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6 <-- 폐허가 된 세이나 마을 -->
=========================================================================
“세……. 세이나…… 마스터님…… 죄송해요…….”
엘타리스는 눈가를 떨며 악몽을 꾸는 듯하다.
인간들의 사이에서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내가 너무 몰아세운 걸까?
그런데 레벨 166인 엘타리스가 대체 왜 내 마력에 겁먹은 건지, 오랜만에 내 정보 창을 열어보았다.
이름: 세이나
종족: 던전 마스터 서큐버스
레벨: 132
종족 스킬: 꿈
특수 스킬: 시간
세부 스탯 ▽
음……
잠깐, 이거 내 레벨 맞겠지?
시엘은 먼 곳에 갔고, 타피는 지금 르테아 언니를 구하기 위해 나갔으니, 나에게 메로우 폼으로 안겨 자는 소멜의 정보를 열어보았다.
이름: 소멜
종족: 시간의 메로우
레벨: 82
특수 스킬: 화염 내성, 정화, 반응 가속, 시간 감속, 시간 정지, 시간 가속, 물 다스리기
소멜의 레벨은 이전에 비해서 30 정도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100대에서 30레벨이 오르는 것과 그 이전에 30레벨이 오르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레벨을 올리는 데 필요한 경험치의 요구량은 최소 1만 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
아스타로른 언니와 마력을 나눴던 게 이런 결과가 되었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마스터는 일반 네임드나 몬스터에 비해 몇 배는 강하다.
사실상 이 던전에서 나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리에타 언니뿐, 그것도 코어 주변에서 마력을 꾸준히 섭취하는 내가 장기전에선 유리할 것이다.
이걸 아는 건, 그저 아리에타 언니에게 몬스터의 상식에 대해 배웠기 때문이다.
“아흑…… 마스터님, 저를 버리지 마세요…….”
지금은 앞에서 악몽을 꾸는 엘타리스의 꿈에 간섭해야 한다.
엘타리스의 앞에서 의도치 않게 화를 내어서인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인간들을 다스리는 엘타리스는 지금 작전에서 매우 중요하다. 리파는 잘 참을 수 있지만, 불여우다 보니 언제 폭발해서 인간들을 학살할지 모른다.
누운 채로 눈을 감고 거칠게 한숨을 내쉬는 엘타리스를 편안하고 두꺼운 휘장 위에 눕히고, 이마에 손가락을 얹는다.
“엘타리스, 마음을 편안히.”
꿈 마법을 불러들이고, 엘타리스의 꿈을 조작한다.
지금 꾸는 꿈이 거꾸로 흘러들어온다. 여린 엘타리스는 어딘가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다.
거기서 느껴지는 두려움, 무서움, 공허감은 아마 어린 시절의 엘타리스일까?
하지만 꿈의 엘타리스는 지금보다는 더 크다. 지금은 유녀화 저주에 불로 저주가 걸려있으니까 그렇다. 얼굴에 주근깨가 난 10대 후반의 모험가로, 초보티를 내는 모습이다.
그런 엘타리스가 어느 흙 필드의 던전 속에서 스켈레톤을 만나 쓰러진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던전의 장애물 뒤에 엄폐했다.
“마스터……. 제발…… 살려줘요!”
그러자 뒤쪽에서 기사갑옷을 입은 인간이 스켈레톤이 내려찍는 뼈 곤봉을 막는다.
눈을 꼭 감은 엘타리스는 저항하나 하지 못하지만, 기사가 스켈레톤을 밀어내고 엘타리스를 일으켜 세운다.
“일어나, 엘타리스.”
“당신은……. 스승님?”
“너는 지금 지켜야 할 사람이 있지 않느냐!”
“하지만……”
“모험가로 평생 의뢰를 받는 건 당연한 일. 너는 모험가를 은퇴하고 기사가 된 주제에, 나약하게 벗어나겠다는 건가?”
이상하게 내가 간섭할 거리가 없는 것 같다.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 아마 스승으로 보이는 존재가 엘타리스를 다그치고 있다.
엘타리스는 이를 악물고 일어난다. 그리고 스켈레톤에게 선 채로 스승에게 칼을 들이민다.
“스승은 인간, 저는 몬스터.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세이나 마스터님을 위해 이 한 몸 바친 자.”
“그래, 그거다…….”
스승은 얼굴이 투구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에서 웃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저 존재는 엘타리스가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
스승의 검이 엘타리스의 옆을 파고드나, 엘타리스는 쉽게 쳐낸다.
“기합이 없군, 이전엔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말이야.”
“모험가는 소리 없이 몬스터를 처치해야 합니다. 스승.”
“그런 이야기를 몬스터가 된 제자에게 듣다니. 허허”
-깡
보이지 않는 속도로 두 검이 부딪히며 불똥이 튄다.
스승이라는 자도 꽤나 레벨이 높아 보인다. 정보 창을 열어보려 했으나 어차피 꿈이라 열리지 않는다.
“손님이 온 것 같군.”
“그런 식으로 시선 돌리시려는 겁니까?”
-키잉
엘타리스의 검이 스승의 옆구리로 파고들었으나, 스승은 검을 세로로 세워 막아낸다.
역시나 불똥이 튀며, 힘 싸움을 하다가 스르르 서로의 검이 떨어진다.
“망자는 이만 가겠네.”
