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 프롤로그: 던전 마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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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한 햇빛이 상냥하게 피부를 어루만진다.
빨갛게 물든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멍하니 망막에 맺히는 상을 살펴본다.
주변엔 낙엽 진 잎사귀들이 사각사각,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휩쓸 듯 지나간다.
시선을 바닥에서 위쪽으로 옮긴다.
주변엔 가지가 엉성한 나무들이 듬성듬성 늘어져 있고, 희미한 의식에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내가 일부러 이런 곳에 온 적이 있었나?
나는 왜 이런 곳에, 나는…… 분명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을 터이다.
“아아……”
옅은 신음소리, 내 목소리가 아닌 듯한 소리가 아름답게 공간을 울린다.
머리를 안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집어본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건 긴 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래쪽을 보니 벗은 몸에 두 개의 살색 봉우리가 보인다.
그 사이로 허전한 아랫도리까지 보일때, 나는 무심코 고개를 다시 올렸다.
“이게…… 무슨…… 나는 대체 누구야?”
이 상황에선 누구라도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을 터다.
일단 주변에 누구라도 있는가 싶어 일어나 걸어보려 하니, 뒤쪽에서 뭔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이 든다.
“어?”
급하게 고개만 돌려 뒤를 보니, 나에게 검은 꼬리가 자라나 있다.
끝은 스페이드 모양으로 된, 흔히 상상물 속에서나 등장하는 악마 꼬리.
그리고 아주 작지만, 박쥐 모양의 날개도 있다.
“……”
다시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몸에는 어떤 문신도 없지만, 길고 풍성한 곱슬 은발이 몸을 가려줘 너무 춥지만은 않다.
전반적으로 보송보송한 피부는 아름답게 뻗어 있고, 모양만 보아선 상당히 앳된 모습인 것 같다.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아마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남자라고오오오!”
안타깝게도, 내 고함소리는 매우 가느다랗게 주변 공기를 울리며 지나간다.
누군가 듣고 나를 볼까 싶어 괜히 몸을 움츠린다. 이런 곳에서 알몸이라니……
일단 다시 머리를 부여잡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돌아보자, 뭔가 힌트라도 있을 법이니까.
분명히 나는 게임 메뉴에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의식을 잃었다. 물론 그 전에 다양한 설명을 읽었을 터이다.
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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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메뉴의 확인 버튼을 누르시는 순간, 당신은 실제로 던전 마스터가 되어 던전을 운영할 수 있게 됩니다.
하시겠습니까? [확인] / [취소]
[?] 계약서 확인하기.
지진이 일어났다. 땅이 흔들리고, 모니터가 흔들리는 가운데 나는 재빨리 책상 밑으로 들어가 지진이 끝나길 기다렸다.
잠깐의 정전이 끝나고, 다시 불이 들어온다. 나는 그보다 재빠르게 책상 밑에서 나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내 인생의 절반까지는 아니더라도, 1/4쯤은 버린 게임 데이터를 확인해야 한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던전 온라인이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던 차였다.
던전 온라인은 던전을 운영하는 측이 되거나 공략하는 측이 되어 진행하는 게임이다.
운영하는 쪽은 마족, 공략하는 쪽은 인간, 뭐 그런 설정이 있지만, 이 게임은 스토리보다는 게임성이 좋아서 할 뿐이다.
나는 이 게임의 던전 운영 측에서 꽤나 랭킹 권에 있는 유저다. 덕분에 연중무휴 하루 12시간씩 이 게임에 들이박은 시간과 노력 돈은 무시하지 못한다.
뭐 게임 속 일상이 화려해지는 만큼 현실이 궁핍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나에겐 수백 개에 달하는 공략 측 사람들이 남긴 방문록이 있다! 이건 내 자산이니까.
일단 내 데이터는 날아가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모니터를 바라보지만, 게임 메뉴 창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메뉴 창에 올라와 있는 확인 버튼은 마치 나를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으으! 내 던전 데이터는?”
게임이 맛 간 건지, 껐다가 다시 켜려고 Alt+f4를 마구 눌러도 게임 메뉴 창은 꺼지지 않는다.
버그인가 싶어, 컴퓨터 리셋 버튼을 마구 눌러도, 전원 버튼을 마구 눌러도 컴퓨터는 끄떡도 하지 않고 게임 메뉴 창 하나밖에 띄우지 않는다.
다소 화려한 게임 전용 UI의, 확인과 거절 버튼이 있는 메뉴 창.
커서를 확인 버튼에 올리면 별은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유혹하고, 거절 버튼에 올리면 괴상한 이미지들이 띄워지며 마치 화면 밖으로 무언가 이상한 오라 같은 게 뿜어져 나온다.
“대체 뭐야…… 하……”
나는 좌절한 상태로 일단 확인 버튼을 누르기 전에 밑에 있는 [?]부분을 눌러 보았다.
뭔가 도움말이라도 있겠지 하면서 누르자, 곧바로 화면에 정말로 계약서 비슷한 것이 나온다.
당신은 이 계약서에 확인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던전 마스터(이하, DM)이 됩니다.
저는 DM들의 관리자이며, 당신은 이 게임의 데이터를 통해 뛰어난 DM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답니다.
갑, DM 관리자. 을, 당신.
갑은 을에 대해 DM의 권한을 이임할 것임을……
뭐 앞쪽의 의례적인 부분은 대충 넘어가자.
계약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이 계약서가 말하는 게 게임 속 세상과 흡사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부분에서,
1. 당신은 인간들을 던전으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절망을 흡수 함으로서 DMP를 모으실 수 있습니다.
이 DMP는 던전을 꾸미거나, 몬스터를 소환하는 데 이용되고, 식량으로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나는 게임에서 말하는 던전 마스터인지 뭐시긴지 하는 사람인데, 굳이 확인 버튼을 눌러야만 할까, 게임 속 세상에 빠진다는 말은 어처구니없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런 건 소설이나 만화책에서나 등장하는 일이니까.
계약서가 뭔지, 웃기는 말이나 더 있지 않을까 싶어 계속해서 읽어 본다.
2. DM이 될 수 있는 종족은 용, 몽마, 정령의 마스터 등급뿐입니다. 당신은 이 세 종족 중 하나가 되실 수 있으며……
다른 종족이 된다니, 이젠 계약서가 판타지스러운 말까지 한다.
나는 빨리 게임을 하고 싶을 뿐이고, 아래쪽 내용들은 대부분 게임 룰을 적은 듯한 내용이기에 계약서 창의 x 버튼을 누르고 나온다.
다시 메뉴 창에 뜨는 글귀를 바라본다.
본 메뉴의 확인 버튼을 누르시는 순간, 당신은 실제로 던전 마스터가 되어 던전을 운영할 수 있게 됩니다.
하시겠습니까? [확인] / [취소]
[?] 계약서 확인하기.
뭐, 남자답게 이런 것쯤은 확인 버튼을 누르고 후회하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확인 버튼을 누르고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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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 이 멍청한 과거의 나! 왜 확인 버튼을 누르는 거야!”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후회했던 경험은 많다. 대학교 자소서에 문장을 끝맺지 않고 보낸다던가, 실패할 게 뻔한 무기 강화를 하다가 무기를 몇 번이고 뽀사먹는다거나……
하지만 곧바로 나에게 다가오는 발소리, 그리고 그 그림자에 나는 무심코 숨을 참고 신경을 기울였다.
========== 작품 후기 ==========
던전 운영이라는 소재가 재미있어 보여서 씁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라기보다는 게임 요소가 강한 글이 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