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울분
바람 쐴 겸 건물 외부 화장실을 이용했다.
‘너무 마셨나…….’
얼마 안 마신 거 같은데 살짝 어지러우면서 좀 알딸딸했다.
“담배 태우십니까?”
이동훈 사장이 가게 어닝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이고, 선생님…….”
그는 허리를 숙이며 담배를 뒤로 숨겼다. 나는 그의 옆에 섰다.
투둑, 투두둑…….
“비가 오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간만에 내리는 비였다.
가게 안에서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처음 만났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직원들과 사장님 가족은 매우 친해 보였다. 오래전부터 알았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두 그룹이 너무 찰떡같이 친해져서 놀랐다.
“웃고 떠들고 난리가 났네요.”
“덕분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동훈 사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속에 무얼 숨기고 계십니까.”
“예?”
“터놓고 말해 보세요. 제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동훈 사장이 먼 허공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담배 한 대 더 태워도 되겠습니까.”
이걸 왜 나한테 허락받는지 모르겠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착!
라이터 불빛에 그의 얼굴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다.
“걱정스러운 건, 종로분식입니다. 그 여자, 염광순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종로분식과 교회가 연루되지 않아서 걱정일 거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도 접점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사람이 무서운 겁니까.”
“염광순이 실질적인 실세입니다. 그 집 형제들 중에서 첫째이고 교회를 그렇게 키운 것도 모두 염광순 머리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요, 왜 그 여자는 분식집을 합니까. 돈도 많을 텐데, 굳이 장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나처럼 분식이 좋아서 장사하는 건 아닐 거다. 그랬다면 음식 재사용, 원산지 속이기 등의 흉악한 짓은 못했을 거다.
“제가 알기론, 자식들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거기 분식집도 10년 전쯤 인수한 거예요. 원래 잘되던 곳이라 하더라고요.”
“잠깐만요, 자식들 때문에 분식집을 한다고요?”
“예. 노력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분식집한다고 하더라고요… 늦게 애를 봐서 금이야 옥이야 아주 끔찍이 여깁니다.”
“의외네요.”
그래 봐야 연기일 텐데 자식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모를까.
“시골에서는 못 키우겠더랍니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서울로 이주했다고 알고 있어요. 애들 교육시킨다고요.”
“교육이요?”
나참, 어이가 없다. 그런 인간도 자식 교육을 챙기다니. 본인은 그따위로 살면서 말이다.
“예. 집이 강남 대치동이라 하더라고요. 거기가 유명한 학원들 모여 있다면서요.”
자식들 때문에 서울로 이사한 꼴이구나. 교회에서 거둬들인 돈으로 자식 농사를 지은 셈이다. 값비싼 사교육에 돈을 쏟아부었겠지.
“그래서, 자식들은 잘됐답니까.”
솔직히 안 되길 바랐다. 인성이 글러먹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으면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다.
“자식이 둘인데 둘 다 서울대 갔다고 들었어요.”
이건 놀랍다. 돈을 들인 티가 나네.
“서울대 무슨 과랍니까.”
대학 동기들 연락처 몇 개는 알고 있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어떤 학생인지 전해들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아, 난 친구가 없구나…….’
최근 인기를 얻어서인지 막 친구가 많아진 느낌이다. 동기들 연락처도 오래되어서 바뀐 번호일 확률이 높다.
“거기까지는… 저도…….”
최서희를 통하면 알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괜한 오지랖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인간들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걔네들은 어릴적부터 대치동에서 제일 유명한 강사한테 과외받았다고. 뭐, 그럽디다. 돈도 숱하게 썼을 거예요…….”
이동훈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큰아들은 대학도 다니질 못했는데, 가해자인 염광순의 자식들은 고액 과외까지 받는 현실이라니.
“사장님은 삼남매의 가장이죠? 자녀분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낙담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이해하는 것과 감정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 애들이요?”
“네. 자녀분들의 꿈이 뭔 줄은 아십니까.”
내가 편견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언제나 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동훈을 보고 있으면 답답할 때가 종종 있다.
“꿈은 뭐…….”
내가 몇 마디 더 한다고 선을 넘는 것일까. 모르겠다.
