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정신승리
가게 인테리어는 마무리됐고, 모멘트 직원 3명이 남아서 마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다 돼서야 새로운 간판이 도착했다.
“어, 왔네?”
현장 소장이 반갑게 간판집 트럭을 맞이했다.
간판을 보자마자,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이게?”
내일이 분식집 오픈인데, 나는 이틀 전 일을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틀 전에 다이나믹 벤처스 사무실에서 땅 매매 계약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중요한 순간이지만 모멘트 소장님이라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잠시만요. 네, 소장님 말씀하세요.”
-본부장님! 제가 어제 핸드폰을 잃어버려서요, 문자로 보내주신 가게 상호명이 다 지워졌습니다. 지금 간판집 왔거든요? 그때 뭐라고 하셨더라, 이름이 뭐였죠?
“‘분식’ 하고 나서 콤마 그다음에 한 칸 띄고 ‘진정성’입니다.”
문제는 주변이 매우 시끄러웠다. 소음이 커서 소장님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분식’ 콤마 ‘진정성’이요.”
-아아, 분식인데… 정성… 이요? 맞죠!
심지어 전파에 문제가 있는지 음성이 끊기기까지 했다.
“제대로 알아들으신 거 맞아요? 그니까 분식 하고 콤마…….”
-네, 네 알아들었습니다. 기억이 나네요. 그걸로 하겠습니다.
뭔가 불안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다이나믹 벤처스 노신사가 헛기침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더 전화를 이어 가기 곤란했다.
“전화가 길어지시면 저 잠깐, 복덕방에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계약 막바지인데 이런 식으로 딜레이 되는 건 좋지 않다.
“아닙니다. 다 됐습니다.”
내가 뜸을 들이자, 전화기 속 소장님이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간판 제작합니다! 여기 되게 시끄럽네요. 본부장님 들어가세요.
“네, 소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뭔가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여전히 의심이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받쳐 주질 않아서 바로 전화를 또 걸 수 없었다.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축하드립니다. 성공의 말에 올라타시길 기원드립니다. 이제 달리는 일만 남으셨기를 바랍니다.”
그의 독특한 멘트를 듣고 우리는 악수를 나눴다. 오늘의 할아버지는 노란색 수트를 입었다. 얼핏 보면 트로트 가수인 줄.
“고생하셨습니다.”
* * *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간판은 가게 입구 상단에 걸렸다.
[정성 분식]
순간, 아찔한 기분이 나를 휘감았다.
‘이게 뭐냐고!’
옆이 있던 송용진이 슬쩍 다가와 놀라는 눈치다.
“형님… 이거.”
“그으래… 맞다. 잘못된 거 맞아.”
나의 깊은 한숨과는 동떨어져 있는 소장님의 환한 미소가 보였다. 건치를 한껏 드러내며 그가 말했다.
“이야, 간판 잘 나왔네요!”
“소장님.”
“본부장님도 마음에 드시죠? 깔끔하게! 나왔네.”
“저 그냥 가게 때려치우고 직장 생활이나 열심히 할까 봐요.”
이 상실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했다.
“네? 그게 무슨…….”
“제가, 분명, 분식이라고 쓰고 콤마하고, 진정성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던 거, 같은데요.”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으려고 안간힘 썼는데 쉽지 않았다.
“뭐요! 코, 콤마요?”
소장님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다.
“용진아.”
“네, 형님.”
“그냥 가게 접을까. 갑자기 하기 싫어졌다.”
내가 낳은 아이의 이름을 정성껏 지었는데, 구청 직원이 마음대로 이름을 바꿔 버린 기분이다. 억울하다!
나는 모든 정황을 설명했고 내가 보냈던 문자까지 소장님에게 보여 줬다. 당황스러운 그의 표정에서 나는 암울한 현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어쩌죠, 내일부터 황금연휴라서 간판집에 문의하기 힘들 거 같은데요, 저희가 거래하는 업체가 영등포에도 하나 있는데요, 거기도 오늘부터 휴무라고 해서요…….”
난색을 표하며 담배만 뻑뻑 피우시는 소장님.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나이 지긋한 어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진다.
“별수 없는… 건가요?”
“하아, 이거 참.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보면… 어?”
