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대국푸드 LAB
믿기지 않을 금액이다. 아무리 재벌이라지만 그게 가능한가.
“그렇게나 많이 버셨습니까?”
“말했잖냐, 원기옥이라고.”
대박이다 진짜.
너무 비현실적이라 실소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웃기는, 새끼…….”
그 돈으로 과연 무엇을 할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부사장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 취해서 그런가, 우수에 찬 눈처럼 보이네.’
술기운이든 어쨌든 간에, 확실히 클라스가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또 한번 실감했다.
“뭐하냐, 잔들 들어라.”
이날 우리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안주 삼아서 맥주집이 마감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회사와 업무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 *
“일어나십시오.”
떡하니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잠든 부사장. 그 탓에 나는 거실에서 잤다.
이 양반 도통 일어날 기미가 없다. 몸을 대자로 뻗고 세상만사 걱정 없이 잠들어 있다.
‘괜히 깨웠다고 뭐라고 할 거 같은데.’
나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오원식 비서를 보며 말했다.
“부사장님 어떻게 깨웁니까? 좀 깨워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알아도 하기 싫겠지.
냉정히 돌아선 오원식 비서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마셨다.
“하아, 알겠습니다. 제가 하죠.”
크게 심호흡을 하고 부사장이 깔고 누운 이불을 집었다. 그러곤 휙 이불을 걷었다. 자연스레 침대 아래로 나가떨어진 부사장.
‘이거 생각보다 과한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흔들어 깨울 걸 그랬나.
“뭐야!”
“접니다.”
최대한 다정한 말투와 미소를 지었다.
“아윽… 허리 아파. 나 왜 여기에 있냐.”
“침대에서 떨어지신 거 같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좀 놀란 듯 보이는 이유는 침대에서 떨어진 부사장을 봤기 때문이다.
‘연기에 집중하자!’
절대 내가 떨어뜨려서 그런 게 아니라.
“괜찮으십니까?”
“아우~ 이씨. 몰라. 지금 몇 시야?”
나이스! 시간을 물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이다.
“7시 반입니다. 이제 일어나실 때 되긴 했습니다.”
“아, 알았다.”
부사장이 망나니처럼 사는 것 같아도, 출근을 멋대로 빼먹고 그러진 않는다. 책도 많이 읽고 운동도 꾸준히 하는 타입이다. 나름의 규칙이 있는 사람이다.
“출근하기 싫어!”
규칙이 있다고 했지, 인성이 좋다곤 안 했다.
“더 잘래.”
부사장은 바닥에서 이불을 끌어안았다.
“안 됩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나는 이불을 걷어 안았다. 그대로 이불을 끌고 거실까지 나왔다. 부사장은 눈을 감은 채 이불에 끌려 나왔다.
“아, 이 지독한 새끼!”
멈추지 않고 이불을 주방 앞까지 끌고 왔다. 자연스레 부사장도 이불에 딸려 끌려왔다.
“다 왔습니다.”
이제 잠이 좀 깼을 거다.
“물…….”
냉수를 유리잔에 따라 건넸다.
꼴깍꼴깍, 마시고는 트림을 시원하게 했다.
“아후! 잠이 좀 깨네. 가자. 해장하러 가야지.”
부사장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시간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간단히 드시죠.”
“싫어. 속 제대로 안 풀면 이거 오래 간다.”
나는 대꾸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었다.
“북엇국입니다. 콩나물 넣고 푹 끓여서 시원할 겁니다.”
냄새를 맡으면 생각이 좀 달라질 거다.
“북어?”
칼칼하게 해장하라고 청양고추도 듬뿍 넣었다.
“직접 끓인 겁니다. 이거 드시고 출근하시죠.”
어느새 오원식 비서는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오, 원식이 빠르네.”
“앉으시죠. 밥도 방금 했습니다. 계란 프라이 하나 해 드립니까?”
“그래, 하나 해 봐.”
나는 개인적으로 계란을 참 좋아한다. 그건 부사장도 마찬가지다.
“원식아 앉아. 그냥 여기서 한술 뜨자.”
“알겠습니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북엇국을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애호박도 넣었네… 제법 그럴듯하다?”
실고추까지 넣어 비주얼이 나쁘지 않을 거다.
“맛도 괜찮으실 겁니다. 밥은 얼마나 드립니까?”
“조금만.”
“오 비서님은요?”
“저도 조금만 주십시오.”
