 탈을 쓴 땅 투기라고 읽는 게 옳을 거다.

“투자라… 알겠습니다. 더 길게 여쭙진 않겠습니다. 그래, 얼마나 필요합니까?”

“최대한 많이요.”

나는 손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가 대부분 임야라서 비싸진 않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원하시는 구역과 넓이를 알려 주셔야 진행이 더 순조롭습니다.”

아까의 늙은 복덕방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프로페셔널한 공인중개사와 거래하는 기분이다. 깔끔하고 순조로운 느낌.

“직접 지정해 드리죠.”

나는 벽에 붙은 지역 안내도 앞으로 가서 원하는 만큼을 손으로 그렸다. 마치 땅따먹기 하는 느낌이었다.

“오우, 자본이 상당하신가 봅니다. 저렴하더라도 금액이 꽤 될 텐데요.”

“돈이야 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끌어올 수 있는 대출을 다 땡길 작정이다. 서울 강남에 재건축 예정인 아파트와 현재 살고 있는 성수동 아파트를 담보로 잡고, 주식투자로 번 82억과 기존 은행 예금 2억, 거기다 신용대출, 주식담보 대출까지 더 하면 150억가량 만들 수 있을 거 같다. 위험부담은 전혀 없다. 부사장이 나를 물 먹였을 리 없다. 최고급 정보를 받아들이는 태도란, 결국 올인이 예의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게 아니니까.’

물 들어올 때 힘껏 노를 저어야 한다.

“상당한 자본가이십니다. 좋습니다. 진행해 보죠.”

“근데 아까 말씀하셨던… 저 말고 어떤 분이 땅을 샀다고 하셨는데.”

“아, 그랬죠. 한… 3일 됐나요? 그 지역에 놀이공원이라도 짓는 줄 알았습니다! 어마어마하더군요.”

“그 위치가 어디인가요?”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입니다. 엄청나죠?”

정말 엄청난 부지를 매입했구나. 우리 부사장님.

“그렇군요, 혹시 말입니다… 여기 말고 다른 지역도 중개하십니까?”

부동산이야 타 지역이라도 연계해서 중개업무를 보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소개에 소개를 거쳐 거래를 하면 뒤탈이 생길 가능성이 좀 있다. 뭐든 한 곳에서 거래하는 게 깔끔하다.

사무실을 보아하니, 이곳 하나만 있어 보이진 않는다. 모두 공인중개사로 보이는 직원만 5명, 사무실 한쪽엔 전국구 지점 현황표까지 있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주요 지역에 지점이 여러 개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35개 지점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거느리고 있다? 그럼 프렌차이즈화인 것 같은데, 부동산도 체인 사업이 가능하다는 게 좀 놀라웠다.

“이번 거래가 잘되면 다른 지역 땅도 사려고 합니다.”

“그래요? 어디를 또 보고 계십니까?”

할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눈에서 자본주의의 찬란함이 엿보였다.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남이요.”

* * *

의외로 거래가 수월하게 진행될 거 같다. 내일 중으로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전화를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그 양반 진짜 특이하다. 보면 볼수록 비범한 인물이다.

‘돈깨나 있는 거 같은데.’

이제 은행과 증권사로 가서 대출을 신청하면 된다. 떼야 하는 서류만 한가득이라 오늘 하루를 전부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구청에서 서류를 떼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럴 때 수행비서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본부장실을 지키는 안내비서와 운전기사가 전부다. 수행비서쯤 있으려면 부사장급은 되어야 한다. 내가 하겠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중엔 결국 하게 되지 않을까.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러면 이런 짜잘한 일을 수행비서가 알아서 다 처리해 줄 거다.

‘하긴, 이런 귀찮은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겠어.’

이런 잡무는 줄겠지만 귀찮은 만남은 늘어나는 자리가 되겠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잡념이 길어졌다.

오후 4시가 가까워지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처리했다. 은행과 증권사에서 대출 신청을 끝마쳤다. 조만간 승인이 떨어졌다는 연락이 올 거다.

바로 차를 타고 움직였다. 법인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대행업체를 방문했다. 반나절이면 법인 회사가 뚝딱 만들어진다. 그렇게 부동산 투자 법인 회사를 설립했다.

개인이 거액을 투자하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국세청에서 세금을 폭탄으로 던져 줄 가능성도 있고, 아주 재수가 없으면 투기 세력으로 간주하여 검찰에 소환될 수도 있다. 부사장이 사전에 약을 쳐 놨다곤 하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리하는 게 안전하다. 게다가 법인의 절세 혜택도 무시 못 하니까.

“따지고 보면 참 웃겨.”