“대학은 보내 주실 생각입니까.”
“우리 사정에 대학은 무슨…….”
술기운 때문인가, 머리가 뜨끈뜨끈 달아오른다.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것 같았다. 이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 주고 싶다.
“사장님. 적어도요… 아버지잖아요. 그러면 애들을 끝까지 지키고 케어하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
“교회에서는 어떻게든 빠져나왔잖아요. 큰 따님도 찾았고. 그럼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잘 살 생각을 하셔야죠.”
이동훈은 말없이 담배 연기만 내뱉었다. 연기가 빗속에서 흩어졌다.
“후… 내 새끼는 대학도 못 갔는데.”
그는 들릴 듯 말 듯 허공을 보며 넋두리를 내뱉었다.
“뭐 하나만 물읍시다. 사장님은 원래 책임감이 없는 겁니까, 아니면 천성이 나약한 겁니까.”
“뭐요?”
할 말은 해야겠다. 아니, 이건 해 줘야 하는 말이다. 이 사람이 내 말에 자극을 받아 각성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교회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셨어야죠. 그때… 막내 딸을 간신히 구출해 왔는데, 다시 교회로 돌아가자고요? 미친 거 아닙니까.”
“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 너무 함부로 하시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지금 이 상황까지 왔으면 이 악물고 애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다짐해야죠. 그렇게 초장부터 힘 빠져 있으면 될 일도 안 됩니다.”
“이 사람이, 진짜…….”
기운 없는 패배자보단 분노에 휩싸인 투쟁가가 낫다.
“대학도 보내 주고, 애들 좋은 환경에서 살게끔 해 줘야죠. 그런 생각은 안 하십니까. 왜 계속 움츠려 있으십니까. 평생 낙오자로 사시려고요?”
툭!
바닥에 담배를 버리고 이동훈 사장이 나를 노려봤다.
“그 새끼들이 어떤 놈들인지나 아슈? 아주 인간말종에 상놈들이라구요!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도 한두 번이지, 계속 듣다 보면 정말 죽을 거 같단 말이오. 그 심정을 알기나 하슈!”
나는 대답하지 않고 지긋이 그를 바라보았다.
“동네 사람들이 다 미쳐 돌아,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어. 우리 가족만 제정신이라 물들이려고 지랄병을 하는데, 도망치고 싶어도 빚은 계속 늘어가. 그 심정을 당신이 알기나 하냐구요!”
내가 이 사람의 울분에 불을 지핀 것 같았다.
“저는 모릅니다.”
“나보고 책임감이 없다고? 사람이 그렇게 궁지에 몰리는데 어떻게 제정신으로 삽니까. 이자를 못 낸다고 마누라가 처맞고 들어와도 찍소리 하나 못하는 사람이 나라구요! 그런 인간 말종이 바로 나유! 내 심정을 당신이 알기나 해?”
어떤 기분이었을지 감히 짐작이 되질 않는다.
“나나 우리 애엄마가 당장 어느 야산에 묻힐 판인디 대가리가 정상으로 돌아가겠슈? 우짭니까, 내 새끼들… 부모 없는 자식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후우, 그러니께… 수그리고 들어가는 겨… 씨부랄, 그런 상황에서 나보고 우짜라구요!”
이동훈 사장은 세뇌됐던 게 아니다. 두려웠던 거다. 아이들이 해코지당할까 봐. 이 험난한 세상에 부모 없이 남겨질까 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던 것이다.
“좀 고정하세요. 뭘 어쩌라는 게 아니고…….”
“우리 큰딸이 거기서 무슨 짓거리를 당했는지, 내 다 알고 있슈. 그래도 입 밖으로 뻥긋도 못 해유. 왠 줄 알아유? 언제 그 연놈들이 나타날지 모르니께. 그 씹어먹을 것들이 언제 몽둥이 들고 나타날지 모르니께유!”
이동훈 사장이 몹시 흥분한 것 같다. 취기까지 올라서 그런지 평소엔 안 쓰던 진득한 사투리가 마구 나왔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애들도 지금 떨고 있는 거유. 하도 당해서 언제 또 그리될 줄 모르니께, 그 으린 것이 을매나 무서웠으면 밤마다 악몽을 꾸겠슈. 흐우… 하기사, 내라도 그럴 겨…….”
