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 던전 터 잡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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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실헤실 웃는 시엘의 말랑말랑한 뺨을 잡아 늘이면서 혼내다가, 슬슬 날이 어두워진다.
밥은 팝콘으로 대신했더니 배가 부르고, 남은 팝콘은 아직 바삭할 때 스켈레톤에게 들려 [수납]을 이용해 집어넣었다.
[수납]의 크기는 ‘몬스터’에 한해서만 100개체 정도로 제한되지만, 장비 상태에는 상관이 없기에 이런 활용 방법이 있어 편하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냐고 고민하던 중 운디르나 선배님이 뒤에서 깜짝 등장했다.
“세이나~”
“선배님!”
“이제 슬슬 터를 보러 갈까?”
인간 시절엔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었었지만, 선배님께선 따스하게 감싸주셔서 기분이 편안해진다.
편안한 선배님의 말랑말랑한 배 부분에 안긴다. 어쩌면 몬스터들 사이에선 선후배 관계가 부모-자식 간의 관계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기억을 되살려 보아도, 미묘하게 전생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선배님에 대한 편안함이 더 푸근하게 느껴진다.
“그럼 제 던전 터를 보는 건가요?”
“응응! 던전은 굳이 이쁜 땅 아래에 짓지 않아도 된단다. 일단 최소 5만 DMP 이상 모으는 걸 추천하니까, 당분간은 모의전을 할 거야.”
“벌써 37000이나 모았어요, 선배님”
“어? 벌써? 흐음- 그래도 세이나가 독립해도, 소멜을 통해 매일같이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소멜은 자기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란다.
시엘에게 안긴 채로 있던 소멜이 푸르고 진주 같은 눈으로 물끄러미 마스터인 나를 바라본다.
“세이나는 어떤 땅 아래에 던전을 짓고 싶니? 숲, 사막, 산, 강가, 바다, 등등. 많은 곳에 던전의 코어를 놓을 수 있단다.”
“음……”
아무래도 인간의 감정을 먹고 성장하는 만큼, 인간들이 접근하기 쉬운 장소가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온화한 기후에, 이왕이면 강가가 지나가는 곳이 성장하기 쉽다고 생각된다.
어차피 인간들은 던전 주변에 도시를 만들 테니까.
“참, 어차피 인간들은 어디에나 자연 발생하듯 생겨버리니까 아무 곳에나 지어도 상관없단다. 내 친구 중에는 산 정상에 지었는데도 그 주변에 도시가 생기더라니까.”
“아……”
“서큐버스니까 밤이 긴 땅에 던전을 만드는 건 어떨까? 내가 좋은 땅을 아는데.”
“……”
아무리 내 종족명이 서큐버스일지라도 나는 서큐버스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안 그래도 인간 시절엔 폐인 남자 게이머였고, 그 기억 때문인지 남자를 만나고 싶지가 않다.
인간처럼 아무런 밥이나 먹을 수 있어도 된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면 터들을 가보고 결정할 수는 없을까요?”
“그럴까? 나도 당분간은 감각 공유를 하지 말라고 막았으니까, 같이 가자! 세이나와 하는 여행이라면 좋을 것 같아!”
“선배님은 던전을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요?”
운디르나 선배님은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나를 뚫어지라 쳐다본다.
괜히 땀이 나는 것 같아 머리를 긁적인다. 아무래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걸까?
아니면 감각 공유를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잠깐 멍하게 있으실 때는 항상 그렇다고 하시니까.
갑자기 선배님을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단 이 세상에는 갓 태어난 개체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어리숙한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선배님, 지금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죠.”
“응? 어 그래, 말하렴?”
“선배님 연세는 2181살인가요?”
“……주글래? 여자의 나이는 묻는 게 아니란다.”
“아하하, 장난……”
운디르나 선배님이 저렇게 화난 건 처음 본다.
물 정령이 화가 나면 머리 위쪽에 김이 나면서 부글부글 끓는다.
으아악 사람, 아니 서큐버스 살려!
“세이나, 내 나이는 어떻게 안 거니?”
“아하하, 하하, 글쎄요 호호 호호홉.”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내 코 주변에 물방울이 마구마구 생기더니, 나는 그대로 운디르나 선배님의 물속에 갇혀 수몰되어 죽었다.
수몰되어 죽는 기분은 생각보다 행복했다. 아프지 않아서 그런 걸까?
곧바로 나는 [부활] 마법을 받고 살아났지만, 숨을 쉬는데 자꾸 코에서 물이 나온다.
“으…… 나이 물어보는 게 뭐가 잘못돼서 그래요?”
“아무튼 안 돼! 누가 네 나이를 물어보면 기분 좋을 것 같으니?”
“그…… 그렇긴 하네요.”
인간 세상에선 졸업하고 25살이 넘었는데 왜 취업하지 않냐고, 나이를 물으며 공격했었으니까.
이 세상은 게임과도 닮은 부분이 많은데, 인간 세상과도 닮은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진짜 운디르나 선배님은 2181살이었구나……
운디르나 선배님이 양팔을 벌리자 투명하고 반짝이는 물이 앞으로 쏟아져 나온다.
아무래도 몇 번이고 보다 보니, 익숙한 마법진 비슷한 것이 물보라와 함께, 빛나는 물줄기의 형태로 뿜어져 나와 네임드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 같다.
