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미안해
* * *
믿지 않으셨다.
내가 말을 해도, 부모님도 이천화 가주님도. 믿지 않으셨다.
지금은 그저. 허탈할 뿐.
아린이의 평판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그토록 오랜시간 동안 나를 도와주고, 항상 곁에 붙어 있고... 사랑이란 사랑은 전부 내 입에 쑤셔 넣어 숨조차 쉬지 못 할 정도로 받아서 그런가. 전부 믿지 않는 눈치다. 되려, 내가 역으로 의심을 받았다.
둘이 싸운 거 아니야? 왜 아린이를 탓 해?
아니다. 전부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미친년한테 잡혀서. 강제로 남친이 되고. 묶여 있을 뿐이다.
본래는 사랑했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아린이를 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사랑으로 '두근'이 아닌.
공포로 '두근'이다.
"하아..."
나는.
아린이의 '전용남친'이 되었다.
변화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취향대로. 계속 '약한남자'로 있을 뿐.
그 이후로 다른 학생들이 내게 다가왔다. 말은... 똑같았다. 너는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고. 조심하라고.
최후도 똑같았다.
전부. 모두. 빠짐없이.
실종.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범인은. 여친.
이아린.
살아생전 여친에게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그 어떤 상황보다. 압도적으로.
무섭다.
"하아... 하아..."
나는... 아린이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 내가 이 지경이 된 이유도. 아린이가 남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붙잡고 싶은 이유도. 전부 알고 있다.
사랑.
전부 '사랑'때문이다.
이건... 그냥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농도가 짙은. 눅진눅진하고 밀도높은. 기분 나쁜 사랑.
집착이다.
아주아주 무거운... 집착.
아린이의 곁에 있으면, 새장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잡혀서 사육당하는 듯한 기분.
가끔이지만. 아린이가 나를 볼 때면... 눈에서 빛이 사라질 때가 있다.
여자가 내 곁에 다가오면, 쥐고 있는 손이 아릴 정도로 아파오고. 팔짱을 끼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강제로 키스한다.
내가 원한다면 전부 가져와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적어도 여자가 아니라면. 같이 좋아해 주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을 속삭여주고. 어쩔 때는 하루 종일 곁에 붙어서, 꼭 껴안아 주고. 일어나면 아침밥에 끝에는 저녁밥까지 해주며...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 어떤일이 있어도 달려나와주고. 우산이 없으면 비가와도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가 사주며.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랑과 관련이 없는 수준에서.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분에 넘칠만큼 미친 듯이. 사랑을 쏟아붓는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자신이 그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자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바로 달려온다. 내가 다치면...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울고. 몸이 나을 때까지, 곁에 있어 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사랑. 그런데도... 나는.
답답하다. 숨이 막힌다. 미쳐 버릴 것 같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의지.
절대로 나갈 수 없는.
새장.
독수리 한 마리가. 새장에 갇혀 있다.
두 날개가 꺾인 채. 참새가 되기를 강요받고 있다.
벗어나고 싶다.
오직 그 생각뿐.
나는 이런 사랑을 바란적이 없다. 이런 진득진득한 '집착'을 바란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랑을 원했다.
평범하게 데이트하고. 평범하게 놀고. 평범하게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 무엇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끌려다닐 뿐.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아닌. 내가 받기만 하는 일방적인 사랑.
내가 지켜 주는 게 아닌. 지킴받는 사랑.
'영원히'지킴받는 사랑.
그녀에게서 벗어나야만 한다.
벗어나고 진짜로, 내가 원하는 사랑을 찾자. 새로운 인연을 찾자.
'평범'하게 나를 사랑해 줄 여자를.
찾자.
머리가 아프다.
방에 누워, 창문을 바라본다. 달빛에 비치는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하아..."
눈이.
감긴다.
*
*
*
목표는.
여친을 내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일부러 실수하고, 사과를 안 하거나. 아예 물리적으로 멀어지거나. 답장을 안 하거나.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하거나. 손을 잡으면 일부러 놓는다거나...
그토록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아린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불편해하는 걸 아는지. 곁에 있는 시간이 줄었다는 게 유일한 소득이다.
이건 내가 짊어져야 할 문제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져가야 할 문제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면. 내가 해결할 뿐.
우리는 '평생'슬럼프가 온 연인이다.
내가 그렇게 정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고. 얼음처럼 단단한, 이아린의 마음에 틈이 생긴다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남자 하나쯤은... 분명 있을 터.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이 '집착'의 방향을.
다른 남자에게.
돌려야만 한다.
반드시.
*
*
*
아카데미.
내 여친도 아카데미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반대하려고 했지만. 마음을 접었다.
피할 수 없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적어도 한석가의 일원이라면. 아카데미는 무조건 졸업해야 한다.
이미 '아카데미 무용론'이니 '기사 무용론'이니 인식이 최하를 달리고 있는 마당에... 이것도 전통이랍시고. 강제가 되고 있다.
