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속 서큐버스-85화 (85/95)

00085 <-- 폐허가 된 세이나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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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동기 근처에는 다행히도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 필드는 수풀로 우거져 있기 때문에 순간이동기가 잘 보이지 않기도 하다. 인간들이 쉽사리 올 수 없도록 절벽 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파, 내가 말하는 데로 연기할 수 있겠어?’

‘그래, 주인.’

리파는 분홍 머리의 엘타리스로 변장해 고개를 끄덕인다.

목소리도 엘타리스의 것이지만, 말투가 리파의 것이어서 구분할 정도로 정교한 변신이다.

리파는 어쩌면 나로 변신하고 있지 않을까, 타피가 도플갱어의 관을 얻은 것처럼 리파가 그런 상상을 품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은근히 반항적인 모습의 엘타리스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다.

리파가 자연 필드에서 나오자 곳곳에 숨어서 죽을 시간만 기다리는 상급 모험가들이 보인다.

이 필드에는 푸른 점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긴장하는 걸 보면 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은폐한 몬스터와 인간은 맵에 보이지 않는다.

시엘에게 알려주고 싶긴 하지만, 아쉽게도 시엘은 오지 않았다. 아마 돌아가 알려주면 좋아할 것 같다.

고뇌에 가득 찬 인간들은 대부분 평지 지형에서 서로 불침번을 서고 있다.

저들을 위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던전에서 빨려가다가 다른 인간들을 불러올 터를 만들지 못하는 건 장기적으로 내 손해다.

게다가 엘타리스의 인간 세계에서의 지위도 중요하다. 인간들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차이가 크다.

어쩔 수 없이 타는 속을 참으며, 인간들의 사이로 나아갔다. 꼬리를 말아 숨기고, 작은 뿔은 푸른 피부의 인간들도 가지고 있는 거라 혼혈이라고 우길 참이다.

“누구냐!”

“멈춰, 아군이다. 엘타리스 님이잖아!”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희는 본 적이 없는데…….”

“여기 쓰러져 있던 인간이다. 몬스터가 아니야.”

“언니……!”

나는 일부러 눈물을 흘리는 척을 했다. 서큐버스의 눈물은 인간들을 홀리는 효과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 효과를 정말 보게 되니 놀라웠다.

보초를 서던 인간들은 내가 눈물을 흘리자 곧바로 풀어졌다.

“아아, 그래, 들여보내.”

“엘타리스님이 아이를 주워 왔어. 원래 이렇게 착한 분이니까.”

다행히도 엘타리스의 명예와 나의 외모 때문인지 설득력은 꽤나 높았던 것 같다.

보초를 서고 있던 남자 둘은 지나치자, 그들의 눈 밑에 낀 다크서클이 무겁게 보인다. 표정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법하다.

목소리에도 피로가 가득하고,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물론 던전은 이들을 놔주지 않겠지만.

게다가 매시간 떠 있는 저 해도 인간들에겐 해로울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몇몇은 일어나 있지만, 몇몇은 천 따위로 눈을 가리고 누워있었다.

나는 리파에게 감각 공유를 걸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게 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여기는 위험해!”

리파가 크게 말하자, 인간들은 동요하며 일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밖은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여기로 후퇴하자고 한 건 당신이 아닙니까?”

그중에서도 한 명이 소리 높여 말한다.

분명히 엘타리스의 타락 인간이 숨어있을 텐데, 그들은 나를 봐도 모르는 것 같다.

“적들은 이미 떠났다. 선발대를 보내 확인했어. 그리고 이 던전 마스터와 담판을 지었지.”

‘주인? 이렇게 말해?’

‘괜찮으니까, 내가 하는 대로 말해.’

‘하지만 이 녀석들, 이런 상태론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데……’

‘장기적으로 생각해 참는 거야, 언젠가는 다 먹어 치울 거니까.’

다행히도 내가 생각한 엘타리스의 말투는 그들에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들은 몇몇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리파가 목소리를 크게 내자 굼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떠나자, 떠나, 다시 우리의 아늑한 마을로, 다시 세우고 이번엔 성벽을 세운다.”

“졸린 데……”

“피곤해……”

인간들이 말을 듣지 않자,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이야기해야 했다.

작아진 외모, 그리고 서큐버스라는 종족의 특성을 이용해 인간들을 감화시키기 위함이다.

“여긴 위험해요, 오면서 엘프들이 대규모로 게릴라 작전을 하려는 말을 들었어요.”

“무슨 소리-“

“저건 누구야?”

“엘타리스님이 데려오신 꼬마다. 엘프들은 꼬마를 죽이지 않으니까 진실이겠지.”

나는 일부러 눈에 눈물을 모았다.

의외로 눈물이란 건 쉽게 모였지만, 왠지 남자였었다는 기억이 눈물과 함께 깎여나가는 기분이다.

