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 던전 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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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르나 선배님께서 타피의 치기 어린 행동에 화나시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타피는 심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고, 시엘과 소멜은 타피를 걱정하고 있다.
아리에타 언니는 도도하게 타피를 바라볼 뿐이다.
“타피, 이 사람들은 침입자가 아니야. 태어났을 때도 봤잖아.”
“아니야! 마, 마스터님을 해치러 온 거잖아!”
타피는 지대하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기 전에, 운디르나 선배님께서 물 손뼉을 철썩철썩 부딪치신다.
이런 분위기에선 어쨌거나 가장 강한 운디르나 선배님이 모든 걸 해결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자자, 인사는 끝났지? 내가 수납해온 병력은 전부 아리에타의 휘하. 그리고 만들어둔 물 필드에 풀어놓으러 갈 예정인데 볼 사람?”
다들 쭈뻣쭈뻣한 상태로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다.
선배님께선 침묵이 계속되는 공간 속에서 기다리시다가 말을 이으신다.
“세이나는 필참이에요. 시엘과 소멜도 가지 않을래?
“……네.”
“미야아아……”
내키지 않은 듯 보이지만, 둘 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선배님을 따라 타피를 내버려 두고 다들 자리를 뜨고, 다친 타피만 홀로 남겨질 뻔했다.
하지만 운디르나 선배님이 물 감옥에 타피를 가두고, 마법으로 공중에 띄워 데려오신다.
“싫어, 싫다고오오! 이거 놔!”
“어머어머, 나의 네임드에게 해를 끼치려 한 벌이에요. 호호”
“놓아, 이 나쁜 몬스터야!”
“겨우 그 물 감옥도 해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귀여운 세이나를 지키겠다는 거죠?”
선배님은 기본적으로는 푸근하고 차분한 누나 같은 이미지지만, 쏘아붙이는 모습은 아리에타 언니의 무서운 압박감을 상회한다.
타피는 그 압박감에 지레 겁을 먹고 물 감옥에 쓰러져 눈물을 훌쩍인다.
도와주고 싶지만, 타피가 먼저 폭주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건 확실하기에 나중에 토닥여주기로 한다.
평소처럼 2층으로 나왔지만, 스켈레톤 킹이 있는 흙 필드가 아니라 물 필드, 정확히는 심해나 바닷속 필드가 아니라 해변 같은 느낌의 필드가 나타난다.
“바다 필드를 써도 되겠지만, 그쪽은 세이나가 관리하기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해변 필드로 정했단다. 높이 자체는 4칸 정도이지만, 하늘은 매우 높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하늘에 쨍쨍 내리쬐는 저 햇빛은 인공적인 거야. 몬스터들에겐 자연의 햇빛이 에너지를 앗아간다면, 저 인공 빛은 에너지를 주는 빛이지.”
“그럼…… 이 필드의 바닥은 제 코어보다 더 아래쪽에 있는 건가요?”
“응응? 아니. 바닥에서 방금 나왔잖니?”
그러면 1층이 4칸 높이가 된 걸까? 구조가 이상하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운디르나 선배님은 일부 몬스터들은 [수납해제]하기 시작하면서 해변가 필드에 자기 몬스터들을 풀어놓는다.
선배님을 닮은 아름다운 물 정령에서부터, 어인이나 크라켄 같은 몬스터까지. 그리고 아까 데려왔던 쁘띠 슬라임들은 이 필드에서 적응한 듯 통통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쁘디 슬라임들은 녹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궁금해서 봤더니 슬라임들의 이름이 쁘띠 블루 슬라임으로 바뀌어있다.
“저 슬라임들은 여기에서 사는 게 더 나을 거야.”
“음…… 함정은 다시 만들어야겠네요.”
천천히 필드에 수납해제를 하는 선배님을 따라가며 어떤 몬스터들을 가져오셨는지 지켜본다.
한참을 걸어갔는데도 이어지는 해변 필드를 나오자 꿈 필드가 나오고,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들면서 포근한 기분이 든다.
“여기가 꿈 필드군요……”
원래 꿈 필드의 타일 형태는 보랏빛 구름이 아래쪽에 서린 분위기이지만, 선배님이 꾸며놓은 꿈 필드는 해변가에 서리는 안개 형태의, 으스스한 필드였다.
해변 필드와 꿈 필드의 경계가 구별이 잘 안 될 정도이다.
“아리에타는 여기.”
“감사합니다. 마스터님.”
“그리고 여기서 이제 소유 권한을 넘길 건데, 아리에타 너는 동의하지?”
“저는 운디르나 선배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저 무서운 아리에타 언니가 순종적으로 운디르나 선배님께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다 때려 부술 것만 같은, 내가 봤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서큐버스인데 말이다.
선배님은 물의 정수를 내뿜고, 아리에타 언니는 꿈의 정수를 낸다. 그리고 그 정수들이 작은 물줄기의 형태로 뻗어 나가 마법진 같은 것을 그린다.
“세이나는 지금 약한 상태니까, 잠깐 손만 빌리자. 피만 살짝 뽑을게.”