결국 같이.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보다 멀리, 이아린에게서 멀어지려고. 친구를 만들고 온갖 짓거리를 다 했는데. 멀어지면 멀어질지언정. 내게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사랑이 식어도. 그 잔불이 남아 있다.
아니, 식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카데미만 끝나면 계속 내 곁에 붙어 있으니까.
그러던 때였다.
언제나 같이하던 하교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여친이 나를 보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슬픈 얼굴로 나를 안아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붉게 얼굴을 물들인다.
그때.
아직도. 생생하다.
'의외네, 중고보지라서 덜 뻑뻑할 줄 알았는데...'
그 목소리.
'고마워, 남친 자지가 이 정도라서. 새것이나 다름이 없네?'
김태호.
그 섹스를 숨어서. 여친과 본 이후로.
이아린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아주 조금이지만. 내게서 멀어지는 걸 느낀다.
처음으로 경험한.
숨이 트이는 기분.
나는 거기서. 확신했다.
약간이지만.
'틈'이 생겼다.
얼음이 깨지기 시작한다.
새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아린이 슬퍼하며 나를 안아줄때.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부디 깨달아주길.
그건 '사랑'이다.
기대가 하늘을 찌른다.
그녀가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다는. 기대가.
가슴을.
가득 채운다.
*
*
*
아카데미의 뒷뜰.
화단.
보고야 말았다.
내 여친이... 김태호에게 '공주님 안기'를 당하고 있었다.
앞으로 곧이다.
곧 있으면. 여친이 내 곁을 떠나간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여친은 지금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하고 있다.
"...후우."
슬슬 마음의 준비하는게 좋겠다.
때가 되면. 전부 마음이 떠나가면.
헤어지자고 할 거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거다.
씰룩씰룩하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흐흐."
표정이 서서히 밝아진다. 앞으로 조금이다!
집착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때가. 다가오고야 말았다.
아아. 김태호. 태호야.
조금 힘들 거다.
내 여친은... 집착이, 그 사랑이. 너무나도 무거우니까.
힘든 시간이 될 거다.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내가 당했던. 그 모든 사랑이.
전부.
김태호.
너에게로.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새장의 문이 삐꺽거린다. 날개를 접는다. 이제, 날아오를 준비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
복도를 제대로 걸을 수 없다. 흥분에 다리가 비틀거린다.
그러다 툭. 누가 내 어깨를 잡는다.
"저기..."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김태호가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옅게 웃는다.
표정을 보니...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살짝이지만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꾹꾹 눌러 담아 참는다.
"중요한 사실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김태호가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내 여친이 다른 남자랑 놀고 있다 따위의 말을 하겠지. 표정만 봐도 안다.
"무슨... 사실이요?"
모르는 척한다.
서로 눈을 마주친다. 빨리 말해줘. 조금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 김태호는 지금... 엄청 진지하다. 나는 조금도 진지하지 않은데.
되려. 기뻐지고 있다.
"최근 누가 이아린이 누군가랑 붙어 다니는 걸 봐서..."
역시.
"아. 그거요?"
서로 눈을 마주친다.
"당신이랑 많이 붙어 다니는 게 걱정돼서. 남친인 저한테 찾아온 건가요?"
예상대로다.
역시 외모만 바뀌었을 뿐이지. 사람 자체가 착하다. 진짜 쓰레기라면 무시하고 말 텐데. 저 눈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이다. 자꾸만 고양감이 올라온다. 웃음이 횡격막을 친다. 필사적으로 참는다.
"네... 솔직히 걱정됩니다. 바람은 절대 아닌데. 역시 남친이"
"괜찮아요."
괜찮다.
"그, 어, 뭐라고요?"
김태호가 당황하며, 눈을 마주친다.
다시 말해 주마.
"괜찮다고요."
나는. 진짜. 엄청.
괜찮다.
너무 괜찮아서 미칠 지경이다!
"걱정... 안 되세요?"
김태호의 눈이 살짝이지만 떨린다.
"전혀요."
전혀.
조금도 걱정 안 된다.
"솔직히."
"상관없어요."
상관없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려는걸 필사적으로 막는다.
안 된다. 여기서 웃기라도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다. 아니, 지금도 이상한 사람인가? 아니다. 이아린의 곁에 있으면 누구나 이렇게 된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조금도.
"...네?"
김태호가. 벙찐 표정을 짓는다.
"저는 이아린이 다른 남자랑 놀건, 어디 놀이동산을 가건, 팔짱을 끼건, 서로 키스를 하건. 신경 안 써요."
진심이다.
되려 원하고 있다!
제발... 제발 바람을 펴주기를 신에게 기도하며.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뤄줬다.
신경을 쓰냐고?
관심이 없냐고?
둘 다 없다!
전혀.
조금도!
"그, 이상한데... 그, 어... 그래도 여친..."
"여친이죠."
여친은 여친이다.
'명목상'여친일 뿐이다.
"근데,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 걱정은 하지 마. 태호야.
김태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복도를 걸어간다.
복도에 끝에 도착한 나는 결국.
"푸흐... 흐... 흣... 흐흐흐..."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태호야.
괴로울 거야.
많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