“아이의 말을 들었으면 쉬지 말고 떠나라! 여기 있는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전에 말이지.”

리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곧바로 시엘에게 감각 공유를 걸었다.

시엘에게 이 필드에 은신한 엘프와 몬스터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전하자, 시엘은 활짝 웃었다. 밝아진 시엘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시엘에게 이 필드로 와서 인간들을 습격하지 않게끔 조정하게 전했다. 시엘의 바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어서! 짐을 챙겨서 떠나.”

“알겠습니다!”

인간들은 엘타리스로 분한 리파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엘타리스를 따라 온 사람들이니만큼 말을 따랐다. 몇몇은 의심을 해도, 차라리 A급 모험가였던 모험가 지부장의 희망적인 말을 믿고 싶었을 것이다.

좋은 뜻을 전해오는 가짜 엘타리스가, 축 늘어진 채로 인간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진짜 엘타리스보다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타락한 엘타리스가 그들에게 ‘담판을 지었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시엘 덕분에 인간들은 쉽사리 자연 필드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인원은 세 보지 않았지만 대략 200명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위로 나오자, 흙 필드엔 몬스터 한 마리 없고, 쓰러진 엘타리스와 인간들이 있었다.

아래층, 자연 필드에서 올라온 엘타리스와, 쓰러진 엘타리스를 번갈아 보던 인간들은 혼란에 빠졌다. 아까 던져두었던 엘타리스가 지금에야 문제를 일으킨다.

“아니, 누가 진짜지?”

“대체 누가 진짜야!”

“이 분은 여기 원래부터 계셨다. 잠시 밖으로 나가신다고 하시고는 이런 상태로 돌아와 쓰러지셨어.”

벌써 신경질적으로 된 인간도 보인다.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각자의 소리를 높이는 때를 기다렸다. DMP의 회수가 일어난 뒤에는, 나는 리파의 입을 빌려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저 녀석이 가짜다. 다들 도플갱어에 대해서는 알겠지?”

“흐잇…… 그건 꿈 필드에만 나오는 B급 몬스터!”

“그래, 나는 사실 던전의 심부에 우리가 살 만한 공간은 있는지, 던전 마스터와 담판을 짓기 위해 내려가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저 도플갱어를 만났다.”

“그럼 다들 죽여! 엘타리스님을 위해!”

“아니, 도플갱어는 내 손으로 죽인다.”

인간들이 손을 쓰기 전에, 나는 리파의 손을 빌려 도플갱어의 가슴에 대었다.

그리고 나도 몰래 손을 대고 그대로 엘타리스를 손아귀에 [수납]했다.

인간들의 눈에는 리파가 도플갱어를 죽인 듯 보였을 것이다.

“역시 엘타리스님이다.”

“그럼 옆에 있는 아이는 누구입니까?”

“이 아이는 도움을 주는 아이다. 우리의 승리를 이끌어줄 상징이지. 엘프의 대규모 게릴라로부터 2층에 있던 인원을 모아 살릴 수 있었다.”

인간들의 사이에서 점점 희망적인 이야기가 오간다. 그리고 점점 박수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오히려 내가 노린 대로 움직이는 인간들의 모습에 이건 너무 쉽게 선동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피난민들은 집단 광기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트라우마를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주인, 굉장하네.’

‘리파가 하는 거야. 이건.’

‘중간에 교체해줄 거지? 나 힘들어.’

‘그래, 시간의 정수도 듬뿍 줄게.’

‘고마워, 주인.’

엘타리스로 분한 리파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힌다.

그건 인간들에게 환호성을 들으며 쑥스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보였는지, 인간들의 환호성이 더 커졌다.

엘타리스로 분한 리파는 헹가래까지 당할 뻔하다가 던전의 높이를 본 인간들이 포기했다.

그동안 나는 인간들의 수를 셌다. 전체적으로 여성과 어린이들의 비율이 마을 때보다 높고, 600명 정도의 인원밖에 수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 내 가축들을 가져간 녀석들에게 복수해야지.

리파의 입을 빌려 밖으로 나가게 하고, 나는 잠시 자연 필드 쪽 입구로 들어갔다.

던전의 회복성에 의해 입구에 있던 인간들이 점점 던전으로 흡수된다. 흙으로 빠져드는 시체들을 보니 살짝 무섭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석굴 필드를 만든다.

[5000 DMP를 이용해 돌 필드를 10칸 형성합니다.]

여기서 캐낸 돌로, 인간들을 이용해 던전도 넓히고, DMP도 얻고, 성벽도 쌓을 수 있는 1석3조를 노릴 수 있다는 생각에, 내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돌았다.

하지만, 르테아 언니를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짓눌린다. 리파에겐 미안하지만, 당분간 엘타리스를 어르고 달랠 때까지 분하게 하고, 나는 다시 석굴로 돌아와 엘타리스를 내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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