오원식 비서도 피곤한지, 눈이 약간 충혈돼 있었다. 남의 집이라 잠자리가 불편했을 거다.
테이블에는 쉰 김치, 계란 프라이, 조미김, 북엇국, 밥이 세팅됐다.
“평소에도 이러고 먹냐.”
“집에선 잘 안 챙겨 먹습니다.”
내가 봐도 좀 초라하긴 하다. 그나마 다들 숙취 때문에 식욕이 없어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너도 결혼해야겠다. 아니면 가정부를 고용하든가. 이게 뭐냐…….”
부사장이 보기엔 자취방 수준의 식탁일 거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차린다고 차린 거다.
“저야, 뭐 집에선 거의 잠만 잡니다.”
“그래도… 하나 소개해 줘?”
“괜찮습니다.”
황 전무가 소개시켜 줘 그것도 힘든데, 부사장까지 내 짐을 가중시키게 둘 순 없다.
“들자.”
“네.”
한 숟갈 뜨면 끝이다. 북엇국은 내가 자신있어 하는 메뉴다.
“오우~ 이 새끼 봐.”
“괜찮으시죠?”
“야, 우리 북엇국 체인점 하나 내볼까.”
현실감 없는 소리 하고 있네.
“됐습니다. 드시죠.”
“매정하기는, 새끼…….”
내가 밥을 국에 말아먹는 걸 보더니 부사장도 똑같이 따라 한다. 오원식 비서도 나처럼 밥을 국에 말아 먹었다.
북엇국에 말은 밥에다 쉰 김치 하나 얹어 먹으면 끝장이다.
“으음… 먹을 만은 하네.”
찬이 시원치 않다면서, 부사장은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 * *
“이 차 얼마나 탄 거야?”
“3만 좀 넘겼습니다.”
이 차 안에서 가장 불편한 건 아마도 운전기사일 거다. 내 차로 이동하고 싶지만 2인승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별로 안 탔네… 국산차 주제에 승차감도 괜찮네. 아주 물렁거리지도 않고.”
“네.”
조수석엔 오원식 비서가 앉았고, 나와 부사장은 뒷좌석에 앉았다.
[오늘은 날씨가 좀 흐리네요. 그래도 좋은 기분으로 활기찬 하루 되세요. 아자!]
하아, 또 보냈네. 마냥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그래요.]
어쩔 수 없이 답장을 보냈다. 사람 불편하게 얘는 왜 자꾸 연락하는 거야.
“뭐야?”
“네? 아, 아닙니다.”
“문자 보내는 거야?”
어느새 고개를 빼꼼 내밀며 내 핸드폰을 보고 있는 부사장.
“아니, 그냥… 아는 사람, 아는 사람입니다.”
“안 물어봤는데?”
“예?”
“누구냐고 안 물어봤다고. 이 새끼 봐라…….”
또 사람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는 부사장이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다행히 차가 회사에 도착했다.
“저…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가 내려, 상석 도어를 열었다. 부사장이 내렸다.
“너 내가 두고 볼 거야.”
“뭘 두고 봅니까. 그럴 건덕지도 없는 일입니다.”
“흐음… 아닌 거 같아서 그래. 내 촉이 있거든. 여자면 잘해 보든가.”
나는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 싸가지없는 새끼, 대답도 안 하고.”
* * *
“결국 콘셉트에서 막히네요. 디자인 콘셉트가 문제네… 이걸 어쩐다…….”
식재료와 메뉴 라인업은 결정났다. 하지만 이것을 예쁘게 포장해 담을 디자인 콘셉트가 계속 난항이다.
“현재까지 나온 시안은 3개로 축약할 수 있단 거죠?”
“그렇습니다.”
“정리, 정리를 좀 해 봅시다.”
1. 자유로운 거리: 젊음과 열정을 모티브로, 자유로운 미국의 거리를 보여 준다. 스케이트보드, 힙합, NBA 등. 이제는 주류로 자리잡은 흑인 문화를 배경으로 보여 준다. = 씨푸드 샐러드 뷔페와 스테이크, 피자, 파스타 등의 규칙성이 보이질 않는 자유 분방한 콜라보를 표현한다. 그들의 편견없는 믹스컬쳐로 메뉴의 라인업을 자연스레 분위기에 녹일 수 있다. 젊은 20대에서 30대의 고객이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고급감이 떨어지며 패스트푸드와 정크푸드의 이미지가 덧씌워질 위험성이 존재한다.
