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 던전 터 잡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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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거기는 별로 안 좋아. 일단 햇빛이 너무 많이 드는 양지바른 곳은 인간들이 좋아하기도 하고, 던전이 만들어지면 햇볕에 약한 몬스터들은 약해지거든.”
“던전은 지하에 생기는 거잖아요……”
“아니, 지하에 있어도 마찬가지란다. 햇빛은 땅속 1m까지는 침범하거든.”
나는 벌써 괜찮은 지점을 선택하고는 다섯 번이나 거절당했다.
던전의 터를 잡는 데는 도시가 들기 쉬운, 그러니까 인간이 살기 쉬운 장소와는 조금 거리가 먼 조건들이 많았다.
1. 던전은 햇볕보다 그림자가 드는 쪽이 좋다. 이건 내 종족이 서큐버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인간이 많다고 좋은 게 아니다. 초기에는 적당한 수의 인간들이 들어와야 그만큼 강한 인간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3. 던전이 많이 모인 장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초창기 마스터들이 후배 마스터들을 기를 때 주변에 놓으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어 그 주변에 가면 텃세가 심하다.
4. 터를 잡는다고 던전이 바로 생성되는 건 아니다. 코어를 심을 때 땅과 자신이 얼마나 잘 맞는가가 중요하다. 이건 1번과도 관련이 있다.
5. 이건 운디르나 선배의 숨겨진 바람 같은 것이지만, 선배님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게 좋다.
“음…… 그러면 정말 여기밖에 안 남네요. 그래도 분지 지형은 싫어요.”
“인간들의 개념과 우리들의 개념은 다르단다. 세이나, 너는 던전을 만드는 거지 도시를 만드는 게 아니잖니?”
“그치만…… 운디르나 선배님에게서 멀어지잖아요.”
확실히 이 땅은 나에게 맞는 터다.
그늘진 지상, 그리고 주변에 강한 마스터가 없는 지역, 인간들이 일정 이상 자라나는 데는 문제가 있겠지만, 초창기 던전을 구성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지상의 조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인 5번에 부합한다. 베히모스 텔레르나 씨를 타고서도 오랫동안 걸려 온 지역이다.
“흡…… 세이나……”
“인간들이 강하면 선배님께 네임드들을 지원받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 그럴까? 이번에 한 구역이 왕창 허물어져서 남는 몬스터들이 있긴 하지만……”
왠지 선배님의 얼굴이 파랗게 물든 느낌이다.
인간으로 치면 부끄러워서 발생하는 홍조일지, 내 꼬리가 실수로 선배님을 찍은 것만이 아니길 빈다.
“그러면 이쪽이 좋겠어요, 선배님의 산 뒤쪽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30km 떨어진 곳.”
선배님의 미궁은 가로세로 반경 13km 정도, 그 위쪽에 자라난 도시의 크기도 그 정도 된다.
운디르나 선배님의 던전은 완숙한 던전이기 때문에 더는 성장하기 힘들고, 내 던전이 성장해서 맞물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선배님은 그 주변 지도를 살펴본다.
지역의 특징 상 인간의 왕래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가깝다.
일조량도 조금은 있고, 충분히 그림자가 많이 드는 지역이다.
운디르나 선배님은 던전의 다른 조건들이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완벽한 조건을 갖춘 터는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단 우리는 텔레르나 씨를 타고 다시 내가 선택한 지점으로 날아올랐다.
“후후~ 주인님, 나 이제 시간의 마력도 제대로 다룰 수 있다!”
“응? 벌써?”
내가 던전의 터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뒤에서 마법을 연습하던 시엘이 다가와 세피아 색 액체와 바람의 마법을 이용해서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지고 놀던 세피아 색 액체에 정보 창을 열어본다.
시간의 정수
등급: S
상당한 마력의 정수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력이 담기는 정수이다. 자연상에 극소량만이 존재한다.
세피아 색 액체의 이름은 시간의 정수였구나.
내가 낸 마력에서는 느끼지 못했지만, 시엘이 낸 걸 보니 상당한 마력이 느껴진다.
“오, 시엘은 벌써 마스터의 마력을 다룰 수 있구나.”
“헤헤, 운디르나 마스터님, 저도 할 수 있다고요! 우리 주인님을 옆에서 꼭 지킬 거예요.”
당장 마력의 양 자체는 내 쪽이 훨씬 많다. 하지만 시엘은 나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다룰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의 챔피언 검투사와 싸우던 모습도, 어쩌면 나를 위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시엘이 대견해서 안아준다. 보송보송하고, 나와 체격이 비슷한 시엘이 기특하다.
“흐흐, 후배와 그 네임드가 노는 걸 지켜보니 기분이 좋아지는걸? 그렇지, 텔레르나?”
아래쪽에서 거대한 고동소리가 울린다.
텔레르나 씨도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까?
소멜도 옆에서 푸른 눈망울을 빛내며 바라보길래 같이 안아주었다. 소멜도 피부가 보송보송해서 인형처럼 안으면 기분이 좋다.
“미야아아아!”
한참을 나의 네임드들과 부둥켜안고 있다가, 갑자기 강하하는 느낌이 들어 바깥을 보니 땅이 다시 가까워진다.
텔레르나 씨의 고동 소리가 울리고는, 운디르나 선배님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신다.
이제 다시 내릴 시간이 되었기에, 천천히 날개를 쭉 폈다.
조금은 추웠던 구름 아래로 내려오자, 바깥의 황량한 풍경이 보인다.
인간들이 국경으로 이용하는 곳인지, 타다 남은 전쟁 기기들이 보인다.
