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국적 분식생활-63화 (63/210)

63. 욕심과 신념 사이

“형님, 여기요!”

지난번 용진이와 끝까지 달렸던 자리다.

“이 자리에 전세라도 냈냐, 왜 또 여기 앉았어?”

테이블에 깔린 안주와 애들 상태를 보니, 벌써 맥주를 제법 마신 모양인데.

“여기가 구석이라 한적하니 좋잖아요, 추억도 있고.”

“형 왜 이리 늦었어? 우리 벌써 맥주 세 잔이나 마셨다니까.”

정수환이 불편한 듯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미안, 얘기가 좀 길어져서. 저기요!”

나는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아까 그분은 누구세요?”

송용진이는 내 술이 오기도 전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새 건물주의 어머니.”

“네에! 정말요?”

“나도 처음엔 조금 놀랐어.”

“그래서 그 금액 맞춰 주시겠대요?”

“음… 너라면 어떨 거 같냐.”

“뭐야, 둘만 아는 얘기하지 말라고.”

나와 용진이의 대화를 비집고 수환이가 들어왔다. 따돌림당하는 기분이 들었나. 수연이는 구석 자리에서 조용히 맥주를 홀짝였다.

“그럼 이제 아는 얘기 할게. 너희들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게 만족스럽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만족스럽냐니요.”

송용진의 표정이 굳었다.

“더 만족스러운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지… 근데 있잖아…….”

* * *

30분 전.

“제가 이 건물 원래 주인이에요.”

그럼 그 모자라 보이는 건물주가 아들이라고?

“반갑습니다. 아까 아드님한테는… 제가 나름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습니다.”

부모로서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러 왔을 거다.

‘좋은 소리는 아닐 거 같은데.’

하지만 회사를 크게 키울 정도의 사업 수완이 있다면, 현실적 감각도 있는 사람일 거다.

“알고 있어요. 애가 아주 실망했더라고요.”

그러면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이제부터 본론이 나올 거다.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여인은 나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게 1억 5천이었나요?”

“처음엔 그랬죠.”

지금은 팔지 않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우리 애가 나한테 그 돈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잖아요? 그래서 알아보다가 정수찬 씨를 발견한 거죠.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요.”

내가 무슨 찾던 물건이라도 되나, 발견이라니.

“그런데요?”

“흥미롭더군요. 사실은… 반해 버렸어요. 솔직히… 내가 찾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대체.

“저 목이 탑니다.”

“목이 타요?”

“지금 일행들이 먼저 맥주를 마시고 있거든요. 저도 빨리 합류하고 싶습니다. 용건만 해 주십시오.”

“간단해요. 저희 건물 1층을 통째로 쓰게 해 드릴게요. 월세도 받지 않을게요. 5년간. 나갈 때 원상복구도 없이 그대로 나가면 되고요.”

이건 무슨 전개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래도 확장해서 하나로 쓰는 게 편하겠죠? 가게 자리 5개를 하나로 합치려면… 구조 변경도 신청해야겠네요.”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장난치는 건 아닐 거다.

내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중년의 여성이 말했다.

“우리 아들을 5년간만 데리고 있어 줘요. 가게에서 일도 가르치고 직원으로 고용하라는 의미예요.”

뭐? 그 모자란 놈을 쓰라고?

“아니, 저기요… 신주희… 회장님, 줄여서 부르겠습니다. 신 회장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뭐하긴요, 거래를 하자는 거예요.”

신 회장은 태연한 태도로 내게 손을 뻗었다.

“아, 거래요? 거절합니다.”

“그리고 그 5년 뒤에, 건물을 정수찬 씨한테 등기이전 해 드리죠.”

그럼 건물을 통째로 나한테 주겠다고?

“그냥 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이 여자 뭐야, 진짜!

“맞아요. 현재의 가치 평가로 70억 정도는 될 거예요. 추후에는 더 오를 가능성이 있겠죠?”

사업하는 사람이 이렇게 퍼준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손해 볼 짓을 할 리가 없다.

“아드님 봐주는 대가로요?”