2. 바이킹의 시대: 거친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역동적으로 살아야 했던 바이킹의 일면을 보여 준다. 바다의 해산물과 육지의 고기를 즐겨 먹었으며, 하루하루를 목숨 걸고 살아야 했기에 매순간을 즐기며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 그것이 현대인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게끔 만든다. = 씨푸드 뷔페와 스테이크를 전면에 내세우기 유리하다. 주의사항은 약탈과 폭력의 이미지는 배제시켜야 한다. 그리고 B급 정서가 드러나면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다.
3. 호화로운 선상 파티: 지중해 잔잔한 바닷가에 초호화 크루즈선과 고급 요트 수십 척이 떠 있다. 이들은 잔잔한 파도 소리를 음악 삼아서 파티를 연다. 선상 위에 펼쳐진 다채로운 요리와 바닷바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기는 프라이빗한 시간. =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기 용이하며, 단점으로는 젊은 층의 니즈를 충족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거기다 지루한 호텔 레스토랑의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대충 정리된 게 이 정도네요.”
“그렇습니다.”
엄석민 부장이 대답했다.
“다 그럴듯하네요.”
디자인 콘셉트가 나와야 인테리어가 결정된다. 그러고 나서 더 정밀한 가격대를 결정할 수 있다. 현재의 가격은 식재료와 타겟팅을 참고하여 짠 대략적인 지표만 짠 상태다.
“무조건 고급스러운 것도 능사가 아니고… 역동적인 걸 전면에 내세우기도 좀 부담스럽고… 바이킹은 너무 스토리텔링에 치중한 느낌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식이 아니다. 음식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구성해야 한다.
요식업이니 어쨌든 첫 번째가 메뉴이고, 그다음이 분위기이며, 거기에 걸맞은 가격과 서비스가 받쳐 줘야 한다.
‘이걸 어쩐다.’
대국푸드 사내 투표를 진행하였는데, 3개의 시안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인터넷으로 이벤트 조사를 하여도 3파전이 유지되는 양상이다.
“모델점을 오픈하기에 앞서서 실업실 하나 만듭시다.”
“네?”
전용재 부장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른바, 대국푸드 LAB.”
전부터 고민을 했던 사항이다. 다만, 정말 결정이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남겨 둔 최후의 보루다.
‘이것까지 써 먹네.’
결국 실행을 하게 되는 상황까지 몰렸다.
“정확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간단합니다. 제 생각엔 강남역, 여의도, 홍대 상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실험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콘셉트를 시장에 내놓고 반응을 본다는 의미신가요?”
“그렇습니다. 저희끼리 아무리 회의를 해 봐야 시장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가장 대표적인 상권에 3개의 콘셉트를 모두 설치하면 어떨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할 것도 없죠. 어차피 디자인 콘셉트가 다른 거고 메뉴는 동일하잖습니까.”
다들 별다른 동요가 없다. 그 말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극적으로 일이 많아지니까.’
회의실 전체 인원의 의견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전용재 부장이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리스크를 대폭 줄일 수 있으니까요. 다들 어렵게 여기까지 오신 거 압니다. 많이 피로한 것도 십분 이해합니다. 다만, 기존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워요. 아시지 않습니까. 대국푸드 역사상 역대급 투자가 이뤄진 프로젝트입니다. 적당히 해선 보통 이하의 결과물이 나올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전용재 부장이 대표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내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팀원들은 고개를 숙인다. 모델점 개점하는 것만 해도 할 일이 많을 텐데, 거기다 3개의 콘셉트를 실험하는 장까지 만들어야 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올 거다.
“조금 더 힘냅시다.”
나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그걸 티내선 안 되는 자리라서, 태연한 척하는 것뿐이다.
“다음 회의에는 3가지 콘셉트에 맞춰서 디자인 시안 완성해 오시면 되겠습니다. 디자인팀과 설비팀, 관리팀과 협업을 기반으로 작업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적이 흐른다.
“대답 안 하십니까?”
다들 몰래 꿀을 훔쳐먹었나.
“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한다.
“그럼 이것으로 오늘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힘이 없어 보인다. 기획전략팀이라도 이번 업무는 꽤나 과중돼 있다. 전용재 부장만 하더라도 평소보다 더 가혹한 스케줄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니까.
“전 부장님. 잠깐 저 좀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