상당히 부정적인, 그리고 위험한 분위기가 풍기지만, 운디르나 선배님을 보니 킥킥 웃으신다.
“아하하, 우리 후배님이 완벽한 터를 찾았네?”
“네……?”
분명히 인간들이 사는 도시로서는 전쟁터는 굉장히 좋지 않은 곳이긴 하다.
하지만 던전은 인간들의 감정을 먹고 성장한다. 그렇다면 전쟁터는 사실상 초반에 공짜로 포인트를 쌓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몬스터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터는 인간들의 처절한 싸움의 장소가 아니라, 포인트가 넘쳐나는 황금밭처럼 보였다.
“그런데 선배님의 던전 근처에서 잘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네요. 모르고 계셨던 건가요?”
“인간들의 정치 따위 알 게 뭐야. 일단 내려가서 세이나가 DMP를 회수하고, 장소를 확인해 보자꾸나.”
“네…….”
텔레르나 씨의 거대한 몸집이 내려오니, 양측에서 대치하고 있던 인간들은 지레 겁을 먹고 자신의 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아래로 착지하고, 나는 차마 죽지 못한 부상병들에게서 절망의 DMP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콜로세움에서 도박의 실패로 얻었던 절망감보다도 훨씬 강한 고통, 그리고 영예로운 죽음이 아닌 개죽음이라는 걸 알아차린 사람들에게서는 엄청난 속도로 DMP가 쌓이기 시작했다.
운디르나 선배님을 바라보니, 죽어가는 자들에게 수장을 시키듯 옅은 물길을 내보내 절망을 흡수하신다. 시엘도 바람의 마법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죽음을 끌어낸다.
나도 과연 이들에게서 DMP를 흡수할 방법이 있을지, 그저 손길을 내보내다가 내 종족을 생각하다가 꿈 마법을 선물한다.
본능적으로 내 고유 스킬인 시간과 종족 스킬인 꿈을 다룰 수 있었고, 이건 마치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게 죽어가는 인간들 사이에게서 구름처럼 보랏빛으로 뻗어 나간다.
“윽……”
“흐으읏…….”
사람들은 꿈속에서 죽어가며 DMP를 나에게 바친다.
엄청난 DMP가 쌓여간다. 여기서만 죽어가는 인간들에게 안식을 선물하고 5만에 가까운 DMP를 쌓을 수 있었고, 어느새 85000이라는 수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배님! 벌써 85000 DMP나 모았어요!”
“응! 나도 얼추 끝났으니까 땅에 대해 확인해 볼까?”
양옆, 그러니까 양측의 군대는 우리의 모습을 저승사자처럼 바라보며 무서워하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장난감에서 생명을 뽑아내는 것처럼 DMP를 흡수했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들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나는 적당히 DMP를 흡수한 뒤 선배님의 말을 따라 땅에 손을 대었다.
“자, 일단 그 땅에 네 심장을 박는 거야. 그러니까 땅과 소통해야 하지. 음, 나는 자연의 정령이기 때문에 소통했는데, 과연 서큐버스는 어떨지는 모르겠네.”
“그…… 손을 댔는데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아차차, 종족 스킬과 고유 스킬을 흘려보내렴, 그러면 땅이 대답할 거란다.”
“네임드를 소환할 때 흘렸던 그 액체 말인가요?”
운디르나 선배님이 활짝 웃으며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저번에 쓰고 난 뒤, 몸에 쌓인 마력이 얼마 없기는 하지만, 일단 왼손에서는 꿈의 보랏빛 액체를, 오른손에서는 시간의 세피아 색 액체를 땅속으로 흘려 보내본다.
그러자 땅이 대답하는 듯 느껴진다. 정확히는 지진이 일어나며, 주변 땅을 가른다.
엄청난 흔들림의 지진에 굉음이 일어나고, 어지러워서 머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운디르나 선배님이 내 어깨를 잡아주셨다. 시엘과 소멜도 옆에서 물에 둥둥 뜬 채로 있었다.
“겁먹지 말렴, 거부하는 게 아니란다.”
“그런가요……?”
확실히 처음에 시간의 마력을 액체 형태로 내어 보낼 때, 그러니까 시엘이 태어났을 때에 비해서 상당히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땅이 거대한 입을 열린 모습으로 나타낸다. 마치 자신의 심장을 꽂으라는 듯, 홈이 파인 공간이 눈앞에 나타난다.
마치 대지가 나를 환영하는 기분이다. 이제 나는 나만의 던전을 얻을 수 있다.
“와, 이렇게 환영하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아. 그런데 세이나, 네 심장은 지금 충분히 성장했을까?”
“네……? DMP는 5만이 넘었는데요?”
“그게 아니야, 세이나. 태어난 지는 얼마 정도 되었지?”
“음…… 이제 3일째요.”
인간으로 살아왔던 기간을 포함하면 충분한 시간이 되겠지만, 마스터 서큐버스가 되고는 3일밖에 흐르지 않았다.
운디르나 선배님이 그 소리를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차차, 대지가 일단 너를 환영해 주는 건 확인했으니, 일단 세이나의 몸을 튼튼하게 기르는 게 우선인 것 같아. 네 마력이 많아서 착각했는데, 아직 심장은 성장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제 던전은요?”
“아쉽지만, 한 달 후에 와도 대지는 널 환영할 거니까 괜찮아. 일단 내가 달래줄 테니 텔레르나 씨를 타고 가서 대기하렴?”
“아…….”
대지는 나를 저렇게 환영하고 있는데, 아쉬운 느낌이 든다.
그래도 나에게 맞는 대지를 확인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우연찮게 DMP도 많이 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