뭔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듯이, 소장님이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아! 아니면 급한 대로, 현수막이라도 제작해 볼까요. 그건 지금 바로 가면 해 줄 수도 있는데.”
“현수막으로 간판을 가린다고요?”
“우선… 급한 대로 그렇게 하시죠, 내일부터 영업한다고 하시니까…….”
그럴 순 없다. 그래선 안 된다. 그런 임시 영업소 느낌이 나는 가게라니. 세상에!
“요즘엔 그런 가게도 많더라고요. 나름 특색도 있고요, 허허.”
새로운 돌파구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소장님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한시름 놨다는 표정이다. 그걸로 임시방편이 가능할 거라 여긴 모양이다.
“어때요, 괜찮으시죠?”
“제 가게가 무슨 ‘사장님이 미쳤어요!’ 이런 컨셉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테리어까지 싹 새로 한 가게인데 현수막이 가당키나 합니까?”
나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쳤다. 첫 가게고, 애정할 수밖에 없는 어릴 적 꿈인 분식집이다.
“죄송합니다.”
“아뇨, 됐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내 탓이 크다.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했다.
“어쩌시게요.”
“어떻게든 해야죠. 오픈하기로 했으니, 해야죠.”
예전에 즐겨 인용하던 문구가 떠올랐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 아니다, 아니다! 지금 이 말이 나올 때가 아니다. 이건 엄연한 실수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나와 어울리는 구석도 있다.
어차피 내 시작은 늘 이런 식이었다. 고아였고 가난했고 누구 하나 기댈 사람조차 없는 환경에서 시작했다. 대학 생활도 친구 하나 없는 왕따였고 회사 생활도 차별과 멸시를 기본 베이스로 시작했다. 오히려 이게 더 나다운 가게인지도 모른다.
“어휴…….”
아무리 정신승리 해 보려 해도 나오는 건 한숨뿐.
“본부장님… 제가 한 번 더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연휴 끝나고 다시 하면 일주일은 걸려야 할 거 같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다 조금씩 책임은 있다. 그건 아는데,
화가 뻗치는 건 어쩔 수 없다.
* * *
대국푸드 기획전략팀 제1회의실.
기획전략 1팀과 2팀을 모았다. 과장급 이상만 모였는데도 16명이나 된다.
“다 같이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1팀과 2팀이 동시에 모인 이유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새 프로젝트라고 하니 팀원들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기대와 포부를 드러낸 이도 있고 귀찮은 걸 또 해야 한다는 뉘앙스의 표정을 드러낸 이도 있다. 아무리 에이스들이 모였다고 한들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하는 곳이다. 일을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업무를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이다.
“식품쪽인가요, 프렌차이즈인가요?”
나호철 팀장이 물었다.
“아무래도 프렌차이즈가 유력할 거 같습니다. 오늘 준비한 자료도 프렌차이즈의 런칭에 관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의 특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대국호텔과 협력하여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호텔 셰프들이겠죠?”
“아니오, 셰프들뿐만이 아닙니다. 대국호텔 계열사 전체와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네? 그게 가능한가요?”
“이제부터 가능할 전망입니다. 저희 대국푸드와 대국호텔이 함께 진행하는 공동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1팀, 2팀이 모두 모인 겁니다.”
회의에 참석한 팀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둘러봤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질 않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가 주도하여 진행하는 프로젝트인가요, 혹시…….”
애매하긴 할 거다. 대국호텔의 규모로 보아서 우리가 서포트하는 그림도 그려 볼 만하다. 대국호텔은 시가총액으로 보면 여전히 대국푸드보다 더 큰 계열사인 건 맞다. 가끔 셰프들과 공동으로 연구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놓고 대국호텔 전체와 연계 프로젝트를 벌인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아, 그걸 말씀 안 드렸군요. 저희가 주도합니다. 대국푸드의 주도하에 완성될 것이며, 대국호텔은 저희를 지원해 줄 겁니다.”
듣고 있던 전용재 부장이 나섰다.
“그러면… 본부장님. 대국호텔이 서포트 역할을 해 준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대박!”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국내 호텔 사업부문 서열 1위가 대국호텔이다. 그 콧대 높은 대국호텔이 우리를 서포트해 준다니.