“그럼 복수하셔야겠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쓰벌… 그래야쥬. 그 연놈들 어떻게든 복수를 할 거유. 반드시, 곱절로 갚아 줄 겨…….”
혼잣말하듯이 말하는 이동훈 사장. 이제야 속이 좀 풀렸을 것이다.
“그래요, 복수하십시오. 그러려면 성공부터 하십시오. 당한 대로 갚아 주려면 범죄자가 돼야 할 겁니다. 돈 많이 벌어서 보란 듯이 보여 주세요. 그게 진짜 복수입니다.”
이동훈 사장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내가 하도 악에 받쳐서… 본의 아니게 선생께 성을 냈네요. 양해 부탁해요.”
사투리를 쓰지 않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죠.”
어떻게 보면 화를 돋운 건 나였다. 물론, 의도적인 계산이었다.
“도와주세요! 선생님이 도와주시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어떻게든 보답합니다.”
“그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로분식도 교회와 연관성이 있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면 엮이겠죠.”
“용의주도한 인간입니다. 아마도 교회의 책임을 염광순에게 물을 순 없을 거예요. 그 여자 머리 잘 굴리기로 유명해요.”
아직도 수사에 진전이 없는 걸 보면, 이미 꼬리 짜르기를 완성했을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연좌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저지른 범죄를 염광순 본인에게 물을 순 없다.
“방법이 없으면 만들어야죠.”
이런 술책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은 또 해야겠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제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주세요.”
참, 나약해 보일지언정 예의는 바른 사람이다.
“그 진심 받고 한마디만 더해도 되겠습니까.”
“아유,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제가 아버지가 없어요. 그래서 잘은 모르는데요. 만약 있었다면, 저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다면… 힘없고 돈없는 아버지라도 저는 좋아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미안한다는 말보단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길 바랄 거예요. 앞으로는 미안하다 하지 마시고 사랑한다고 해 주세요.”
내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부모의 모습은 그런 것이다. 죄책감보다는 애정을 드러내 줬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자주 했다.
“차암, 허허…….”
내 말에 이동훈 사장이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왜 웃으십니까.”
“그냥 돈 많고 성공하신 분인 줄만 알았는데 감동까지 주시네요. 젊은 양반이, 못 하시는 게 하나도 없네요.”
“이게 감동이에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한 겁니다.”
“새겨듣겠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나는 이동훈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들어갑시다.”
* * *
내 말을 다 들은 류승주 사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우와우~ 기가 맥힌다! 이게 다 팩트라고?”
“그렇습니다.”
내가 나름대로 조사한 내용, 이동훈 사장과 그의 아들 이성원에게 들은 내용을 종합하여 류승주에게 들려주었다.
“지금 21세기가 맞냐? 구한말 때 얘기 듣는 거 같아. 겁나 재밌네!”
범죄 스릴러 영화 얘기를 하는 것처럼 류승주 사장은 즐거워 보였다.
“단순한 흥밋거리는 아닐 텐데요?”
“그럼 너는요? 네가 참견할 일도 아닐 텐데요?”
“그렇죠.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이 사람에겐 철판 깔고 요구하는 게 가장 빠르다. 내 힘으론 한계가 있다.
“내 말을 인정은 하는데… 도와달라고? 음, 그렇구나.”
류승주가 과장되게 머리를 끄덕였다. 헤드뱅잉 하는 줄.
“뭐가요.”
“너 머리 다쳤네. 제정신 아냐. 야! 네가 지금 그것까지 신경 쓰게 생겼어? 요즘 쌀국수 런칭하는 거 알아 몰라? 그리고 그 전에 만든 브랜드들도 이제 가맹점주 모집해야지. 또 기업 광고, 분기별 광고는 어쩔 거고. 자선사업 예산도 미리 짜야 되는 거 아냐? 너 할 일이 태산이거든.”