“스승, 어딜 갑니까!”
스승은 스르르 형체가 사라진다. 엘타리스가 허공에 검을 몇 번을 휘둘러도, 스승은 나타나지 않는다.
엘타리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와 동시에 나를 막아주던 은폐물이 스르르 사라진다.
그리고 흙 필드도 스르르 사라진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엘타리스의 앞에 정면으로 걸어갔다.
“마스터…….”
“엘타리스, 미안해. 너도 할 일이 있으니까 일어날 시간이야.”
“저는 쓸모없는 기사일 뿐…….”
“누가 그랬어?”
따스하게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리는 엘타리스를 껴안는다.
엘타리스도 다시 유녀화 저주가 된 몸으로 돌아와 나와 키가 비슷해졌다.
“에헤, 헥, 흑, 흐읍, 흐아아아앙!”
“울지 말렴.”
엘타리스가 눈물을 쏟아낸다. 꿈이라 그런지 눈물의 양이 양동이를 쏟아내는 듯, 바닥을 채울 만큼 많이 나온다.
정작 내가 혼내고, 아이처럼 달래는 게 웬 말이냐 싶기도 하지만, 엘타리스의 마음이 점점 안정되기 시작한다.
등을 토닥여 주니,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내 품에 파고든다.
그 특유의 땋은 분홍 머리가 풀려있기에, 쓸어내려 준다. 꽤나 머릿결이 부드럽다.
“자, 엘타리스는 할 일이 있지?”
꿈이기에 내가 지금까지 리파와 함께 했던 일을 보여준다.
엘타리스는 훌쩍이는 상태로 그 모습을 바라본다. 겉으로 보여주는 딱딱하고 기사다운 모험가, 그리고 리더의 모습의 내면에는 이런 소녀가 있었다는 생각에 내가 너무 괴롭힌 게 아닐까 걱정된다.
그래도 엘타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래쪽에 차오른 눈물은 다시 다 말랐다.
“알겠습니다. 인간들을 시켜 석굴을 파서 돌을 옮기고, 성벽을 쌓으라는 말씀이지요?”
“그래. 역시 잘 아는구나.”
“감사합니다. 세이나 마스터님.”
엘타리스가 조금 전까지 울었던 얼굴에 웃음을 띄운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날 텐데,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꿈을 거둬내자, 엘타리스는 현실에서 깨어났다. 뺨에 눈물길이 흘러 촉촉하게 젖어있어서 닦아준다.
“마스터님,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 전에 리파를 불러올게. 자연 필드 입구에서 기다려.”
엘타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순간 이동 장치를 통해 올라갔다.
그리고 리파에게 감각 공유를 걸자, 엄청난 짜증이 통로를 통해 밀려들어 온다.
싸늘한 말투는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주인, 나…… 이것들, 전부, 죽이고 싶어.’
‘리파, 이제 돌아와도 돼. 맛있는 거 줄 테니까 응?’
‘맛있는 거……. 주인은 내가 먹는 거로 함락될 것처럼 보여?’
‘시간의 정수도 줄 테니까.’
시간의 정수라는 말에, 리파는 다시 웃음을 짓는다.
누구 정수에서 나왔는지, 힘이면 그저 기분 좋은 것 같다.
‘주인, 갈게.’
‘잠깐 던전을 확인하고 온다고 하고 들어와.’
리파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북적이며 대기하던 인간들을 향해 소리친다.
“잠시 대기! 던전을 확인하고 오겠다.”
““예!””
인간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피로가 보이지만, 그래도 많이 밝아진 것 같다.
그리고 던전으로 돌아와, 분홍 머리 여자를 만나 교환하자, 리파는 바로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엘타리스는 다시 인간들에게 돌아갔고, 리파는 순간 이동기를 통해 돌아왔다.
“주인, 알지?”
“잠시만 기다려 줘.”
“안 주면 주인 내 맘대로 할 거야.”
리파는 앉아있는 내 무릎 위에 와서 수줍은 듯이 앉는다.
그대로 꼬리를 내 얼굴에 파묻는다. 앞이 안 보인다. 코가 간지럽다.
“에푸푸, 잠깐만 기다려 달라니까!”
“주인 나빠. 나도 화났어.”
“아, 알았으니까 잠시만. 아, 그래, 접시라도 가져와.”
리파는 여태까지 지은 적 없던 미소를 띠고 찻장에 가서 접시를 꺼내온다.
석굴 필드에 철 광맥이나 귀금속, 어쩌면 게임 세상이니 미스랄 같은 것들을 넣는 게 나을까 생각하던 도중에 습격한 리파에게 당했다.
이건 조금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리파가 가져온 접시 위에 손을 내밀었다.
“후……”
아직 회복기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며 시간의 정수를 낸다.
이전보다 훨씬 잘 나오지만, 어느 정도 주고는 끊을 생각이다.
“주인, 이거밖에 안 줘?”
“기다려 보라니까! 나 아직 회복기야!”
“……. 그래, 기다릴게.”
쿨한 리파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가운데, 나는 접시를 전부 채우고 손을 뗐다.
세피아 색 액체가 접시에 가득하다. 아니, 인제 보니 접시가 아니라 대야였다.
페트병 두 개쯤은 내지 않았을까? 시엘을 소환했던 양과 같다.
“감사해, 주인.”
리파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리고 내가 낸 시간의 정수를 들이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