법인을 세우고 부동산을 투기하면, 그건 엄연한 투자가 된다. 대한민국에선 조금만 신경 쓰며 충분히 법을 피해 갈 수 있다. 법인은 절세와 합법화를 동시에 쥘 수 있는 카드다.

반나절 만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할 수 있는, 그것도 대행업체를 통해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 몇이나 될까. 대한민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 * *

“여깁니까? 정말이네요.”

“뭐가요?”

“본부장님 말씀대로 규모가… 작은데요?”

모멘트 인테리어의 소장이 분식집에 방문했다.

“작지만 알찬 곳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건 걱정 마세요, 저희 실력 아시잖습니까. 먼저 다 뜯어내야겠죠?”

“네, 싸그리! 완전 깨끗이 철거해 주세요.”

나도 모르게 감정이 실렸다.

“알겠습니다. 디자인은 저희가 해 드릴까요, 아니면 미리 봐둔 거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꿈꿔 왔던 분식집인데, 설마 없으려고?

“대충 스케치한 건데, 이걸 기본으로 디자인 작업 해 주시면 됩니다.”

내가 건넨 노트를 들고 소장이 놀란다. 그 안에는 주방과 홀의 나름 디테일한 스케치가 담겼다. 총 12장이다.

“그림도 배우셨습니까? 못하시는 게 없으시네요.”

나는 그림엔 소질이 없다. 편한 대로 그린 일반 스케치다. 과한 아부라서 내가 다 민망할 수준이다.

“그냥 뭐…….”

“이거면 이미지 작업할 수 있겠네요. 덕분에 수월하겠습니다. 철거는 언제부터 진행할까요?”

“지금이요.”

“네?”

“이렇게 오셨잖아요? 오신 김에 처리하시죠. 철거반 따로 운영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요… 아마 지금 퇴근했을 텐데요….”

“제가 사전에 급하다고 말씀 드린 기억이 있는데, 이거 곤란하네요.”

“아니죠, 곤란하시면 안 되죠!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

현재 시각 오후 6시. 이 시각에 철거를 한다고 해도 주변에 크게 민폐는 아닐 거다. 건물을 철거하는 게 아니라서 포크레인이나 덤프트럭이 올 필요가 없다. 인부 몇 명 불러서 가재도구와 주방 시설만 들어내면 될 거다. 철거하고 인테리어 하는 김에 홀에 테이블과 의자도 다 버리기로 했다. 낡아서 어디다 내다 팔 수도 없는 수준이다.

“근데 이건 대국푸드 일은 아니죠?”

“아닙니다.”

딱 잘라 말하고 자리를 옮겼다. 괜히 이것저것 캐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해진다. 어차피 이자도 회사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고 혹시나 회사에 알려지면 곤혹스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특히, 부사장…….’

그 잔소리 대마왕이 가게까지 들이닥칠까 봐 조마조마하다.

“아, 본부장님!”

현장을 실측하던 소장이 밖에 있는 나를 불렀다.

“네.”

“간판도 새로 하실 거죠?”

“간판이요?”

“아니면 기존 그대로 가시나요? 상호를 유지하실 거면 이름은 그대로 가시고 간판 해 드리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이름이라, 가게 상호가 중요하긴 하지.

나는 고개를 들어, 가게 이름을 올려다봤다.

[만나 분식]

촌스럽지만 익숙한 상호다.

‘맛나다’와 ‘만나다’의 중의적인 의미로 보일 수도 있다. ‘맛나’의 발음은 ‘만나’로 들리니까.

“간판은 좀 더 생각해 볼게요. 내일까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럴 땐 아이디어 뱅크가 필요한데, 딱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수환아 어디야?”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정수환이 독특한 생각이나 창의력은 좋은 편이다.

-퇴근 중. 왜?

“형이랑 밥이나 먹자.”

-나 내일 일찍 출근해야 돼서…….

“너 한우 좋아하지 않아? 아니면 호텔 가서 스테이크 먹을래?”

-뭐야, 뭔 일 있어?

“뭔 일이야 항상 있지. 오는 걸로 안다… 아니다, 내가 간다.”

오늘 술 마실 생각은 없다. 내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밥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래, 와. 내가 밥 한 끼 잡숴 주지.

“오케이, 광화문 근처에서 보자.”

모멘트 직원들에게 철거를 맡기고 나는 살고 있는 아파트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람보르기니에 시동을 걸었다. 어느새 낮에 보았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조금 받은 거 같다.

차 시동을 걸었다.

부우웅!

퇴근 시간이라 예상보다 차가 더 막혔다. 러시아워의 서울은 언제나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하루 동안 많은 일을 했네.’

이게 휴가가 맞나 싶다. 어째 평소보다 더 바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게에선 철거가 진행 중일 거고, 은행에선 대출 심사가 진행될 거고, 공인중개사에선 토지 중개를 준비하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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