“그래서 여기 모인 분들의 임무가 막중합니다. 과장님, 팀장님, 부장님이 모두 합심하여 큰 그림을 완성하셔야 합니다. 저도 물론 최선을 다할 거고요.”
대국푸드에서는 과장, 팀장, 부장 순으로 직급을 나눈다. 보통의 회사에서는 팀장을 직책으로 여기는데 여기선 팀장도 직급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규모가 제법 클 예정입니다. 제가 준비해 온 자료를 먼저 보시죠. 최근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아무래도 안전하겠죠?”
미리 나눠 준 인쇄물은 총 12페이지로 돼 있다.
요즘 인터넷에서 자주 검색되는 검색어와 파워블로그의 게시물도 첨부해 놨다. 현재 2004년은 인터넷이 주도하는 시대다.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참고하여 트렌드 변화를 감지하는 게 첫 번째 순서다. 스타의 미니홈피와 파워블로그의 영향력은 이미 마케팅에서 검증되어 활용 가치가 크다. 우리 같은 대기업이라도 흐름을 간과할 순 없다.
“‘인터넷의 활용’을 넘기시면 ‘젊은 소비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그 부분을 먼저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말씀드리죠.”
젊은 소비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들은 소비의 트렌드와 여론을 이끌 만한 저력이 있다.
“젊은 소비자는 3가지가 많죠. 돈, 체력, 호기심. 이 가치가 합쳐져 맞물리면 바로 소비와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집니다.”
그들의 소비 트렌드와 주요 관심사가 이번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타깃층은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의 소비자로 잡았습니다. 그들은 소비력을 갖췄고 무엇보다 왕성한 사회활동을 기반으로 활동 반경이 가장 넓은 계층입니다. 거기다 미래지향적인 성향을 내포하고 있죠, 이 말은 새로운 것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기심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의 소비자로 지정했다는 건, 확실히 돈 되는 아이템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국호텔까지 끌어들인 대형 프로젝트인데 큰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기회비용만 축낸 꼴이 될 수도 있다.
이때, 회의실 쪽 창문으로 나를 보고 있는 부사장이 보였다.
‘뭐야, 저 양반이 왜 저깄어?’
지금 나를 감시하나. 나는 미간을 좁히며 가볍게 묵례를 했다. 부사장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잘 이행하는지 지켜보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수찬이, 잘하고 있어?”
그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지원된다.
부사장이 조금 지켜보다가 손을 올리곤 돌아섰다.
아휴, 저 잔소리꾼. 사무실로 가면 또 마주치겠구만.
나는 다시 회의를 주도했다.
“…그리고 신성푸드에서 미국의 외식 체인업체인 아웃벅의 라이센스를 취득하여 매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아웃벅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브랜드의 카테고리는 패밀리레스토랑인데, 현재 저희 대국푸드에선 취급하지 않았던 분야입니다. 하지만 최근 외식 인구의 증가와 함께 좀 더 고급스러운 장소에서 다채로운 음식을 소비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신성의 아웃벅은 패밀리레스토랑 체인 부문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대국에선 손 놓고 있었는데, 보기 좋게 선점을 놓쳤다. 지금이라도 대국호텔과 손잡고 경쟁하면 승산은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외식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가족, 친구, 연인들만 레스토랑을 찾는 건 아니죠. 요즘엔 돌잔치도 패밀리레스토랑에서 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생활 전반에 걸쳐, 편안하고 쾌적한 분위기에서 좋은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가격보다는 한 끼를 먹더라도 대접받으면서 즐기고 싶다, 라는 인식이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저희 대국푸드는 솔직히 후발주자입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동안의 외식 경영 노하우와 탁월한 프렌차이즈 관리 능력으로 시장에 진입할 생각입니다. 이번엔 대국호텔도 함께죠, 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확신에 찬 기획 발표를 보고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싸움인 건 분명하다. 이미 패밀리레스토랑 시장은 안정적으로 안착되어 있다. 3개의 업체가 경합을 벌이고 있고 모두 대기업이다. 이 시장에 우리가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제가 생각한 개요는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큰 그림을 기획하여 스케치만 해 주면 나머지는 팀원들의 역할이다. 그들의 역량을 발휘하여 그림의 디테일을 완성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