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 전쟁을 멈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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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이 인간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고, 마력도 꽤 많이 써서 둘 다 떨어져 곯아떨어진 르테아 언니를 두고, 시엘은 옆에서 선잠을 자고 소멜도 메로우 폼으로 꾸벅꾸벅 존다.
그녀들은 모두 하얀 사제 정복을 입고 있다. 잠옷으로 갈아입는 것조차 까먹고 잠이 들었다.
유일하게 깨어있는 타피에게 감각 공유를 걸어 아름다운 자매 같은 두 소녀와 한 애완동물의 잠을 바라본다.
‘마스터, 나 밖에 나가도 되겠죠?’
‘응, 그래. 시원한 바깥을 보여줘.’
‘이 사제복, 입고 가도 되는 걸까? 너무 답답하고 귀찮아.’
‘갈아입어도 돼, 밤이니까, 평소에 입던 원피스는 어때?’
‘알았어, 그런데 짐이……’
르테아 언니의 짐은 단추로 잠겨 있어, 열 때 딸깍 소리가 나도록 되어있다.
타피는 짐까지 다가가 평소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는다.
검은 톤의 원피스. 다소 몸에 달라붙는 부분들이 있지만, 타피가 의도적으로 줄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타피, 옷은 왜 줄인 거야?’
‘음…… 마스터, 이 옷은 좋아해?’
‘무슨……?’
“[블러드 박스]”
타피가 이상한 마법을 쓴다. 몸속에서 혈류가 빠르게 돌며 뭔가 튀어나온다.
블러드 박스, 피처럼 만들어진 박스를 열자, 타피의 몸에 딱 맞는, 여성용 정장 같은 옷이 보인다.
‘응……? 타피 이런 건 대체?’
‘마스터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마스터가 입어주었으면 했는데…… 나랑 몸 치수가 같으니까.’
‘아니, 이런 건……’
느와르 풍의 어린이용 정장. 서큐버스인 내가 입으면 다소 세 보이는 인상이 완성될 것이다.
등 뒤쪽, 날개가 있는 부분까지는 뒷목이 파여 열려있고, 꼬리를 낼 수 있도록 뒤쪽이 열리게 박음질 되어 있다.
다른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건 아쉽지만, 타피가 입어도 굉장히 멋있는 모습일 것이다. 거울에는 뱀파이어인 타피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니 아쉽다.
‘주인님, 설마 기대한 거야? 내 모습을 그렇게 보고 싶어?’
‘으, 으음……. 아니.’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다.
타피의 정장 입은 모습, 멋지고 귀여울 것 같아서 정말 보고 싶다.
‘그런데 타피는 옷 만드는 법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아니…… 이건 아리에타 언니가……’
‘응? 정말 그 언니가 옷 만드는 법을?’
의외의 이름에 놀랐다. 분명히 옷 수선이라던가, 그런 걸 잘 할 것 같은 이미지는 르테아 언니에게 있다.
타피는 검은 정장을 다 차려입고, 그림자 날개를 펼치며 창문을 열었다.
‘이 옷이면 안 보이겠지, 마스터?’
‘타피……. 보고 싶다.’
‘나도, 마스터의 머리 냄새를 맡고 싶은데.’
‘…….’
“타피! 어딜가!”
뒤에서 시엘의 목소리가 들린다.
백의의 어린이용 사제 정복을 입고 있는, 풍성하고 푹신푹신한 금발의 시엘 또한 천사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두 아이가 함께 있다면 천사와 악마 같은 느낌이 났을 것이다.
“아, 마스터께 허락받았어, 시엘은 쉬어.”
“그래……. 주인님이지? 주인님, 보고 있으면 타피를 꼭 폭주하지 않게 봐 주세요. 저는 먼저 잘게요!”
“마스터, 그렇다는데?”
나도 코어 위쪽에서 뒹굴뒹굴하며 “잘자”라고 말했다.
타피는 미소를 짓고 시엘을 눕히고, 다시 창문을 열고 날아오른다.
나도 날개가 있기는 하지만, 꿈 마법을 빌지 않으면 10cm도 날지 못한다.
그에 반해 타피는 그림자는 꿈 마법이 아니라, 본능처럼 다루는 것이기에 불공평하다 싶을 정도이다.
밤에 보는 성벽, 그리고 횃불을 들며 지나다니는 병사들이 보인다.
먼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횃불이 반짝반짝 빛나며 진을 치는 상대측 병사들이 보인다.
그 사이 어둠 어딘가에는 우리 던전이 있을 것이다. 타피가 순간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타피는 할 일이 있다.
게다가 에크렌스 왕국 측에서는 미미하지만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스터하고 같이 날고 있는 느낌이 들어. 마스터 몸이 다 나으면 우리도 함께 날 수 있겠지?’
‘무슨 나를 병약 히로인 취급하지 말라고!’
‘하하, 마스터는 약해빠졌어. 그런데 히로인이 뭐야?’
‘알 게 뭐야!’
‘아야……’
타피는 내가 소리 지르자 두통을 호소하며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할 뻔했다.
아차하고는 내 실수를 깨달았다. 멍청하게 감각 공유 통로로 마스터가 소리지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아찔한 순간에 다시 그림자를 펼쳐 활강하자,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휴……’
‘마스터, 나 걱정했던 거지?’
‘아니거든! 타피는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타피가 괜히 한 번 더 심술을 부리며 추락한다.