“봐준다니요, 그냥 직원으로 고용해 달라니까요. 일반 평직원처럼 마음껏 부려도 돼요.”

이 아줌마가 미쳤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거절합니다.”

괜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 건물 70억보다 더 많은 걸 잃을 거 같은 예감이 든다. 돈이야, 뭐 지금도 넘쳐나는데.

“큰돈 들어올 일이 있어서, 70억은 눈에도 안 차나 봐요?”

내 상황을 알고 있는 건가.

“건물주가 될지도 모르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죠. 근데 그 기회는 제게 아닌가 봅니다. 저는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거든요.”

귀찮다기보단 이 여자가 나를 컨트롤할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웃고는 있지만 속에 뭘 숨겼는지 내가 알 수가 없다.

“그럼 제가 귀찮은 걸 해결해 볼까요? 이번에 사들인 신도시 예정 부지를 저희 회사에서 매입하죠.”

“뭐, 뭐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믿기 어려울 만큼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말투였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우리 뉴랜드는 부동산 개발이 주요 업무예요. 그 정도 정보력도 없이 성장할 순 없었겠죠?”

일리는 있다만… 이 아줌마 무서운 사람이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는 거 아냐? 뒷조사를 했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없네.

“얼마 주실 건데요?”

상대가 판을 깔아 줬으면, 패라도 확인해 주는 게 인지상정.

“2,000억이요.”

놀랐다. 뒷머리가 빳빳해질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패만 확인하고 일어나려는데, 판이 너무 커져서 차마 일어날 수 없는 기분이다.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닙니까?”

“최고가를 넘어서는 액수일 거예요. 어디에 팔아도, 이 금액은 나오기 힘들죠.”

“단순히 아드님을 케어해 달라는 조건 하나로요?”

짧은 찰나였지만 신 회장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게 보였다.

“케어라니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나. 보통 직원으로 고용하는 거라니까요. 대신 가게를 하는 동안에는 계속 고용 유지해야 하고요.”

이쯤이면 구린내가 나야 하는데, 깔끔한 느낌마저 들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

“됐습니다. 안 할랍니다.”

괜히 과한 욕심 부리다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 독버섯일수록 화려한 법.

“아, 제가 그 말을 빼먹었네요. 세후입니다. 단순 매입 금액이 아니라, 모든 세금 제하고 실질적으로 지급 금액이 2천억이에요. 저희 세무팀 실력이 꽤나 괜찮은 편이거든요, 뉴랜드 내에서 세금이랑 기타 문제까지 싹 해결해 드리고 2천억 드릴게요. 그럼 이제 귀찮지 않으시죠?”

“그 말은… 실 수령액이 2천억이란 말입니까?”

닿을 수 없는 액수라서 느낌조차 오지 않는다. 부사장의 말을 듣고 한 1,000억 남으면 대박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두 배라니. 그것도 세후.

“맞아요. 그편이 더 깔끔하겠죠?”

더 매혹적인 것은 세금과 자잘한 문제까지 다 해결해 준다는 말이다. 사실 신경 쓰였다. 정부가 주도하는 신시가지 사업을 개인이 투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골치 아파질 게 뻔하다.

부사장은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금액이 큰 만큼 불안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것까지 단도리 쳐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내가… 엄마니까요.”

신 회장이 사업가이기 전에 어머니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파격적인 조건이다. 선물 보따리를 거저 받는 꼴이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이해할 필요 없어요. 그냥 정수찬 씨가 가져갈 것만 생각해요. 뭐가 득인지 실인지 그것만 따져요.”

그렇다면 수락하는 게 당연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횡재를 마다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제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상대를 설득하지 않아요. 조건만 제시할 뿐.”

눈빛이 매섭다. 확실히 비즈니스에 도통한 자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아드님의 여자친구까지 고용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겠죠?”

여학생에겐 안된 일이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감성과 현실은 괴리가 크다. 안타까운 마음에 휩쓸려 함께한다면 여러모로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모른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면 좀 도와줄 수야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적선이다.