“네……?”
“잠시 빌려주는 것뿐이니까?”
손에서 드는 따끔한 느낌과 함께, 나는 선배님이 찌른 물바늘에 한 방울의 피를 강탈당했다.
뒤에서 타피가 동요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긴 하지만, 핏방울은 마법진에 섞여들고, 아리에타 언니를 기준으로 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홀로그램 형식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아리에타의 마스터를 세이나로 변경합니다.]
하지만 저 메시지가 뜬 이후에도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소멜 때는 저런 메시지가 뜨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궁금해서 아리에타 언니의 정보창을 열어보니 정말로 열렸다.
이름: 아리에타
종족: 물의 서큐버스
레벨: 189
특수 스킬: 화염 내성, 꿈 마법, 정신 감응
“그러면…… 아리에타 언니가 내 명령을 들어주는 건가요?”
“네, 마스터님.”
나에게 지옥훈련을 시켰던 교관 언니가 내 휘하로 들어오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레벨, 적당히 높다고는 예상했지만 저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시엘이 50레벨대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언니는 세자릿수나 된다.
레벨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시엘의 레벨도 오르다가 정체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휘하로 들어온 아리에타 언니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뭔가 복수 하고 싶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언니에게 배웠던 내용들은 암흑 속에 의식이 갇혀있을 때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꿈 마법과 명상을 배우며 호흡을 꾸준히 가다듬지 않았으면 이 몸은 죽어버려 못 썼을 테니까.
“아리에타, 느낌은 어때?”
“운디르나 마스터님…… 별로 다른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만.”
운디르나 선배님은 아리에타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는다.
아리에타 언니는 어리둥절한 느낌이고, 운디르나 선배님은 계속해서 꿈 필드를 걸어 나간다.
“주인님, 이 필드 무서워……”
그런데 시엘도 있었었지, 뒤를 보니 다들 아리에타 언니의 소유권이 변하는 순간을 지켜본 것 같다.
타피는 울상이 되어있고, 다른 네임드들은 신비한 듯 바라보았다.
특히 텔레르나 씨가 제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흠, 이건 축하드려야 하나요?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세이나 마스터님의 던전 형성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시엘과 소멜은 꿈 필드에서 굉장히 불안한 듯 벌벌 떨고 있으며, 텔레르나 씨가 안아주기에 그저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 아이들은 꿈 필드에 들여보내지 말렴. 물론 지금은 텔레르나가 지켜주고 있으니까 괜찮지만, 가장 상성이 안 맞는 종족이거든.”
“아……”
“소멜이 꿈 정수를 먹고 자라면 모르겠지만, 알겠지?”
“선배님께선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아시는 건가요?”
운디르나 선배님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다가 활짝 웃는다.
“응응, 여러 번 실험해보면 돼!”
“알려주세요-“
“이건 차차 알아가는 게 어떨까? 인간들이 오고 DMP 소모를 하다 보면 될 거야. 너무 알려주기만 하는 것도 재미없지 않겠니?”
“히잉……”
잠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배님께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이건 벌써 어린 서큐버스의 몸에 정신이 침식되고 있다는 건지, 정신 차려라 나.
“안 돼. 그리고 이 정도면 우리 귀여운 세이나를 위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으니까! 다음에는 텔레르나를 통해 내 던전으로 오길 바래.”
“네……”
텔레르나 씨는 옷 아랫단을 집어 당기는 두 네임드들에 못이겨 꿈 필드 바깥으로 나간다.
으스스한 느낌의 안개가 서린 이 필드가 왜 나에겐 이렇게도 편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리에타 언니도 편해 보인다.
그리고 잊고 있었지만, 뒤에 있던 꿈의 정수를 받은 또 다른 뱀파이어, 타피도 필드에 대해 기분 나쁜 표정은 짓고 있지는 않다.
“세이나, 타피는 아리에타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
“그…… 타피가 싫어하는 건 안 하고 싶어요.”
“아리에타라면 잘 가르칠 거니까 괜찮아!”
운디르나 선배님이 저렇게 아리에타 언니에게 보내는 전폭적인 지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궁금하다.
우리는 운디르나 선배님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바쁜 운디르나 선배님은 자기 던전에서 박혀있어도 수많은 업무가 쏟아질 테지만,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어 나를 위해 오셨으니까.
“이제 가야겠네, 세이나.”
“세이나 마스터님, 다음에 또 뵙시다.”
작별 인사를 하고, 텔레르나 씨는 베히모스 모습으로 변신한다.
마지막으로 운디르나 선배님은 나를 안아주고는, 옆에 있던 아리에타 언니를 안는다.
“운디르나 마스터님, 나중에 뵙시다.”
“그래, 아리에타. 다들 잘 있어.”
다시 한번 운디르나 선배님이 뒤돌아보고는 텔레르나 씨의 등으로 물기둥 형태가 되어 솟아올라 탑승한다.
운디르나 선배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아리에타 언니가 돌변할 것이라 생각하고 보았지만, 그 무서운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아리에타 언니에게 품고 있었던 건 편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