이번에도 다시 날아오를 것을 알기에 나는 감각 공유를 살짝 끊었다.
못됐다. 누가 이렇게 타피를 장난기 심한 아이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원래 태어날 때부터 그런 아이였을까?
조금 있다가 다시 감각 공유를 걸자, 타피는 땅에 서 있었다.
‘타피, 어디 가는 거야?’
‘응, 나의 역병이 어떻게 일하나 보려고 가는 거야.’
‘흐흐, 재미있겠네.’
다시금 말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오고 인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게임 속 데이터나 손놈, 그 정도의 의미다. 어째서인지 인간이 불쌍하게 보이기보다는 장난감 같은 의미로 보인다.
몬스터의 관념에 갇혀있다고는 어렴풋이 생각하기는 하지만, 딱히 인간이라고 게임 속 데이터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타피는 검은 옷을 입었기에 어둠 속에서 들키지 않는다. 그래도 위쪽 셔츠는 하얀색인데, 이마저도 자신의 그림자를 둘렀다.
“콜록, 콜록…….”
“으헤켁켁, 우헥, 살려줘어…….”
“뭐야, 저 비실이들은. 그러니까 체력을 길러야지, 체력을.”
‘아, 배합을 제대로 했네. 딱 건강한 녀석들한테는 들지 않게끔 만들었는데 말이야.’
‘타피, 사악해.’
‘아하하, 마스터가 해주는 칭찬, 너무 달콤해.’
타피가 악역의 대사를 읊으며 귓가에 속삭인다.
왠지 그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치 타피를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물론 심장이 없어서 정말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쿵쿵거리는 혈류의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다.
역병에 걸린 전쟁 마법사들은 돌아다니면서 다른 전쟁 마법사들에게 옮기기 시작한다.
전쟁 마법사들은 자기들만 쓰는 막사가 있는지, 돌아가서도 역병을 마구 퍼트린다.
“대체, 이 기침은…… 콜록콜록.”
“살려줘…… 아파…….”
“가슴이…… 윽.”
타피는 그렇게 좌절하는 전쟁 마법사들 사이에서 그림자에 숨어들어 DMP를 흡수한다.
효율이 상당히 낮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데 역병을 마구 퍼트리는 바보 같은 마법사들을 보니 의문이 든다. 마법사들은 공부하던 녀석들 아니었나?
‘인간들은 역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야?’
‘아아, 마스터. 당연히 저 역병에 지능을 낮추는 기능을 숨겨놨지.’
‘타피, 사악해. 악마야.’
‘마스터, 너무 칭찬해주는 거 아니야? 쑥스러운데……’
‘그런데 타피, 너 언제부터 나한테 반말 쓴 거야?’
‘마스터는 이런 게 더 편하다고 그랬잖아!’
아, 그랬었나.
그랬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타피가 정말 뱀파이어의 포스를 풍기기 시작한 때부터?
그래도 타피는 말에서부터 반항하며 하극상까지 일으킬 아이는 아니다. 마음속은 착한 아이라는 걸 알기에 내버려 둔다.
타피는 저렇게 말하는 게 어울리기도 하고 말이다.
역병이 확실하게 퍼진 걸 발견하고는, 타피는 다시 배정받은 고급 숙소로 돌아온다.
그리고 기다리던 시엘의 옆에 눕고는 머리카락 냄새를 킁킁거리며 눈을 감는다.
그게 시엘이 아니라 르테아 언니였지만 말이다.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난 건, 그러니까 나에게 가장 먼저 신호가 온 건 르테아 언니다.
나는 그동안 뒹굴거리며, 아리에타 언니가 해 준 밀크티를 받아먹고 DMP 요리를 꺼내 먹었다.
타피가 흡수한 DMP의 양은 비효율적이었지만 꽤 많이 벌어서 벌써 총량이 21156 DMP나 되었다.
그만큼 희생자가 많다는 소리고, 역병에 짜증을 낸다는 소리다.
‘언니, 일어나셨어요?’
‘으응……. 어깨가 조금 결리긴 하지만.’
‘아…….’
그래, 어깨가 결리기도 하겠지, 그 엄청난 흉부 장갑을 이고 다니려면 말이야.
그런데 왜 이런 거에 내가 일일이 질투를 느끼는지 모르겠다. 인간 시절, 당장 몇 개월 전만 해도 남자였는데?
지금은 내가 서큐버스여서? 하긴 나는 껌딱지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아니, 아니야, 나는 그런 거 관심 없어. 물론 큰 게 안기기는 좋지만 말이야.
‘음음, 그래서 바깥에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무슨 소리…… 아?’
그제야 희미하게 들리던 전쟁의 함성이 들린다.
르테아 언니가 의식하자 그 함성이 또렷하게 들리는데, 르테아 언니는 놀라서 시엘을 깨운다.
“시엘, 시엘! 전투야!”
“아으으, 네 알겠어요, 언니. 일어날게요.”
시엘이 일어나고, 바깥으로 바람을 불러일으켜 상황을 감지한다.
그때 시엘의 감각 공유로 바꾸자, 시엘도 이전에 타피의 초음파에 감명받았는지 바람으로 먼 곳을 감지하는 마법을 배운 것 같다.
마치 머릿속에 그려지는 전장의 모습. 다양한 전쟁 마법사들과 전투원들이 성벽 위에서 방어하고, 밖에선 보병 중심의 프란시아 왕국에서 투석차나 발석거를 가지고 와서 투석하는 장면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