“그건 원치 않아요. 아, 그리고요. 우리 애가 그만두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었네요. 본인 마음대로 그만두도록 둬선 안 된단 뜻입니다.”

이 여우 같은 여자. 내가 초이스를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요한 전제 조건을 추가한다. 마치 깜빡한 것처럼 연기까지 하면서. 확실히 고단수다.

“그렇군요…….”

아무리 귀찮아지더라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정리해 보자면.

1. 1층을 통째로 쓰면서 월세 한 푼 내지 않는다.

2. 5년을 다 채우면 그 건물은 내 소유가 된다.

3. 내 땅을 최고가로 팔면서, 귀찮은 사항까지 한 번에 정리 가능하다.

고작 조건이라면 철없는 아들래미를 가게에서 일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귀찮고 오지랖 부리고 싶진 않지만 목적이 있다면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그깟 어린애 하나 컨트롤 못 할까.

‘매우 달콤한 거래이긴 한데.’

이런 비현실적인 조건이라면 상식적으로 거절하기 어렵다.

이제부터.

그 어려운 걸 내가 하려 한다.

“호의는 감사하나, 거절합니다.”

내 단호한 태도에 상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에 바빠 보였다.

“그래요… 이해가 안 되네요. 이유를 알려 줄 수 있나요?”

“단순합니다. 분식은 취미입니다.”

나라고 왜 욕심이 없을까. 누군가 나를 고구마라고 할지 모르지만, 애초의 목적과 신념이 결부된 일이다.

나로서도 이런 유혹을 거절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도 흔들릴 정도니까.

“참… 예상대로 쉽지 않은 분이네요. 왜 그렇게 류승주한테 신임을 받는지 알겠어요.”

부사장 이름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신 뭡니까. 부사장님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입니까.”

이름만 불렀다. 류승주라고. 나이가 많아서라기보단 막역한 사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이 사람도 재벌가 쪽 사람인가.

“제 개인사는 들어봐야 재미없을 거예요. 그럼 마지막 카드를 꺼내 볼까요.”

뭘 또 꺼낸다는 거야. 지금 조건만으로도 복권 당첨급인데.

“됐습니다. 뭘 꺼내셔도 제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사실 좀 겁이 났다. 내 예상을 뛰어넘는, 스케일이 남다른 폭탄들이 이미 앞에서 터져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멘탈이 조금 흔들렸는데, 또 터뜨리겠다고?

신 회장이라는 이 여자, 내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주식이 좀 있어요, 대국건설과 대국중공업. 각각 3.2프로, 2.9프로 가지고 있거든요. 이 주식에 대한 권리를 위임해 드리죠.”

엄청난 양이다. 그 정도로 재력이 막강한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주식입니까.”

“개인적인 것과 회사 법인으로 갖고 있는 수치를 합한 겁니다. 오너 일가를 제외하곤 제가 최대 주주라고 봐도 무방해요.”

“거의 부산황소급이네…….”

너무 감탄한 나머지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 늙은이랑은 격이 다르죠.”

온화했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는 분이세요?”

인맥도 보통이 아닌 여자다.

“논지에서 벗어나지 마시죠? 얼른 맥주 마시러 가셔야지.”

“음…….”

그 정도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이유는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일 텐데. 왜 그걸 굳이 나한테 위임하려는 걸까. 부사장의 목적과 부합하는 인물인가.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이젠 너무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대량의 주식으로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이자, 권력이다.

“의도야, 뭐 뻔한 거 아니겠어요? 아이 때문이지. 그 이상 깊이 들어올 필요는 없고요.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생각할 시간을 드릴게요.”

신 회장이 돌아섰다.

그때, 문득 걱정거리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혹시!”

“지금 결정했어요?”

“저희 부사장님을 아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분식집하는 걸 그분이 아십니까?”

“왜요, 알면 안 돼요?”

므흣한 미소를 짓는다. 사람 불안하게시리.

“안 될 것까진 없지만… 모르셨으면 해서요.”

신 회장이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오늘 본 모습 중에서 제일 즐거운 모습이다.

“어머, 근데 이걸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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