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 튜토리얼: 던전 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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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나는 누군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소리에 고함을 질렀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몸을 보여주는 건 문명인으로서 매우 부끄럽다.
이 곳이 아무리 게임 내 세상이고 내 몸이 아바타라는 가정을 한다 해도, 실제로 1인칭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와중에 벗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미묘한 추위까지 느껴지는 걸 봐선 여기는 확실히 현실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가는 것이겠지만, 나는 뛰려는 자세를 잡다가 포기했다.
일단 게임만 12시간 한 사람의 다리가 어떻겠는가? 체력은?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내 다리는 현실에 비해 매우 얇고 근육 한 점 없어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몸을 보여 주긴 그렇고, 도망칠 수도 없는 나는 쭈그린 채로 고개를 들어 경계했다.
두근두근, 긴장되는 심장을 부여잡고 바라본 곳엔 시원스럽게도 물 정령 아바타와 똑같이 생긴 정령이었다.
아바타라고 생각한 건 던전 온라인의 UI 하단 쪽에 있는, 얼굴 포스터가 나오는 쪽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모습도 아바타와 닮은 걸까? 게임 시절에 골랐던 내 캐릭터는 몽마 여캐였으니, 그렇다면 내 모습은 내 아바타와 닮았다는 것……
“이제야 태어났구나, 마스터 개체의 서큐버스.”
짧은 말이었지만 그녀? 그 정령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섞여 있었다. 나는 바로 경계를 풀었지만, 쭈그린 자세를 바꾸지는 않았다. 알몸을 보이는 건 부끄럽다.
그녀의 모습은 물이 흘러내리는 여성의 형상, 하지만 나와는 달리 옷을 입고 있어 당장은 부러웠다. 그리고 궁금했던 내 아바타의 종족 명까지도 시원스럽게 드러났다.
“혹시나 했는데 서큐버스구나……”
“그래, 사람들의 정기를 먹고 사는, 야한 감정을 먹고 사는 종족이지. 너는 마스터니까 필요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여긴 어딥니까? 뭐라도 걸칠 건 없나요? 저는 노출증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물의 정령은 턱 위에 깍지를 끼고는 나를 바라본다.
그녀가 지은 자애로운 옅은 미소는 어떤 적의도 담겨있지 않아서, 남은 경계심을 모두 녹여버릴 듯 아름다웠다.
그렇다면 물의 정령이 튜토리얼 마스터라도 되는 걸까? 게임 내에서는 드래곤 족의 여성이 튜토리얼 헬퍼 역할을 맡았던 기억이 난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일단 우리들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옷부터 주세요!”
“아아, 알았어. 왜 그렇게 급하니? 그리고 서큐버스는 원래 부끄러워하지 않을 텐데?”
“설명하자면 기니 주세요.”
“음, 하지만 공짜는 안 돼, 선배는 직접 DMP를 줄 수 없다는 법이 있거든.”
물의 정령 씨는 자애롭고 따스한, 누나 같은 모습만큼이나 여유롭게 말끝을 늘이며 말하신다.
하지만 나는 당장 춥고 부끄럽다. 바람이 불어 살갗을 아리게 만드니 등 뒤에 있는 날개뼈가 부르르 떨린다. 날개뼈가 아니라 진짜 날개인가?
“그럼 DMP가 뭔지 퀴즈! 맞추면 옷을 만들 수 있는 100점을 줄게!”
“DMP는 (Dungeon Manage Point) 던전 관리 포인트라는 말로 던전을 형성하거나 꾸미거나 몬스터를 소환하는 데 쓰는 포인트잖아요. 빨리 옷 주세요.”
일단 머릿속에 있는 대로, 게임 용어를 말했다. 게임 내에선 보이는 대로 듬프라고 불렀었다.
물의 정령 누나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정답! 하지만 반만 맞았어, 던전을 꾸밀 수도, 몬스터를 소환하는 데도 쓸 수 있지만, 우리 마스터 개체의 의식주도 해결할 수 있단다? 반만 맞았으니 50 DMP만 줄게!”
물의 정령 누나는 느릿느릿, 나긋나긋한 움직임으로 손을 움직이시더니 손끝에서 뭔가 빛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빛은 나에게 흘러들어온다.
마치 던전 공략 측이 레벨업을 할 때, 혹은 경험치를 얻을 때 얻는 그런 황금빛 기운이 내 주변에 돌며 다소 따뜻해진다.
“이게 DMP에요?”
“응! 그래, 그리고 DMP를 활용해 볼까? 던전 메뉴를 여는 건, ‘메뉴야 열려라!’라고 집중하면 돼.”
물의 정령 누나가 하는 설명이 부정확하지만, 나는 일단 들은 대로 실천해 보았다.
실제로 말하는 건 왠지 부끄러우니, 마음속으로 ‘메뉴야 열려라!’라는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요…… 누나?”
“어머, 선배라고 불러 주렴. 그리고 너는 아름다운 서큐버스인데 ‘누나’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
“……알았어요, 선배.”