하지만 항상 소환진에서 나오는 건 거대한 고래 베히모스 형태의 텔레르나 씨다.
기쁨의 고동 소리가 울리고, 어제 나쁘게 혼난 건 아닌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것 같다.
물론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건, 텔레르나 씨의 눈이 나보다 3배는 더 크기 때문이다.
“세이나, 날아서 갈래?”
“네? 어디를요? 우앗……”
대답하기도 전에, 운디르나 선배님이 아래쪽에 물줄기를 뿜어냈고, 나는 압력에 밀려 텔레르나 씨의 등까지 강제로 날아 올려졌다.
운디르나 선배님이 자꾸만 하는 이런 행동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깜짝 놀라게 하는 이런 행위들은 심장이 위험해서 못 버티겠다.
거대한 고래, 아니 베히모스인 텔레르나 씨의 등은 정말 운동장 하나 크기만큼은 편평하고 기울기가 느껴지지 않을 절도이다.
일단 당장 땅에 배를 붙이고 계셔도 등에 올라오면 10m쯤 된다. 그만큼 거대한 텔레르나 씨가 고동을 울리고 점점 땅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와, 정말 텔레르나 씨는 날아오를 수 있었던 거네요.”
“응응! 텔레르나는 공기를 물처럼 사용해 날 수 있단다.”
텔레르나 씨가 빠르게 공기 중을 가르며 나는 건지,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로 불며 지나간다.
소멜과 시엘은 언제 탄 건지 옆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운디르나 씨도 뒤로 물방울이 한두 개 날리기는 하지만, 물 정령이라 그런지 원래 형태 자체가 부정확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륙할 때 맞바람이 부는 때를 제외하고는 곧바로 질렸다.
비행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날아오른다고 할 때는 기분이 좋지만, 안정적인 상태가 되어 구름이 아래로 하염없이 지나가는 걸 보게 되면, 그 신선함은 곧바로 떨어져 버린다.
그렇다고 텔레르나 씨의 편평한 등짝이 아니면 나갔다가 그대로 굴러떨어질 게 뻔하고, 그만큼 속도가 빨라서 내가 날아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다.
날개 있는 나보다 텔레르나 씨가 더 빠르다는 사실에 조금은 불만스럽기도 했다.
운디르나 선배님은 텔레르나 씨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나에겐 고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소멜도 나에게 뜻을 담아 이야기할 때와 아닐 때의 구분이 너무 확연하게 될 정도이다.
뒹굴뒹굴, 텔레르나 씨의 편평한 운동장 크기의 푹신한 등짝에서 뒹굴다가 그냥 한숨을 자버렸다.
일어났을 때는, 살짝 어두운 땅 위쪽이었다. 아니, 밤이어서 그냥 어두워 보였던 걸지도 모른다.
“세이나, 세이나, 일어나렴.”
“아, 에, 네. 여긴 어딘가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밤이 긴 땅이야.”
주변을 조금 더 멀리 바라보니, 산이 높고 땅은 전체적으로 낮은 분지형 지형이다.
이러면 밤이 확실히 길다고는 할 수 있겠고, 도시가 들어서면 매연 같은 게 들어서면 끔찍하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게다가 여름이나 겨울 같은 게 있을지는 모르지만, 끔찍하게 덥거나 끔찍하게 춥다.
“그…… 혹시 주변에는 어떤 던전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응? 아아, 여기 인간들의 지도. 도시나 일부 마을의 아래에는 던전이 있으니까 대충 비슷하다고 보면 돼.”
확실히 운디르나 선배님이 이전에 실패를 많이 해서인지, 나를 안전한 장소에 놓고 싶어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다른 도시, 그러니까 다른 마스터들로부터 떨어트리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지도상으로 살펴보면 던전들이 모여 있는, 그러니까 도시가 모여 있는 지역에 비해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그 마스터들이 얼마나 포악하고 무서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의 도시와 멀면 쉽게 DMP를 벌어들이기 힘들다. 일단은 기생충 같은 녀석들이지만 위쪽에 도시가 형성될 정도의 던전을 만드는 게 목표이다.
“음…… 여기는 어떤가요?”
던전들이 모여있는 장소에는 다른 마스터들도 입맛을 다시기 쉬운 걸까?
그래서 나는 조금 먼 곳을 고르고, 운디르나 선배님께 여쭤보았다.
하지만 선배님의 표정이 영 좋지는 않았다.
“음, 여기는 안 돼. 세이나는 인간들이 좋으니까 인간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지역을 고르고 싶은 것 같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강한 인간들을 맞이하면 인간들에게 코어가 드러나 죽을 수 있단다.”
“그런가요……”
“그래, 게다가 옆에 있는 이 도시. 여기 던전의 마스터는 번개 정령의 마스터야. 굉장히 호전적인 사람이고 주변 던전에 몬스터를 침입시켜 업무방해를 하는 놈이거든. 절대 추천하지 않아.”
“……”
터는 도시 간의 길목에 있고, 상당히 좋아 보였는데 그런 비밀이 숨어있었다.
나는 인근 지도를 살펴보며, 괜찮은 터가 있을지 계속해서 짚어가며 운디르나 선배님께 여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