“쌀국수는 전용재 본부장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만들어 보겠다 했습니다. 제가 일전에 보고드렸을 텐데요. 제가 상사라고 참견하면 좋지 않은 그림입니다. 그리고 3개의 브랜드 앙뚜와, 오션킹, 빅보스는 현재 직영 매장 개점이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직영이기 때문에 영업 이익률이 일반 가맹점 대비 우수하여 조만간 투자 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맹점 모집은 올해 프랜차이즈 박람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모집할 생각입니다. 이미 사전 가맹점 모집은 비공식적으로 받고 있고요. …광고는 마케팅 부서에서 수월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업 광고가 조금 늦어져 분기별 광고도 2주에서 1달가량 딜레이될 예정입니다. …자선사업 계획과 예산은, 기획서 작성해 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오후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듣던 류승주 사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쿵!
죄없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정상 맞네, 제정신 맞아… 싸가지 없는 거 보니까.”
“이걸 원하신 거 아닙니까.”
“됐어, 인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직장은 대국푸드입니다. 업무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이고, 내 팔자야… 야! 까놓고 말해서 너 선 넘는 거야. 내가 어지간하면 도와주는데, 명분이 없다. 왜 도와줘? 너야 순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니까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치자. 나는? 일 벌여서 나한테 남는 게 뭐냐고.”
“일종의… 명예?”
“야!”
“사명감? 정의감?”
“허튼소리 한마디만 더 지껄여. 입 찢어 버릴 거야. 너도 정신 좀 차려라. 그 정도 했으면 된 거야.”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인간은 없다. 다만, 그 먼지를 눈감아 주는 인간이 있다면 애초에 먼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물급이겠죠. 그래서 종로 분식과…….”
“알아, 안다고! 있겠지. 여기 대한민국이야. 돈 있고 빽 있으면 안 되는 거 없어. 그걸 내가 몰라? 근데 세상이 그래,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뭐…….”
이래서 재벌은 말이 안 통한다.
“세상은 공정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기여해 주십시오. 능력 되시지 않습니까.”
“아함~ 지루해. 네가 도덕 선생이야? 왜 가르치려 들어.”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너스레를 떠는 류승주 사장.
“대국 그룹의 정치계 라인 있는 거 압니다. 청와대 핫라인까지 있다고 하던데요. 검찰 쪽에도 줄 닿지 않습니까.”
애초에 공정한 수사를 막고 있는 블록만 제거하면 좀 수월할 것이다. 조금만 스포트를 밝혀 주면, 검경은 알아서 부스터 켜고 수사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거미줄이긴 한데… 그게 공짜가 아니야. 돈 뿌리고 시간 들여서 만든 라인이다. 설마, 무임승차하려는 건 아니지?”
정의 구현에도 비즈니스가 개입되는 클라스라니. 다른 재벌들도 다 이런가.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광고는 이미 찍기로 했고, 그치?”
“그렇죠…….”
그 생각에 갑자기 속이 갑갑해졌다.
“한 번 더 가자.”
“어딜요?”
“방송 한 번 더 타자고. 회장님이 아직도 아침마당 녹화한 거 돌려보신다. 그 영감 정신병 걸리겠어. 노인공경의 차원에서 한 번 더 출연해.”
“알겠습니다.”
“오호, 이 새끼. 너도 인기를 맛보더니 변했구나. 이제 카메라가 친숙한가 봐?”
“절대 아니고요. 제 선에선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맞지, 네 주제에 라인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선은 잘 지켜라. 알았냐.”
“알겠습니다.”
“좋았으! 일어나, 가자.”
“어딜요? 아직 식사 시간 아니지 않습니까.”
“밥은 나중에 먹고. 어차피 해야 할 거니까 후딱 해치우자. 다 세팅해 놨어.”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사람은 오원식 비서였다.
“야, 왔냐. 너도 같이 가자.”
“비서님 오랜만입니다.”
“네, 부사장님.”
류승주가 내 손과 오원식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시냐고요.”
“너 광고 찍으러 가는 거야.”
“네! 뭐라고요?”
“어차피 할 거잖아. 너 때문에 기업 광고 딜레이 된 거 알지? 후딱 해치우자.”
내가 또 뺄까 봐, 이딴 식으로 일처리 하는 건가.
“근데 사장님은 왜 같이 가십니까.”
“나? 구경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