대체 무슨 가르침인지는 모르겠지만, 옷을 위해서라면 불러달라는 데로 불러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갑자기 언니라고 부르라니, 아무리 아바타가 여캐라지만 넷카마 짓은 하고 다니지 않았었다.
“그래그래, 아마 그건 네가 메뉴를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한번 크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부끄럽잖아요!”
“이 자리엔 너와 나밖에 없단다?”
“……알겠어요. 메뉴야 열려라.”
그러자 내 앞에 홀로그램처럼 무채색의 메뉴가 나타난다.
게임의 메뉴와도 비슷한 모습이지만, 한참을 캐시템을 질러 화려했던 게임 속 무늬와는 달리 기본 ui라는 점이 조금은 걸린다.
한쪽 구석에는 내 현재 DMP인 50 DMP가 파란색 속이 빈 동그라미 안에 글자로 떴다.
게임 시절처럼 검지로 꾹 눌러 보니 팝업 창으로 여러 가지가 뜬다.
하지만 옷 만들기 따위의 메뉴는 보이지 않는다.
“어, 벌써 거기까지 갔니?”
“그래서 옷은 어디서 만들어요, 부끄럽단 말이에요.”
“에이, 천천히 따라오렴, 다시 메뉴로 나와 볼까?”
아무래도 내 선배라는 사람, 아니 정령은 처음부터 천천히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인 것 같다.
나는 한참이고 메뉴를 어떻게 닫고 어떻게 여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의외인 점은, 나 자신에 대한 메뉴는 던전 공략 측 유저들과 ui가 비슷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스탯이 나오고, 경험치가 있다거나 한다는 점 등등.
던전 제작 측 메뉴, 여기선 DM 메뉴라고 불리는 것도 게임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메인 메뉴의 DMP버튼을 누르면 보이는 몬스터 소환이나 던전 꾸미기 따위의 메뉴가 게임 ui하단에 보이는 게 아니라 공중에 둥둥 홀로그램처럼 뜬다는 게 다르다는 점일까?
메뉴는 시원하게도 공중에 검지를 누르는 것만으로 발동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옷을 만드는 것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옷 만드는 것 좀 알려 주세요…….”
“아, 그거! 던전 꾸미기 메뉴에 들어가 볼까?”
“눼……”
던전 꾸미기 메뉴는 거의 최후에 건드린다고 할 정도로 게임 후반부가 아니면 쓰지 않는 메뉴이다.
나무를 심는다거나, 오리를 배경에 추가한다거나, 그런 잡 메뉴들이 담겨있는 메뉴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 메뉴를 누르고 내 개인적인 모습을 꾸밀 수 있는 메뉴나 음식 등이 놓여있는 걸 따로 있는 걸 발견했다.
마치 원래부터 이런 메뉴가 있었던 것 같이, ui의 모습도 깔끔했다.
“어때, 거기 있지?”
“읏, 이게 대체 뭐죠?”
하지만 옷들이 하나같이…… 야하다.
끈으로 된 것, 가죽으로 된 것, 너클이나 화려한 은박과 징이 박힌, 가릴 곳만 가리는 옷들. 아니, 과연 옷으로 기능은 한 걸까 궁금할 정도의 옷들이 메뉴에 3D로 놓여 있다.
나는 다시금 내 종족에 대해 떠올린다. 서큐버스……
“하아…… 디자인은 그렇다 쳐도 제 DMP로는 살 수 있는 옷이 없는데요?”
“아하, 그렇지? 하지만 절반은 만들 수 있을 거야.”
절반이라, 하긴 여기 있는 옷들은 전부 한 벌 옷이니만큼 상의 메뉴로 갔다.
“……”
메뉴 상에 있는 회색 투명 아바타 누님이 입고 있는 옷들은 속옷이 아닐까?
메뉴에는 분명히 상의라고 되어 있는데, 조금 무섭다. 일단 금액 메뉴를 50DMP 이하로 낮추고 한참을 찾다가 드디어 괜찮은 옷을 발견했다.
원피스 모양의, 하반신을 입지 않아도 하의실종 옷이라고 우길 수 있을 만큼이나 긴 기장의 옷이다.
나는 당장 그걸 골랐다. 그러자 그 옷이 공중에서 뚝 떨어진다.
[50 DMP로 긴 티셔츠를 구매합니다.]
떨어지는 옷을 받아 든 다음,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갈아입었다. 아니, 입었다.
허벅지 사이로 슬슬 부는 바람은 조금 서늘하긴 하지만, 그래도 뭐라도 입으니 안정되는 기분이다.
“자, 그럼 이제 전투 튜토리얼로 가 볼까요?”
“네?”
물의 정령 선배님께서 갑자기 바닥에서 스켈레톤을 소환해 내신다.
게임상으로는 F급 몬스터이지만, 실제로 보기엔 눈구멍 뚫린 인간형 헤골이 일어나는 모습에 나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그 스켈레톤은 나에게 매섭게 달려든다. 옷을 입자마자 당하는 생명의 위협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