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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먹히는 순애 금태양-94화 (94/319)

〈 94화 〉 단 한방

* * *

시야는 떨리고, 다리는 후들후들. 온몸은 너덜너덜해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눈앞의 마물이 두 세 개로 나누어져 보인다. 이미 지쳐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태.

한기에 으슬으슬 몸이 떨린다.

"소리 듣고 바로 날라왔는데... 만신창이네."

"하아... 하아..."

"걱정하지 마 태호야. 적어도 기사 한 명 몫은 해낼 테니까."

이아린이 이를 악물고 마물을 노려본다. 양손에 창을 만들며, 사방에 예티들을 소환한다. 수십 수백의 예티들이 사방에서 솟아오른다.

이아린이 빙룡에서 내려와 마물과 대치한다. 나도 서둘러 주먹을 들어 만신창이에 자상이 가득한 몸을 이끈다.

살짝 얼어붙어 성에가 낀 마물이 칼날을 내 쪽으로 겨눈다. 나름 죽기 살기로 피해를 줬는데... 아직 쌩쌩한 걸 보니. 진정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게 어떤 마물인지 여실히 깨닫는다.

"...지금까지 이 녀석이랑 혼자 싸우고 있던 거야?"

이아린이 당황한다.

"척 봐도 미친 듯이 강해 보이는데..."

인간형 마물.

초고위험과 고위험 그 사이 어딘가. 현재 내 역량으로는 부족한 적이, 살기를 가득 머금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슬쩍 이아린을 바라보니. 이미 얼음 갑주로 중무장한 상태.

잠깐의 대치. 서로 눈이 마주치자.

이아린과 마물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순식간에 주변이 얼음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 찬다. 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초능력을 섞어 쓰면서 마물을 전방위로 압박한다.

"아... 으아, 아, 아아..."

"잠깐, 이거... 태호 네 체술 아니... 읏!?"

마물이 칼을 창처럼 다루며 이아린을 반대로 압박한다. 카각­ 카가각­ 얼음 갈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고도로 응축된 한기가 마물을 향해 쏘아진다. 예티란 예티는 전부 달려들어 마물을 공격하지만 영 시원찮다. 눈 부스러지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운다.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아직 움직일 수 있으면, 나도 도와야 한다.

이아린 혼자로는 불가능하기에.

마물을 향해 달려든다. 곤죽이 된 주먹으로 마물을 가격한다. 흔들리는 둑이 쩌적­ 갈라진다.

"태, 태호야? 조금은 쉬는 게­"

"후우... 후우... 너 여기 올 때... 뉴스나 그런 거 봤어? 없지?"

바위처럼 무거운 몸을 최대한으로 움직이며 마물을 타격한다. 이미 손에 감각 따위는 없다. 부러진 늑골이 폐를 건드려 살짝 숨쉬기 힘들다.

"없어. 아예. 기사 하나 으엇!? 없어...!"

칼날이 이아린의 갑주를 스친다.

"하아... 하아... 마물이 지랄 맞은 EMP를 썼어. 외부신호는 전부 차단됐고. 그러니까. 하아... 하아... 최대한 둘이서 잡아놔야 해. 중간에 놓치기라도 하면... 전부 죽어."

마물을 향해 발차기로 하단을 가격한다. 다시 한번 한계에 봉착하자, 둑이 매섭게 흔들린다. 말을 하면서도 수십 수백 번 머릿속으로 되뇐다.

제발, 무너지라고. 둑이 갈라져, 폭발하라고.

쉼 없이 되뇐다.

"후우... 후우..."

"하아... 하아..."

매서운 한기가 계속해서 마물을 덮친다. 이미 망가진 얼음 창을 갖다 버리고 이아린이 전투도끼를 만들어 마물의 어깨를 찍는다.

"안, 들어가잖아...!"

도끼가 마물의 어깨에서 튕겨 나온다. 수십 번의 참격이 나와 이아린을 노린다. 이를 악물고 예기를 가득 머금은 칼날을 피한다. 동시에.

"카하...! 카학!"

마물의 주먹이 이아린의 얼굴에 박힌다. 이아린이 쓰러지기 직전 발을 이용해 다시 중심을 잡아주고, 사실상 쓸 수 없게 된 손을 내버려 둔 채. 마물을 향해 수십 번이고 계속 발차기를 날린다. 이미 마력은 바닥난 지 오래. 오직 신체 하나로 마물을 상대한다.

"으, 아아... 아..."

뼈 몇 마디가 부러졌는지 셀 수 없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도 알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마물뿐. 쉼 없이 발차기를 날린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와 마물을 번갈아 본다. 다리로는 역부족이구나. 다시 주먹을 쥔다.

자신을 불태우는 연격. 화염 아닌 피로 새빨갛게 물든 주먹이 마물을 때린다.

"아, 으아, 아아..."

될 수 있는 체술은 전부 섞어 쓰며 마물을 압박한다. 이아린도 가세해 얼음 갑주로 둘러싸인 주먹을 마물에 처박는다. 마물이 맞는 듯 안 맞으며 중간중간 주먹을 피한다.

"제발, 좀, 뒤지라고!"

이아린이 악바리를 쓰며 마물을 향해 달려들지만. 이래도 역부족인지, 되려 우리 둘이 밀리고 있다. 끝을 모르는 성장.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야 한다.

이대로는 죽는다.

마물이 칼날을 순식간에 주먹을 바꾼 다음. 우리 둘을 향해 수백 수천 번의 연격을 날린다. 가까스로 몸을 굴려 마물의 주먹을 피한다. 그러나.

"끄흑, 극!?"

이아린이 마물의 연격을 전부 맞으며 저 뒤로 날아간다. 마물과 시선이 마주친다. 일렁이는 안광.

"크아, 으, 흐아!"

마물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와 수백 수천 번의 연격을 날린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마물의 주먹을 피한다. 빠르다. 미친 듯이 빠르다. 주먹이 이마, 목, 옆구리, 팔, 다리를 스치며 나를 압박한다.

"아아, 으, 아, 아아..."

마물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속도를 빨리한다. 단순 권격만이 아닌 다리를 섞어 쓰며 순식간에 나를 궁지로 몬다. 피 섞인 땀이 이마에서 흐른다. 가속마법이고 강화마법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미 바닥까지 긁어 쓴 이상 마력 같은 게 남아있을 리 없기에.

남은 건 오직 몸과 오기.

이 괴물을 죽여버리겠다는 집념뿐.

삐걱거리는 몸을 최대한 움직여 마물의 연격을 피한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머릿속으로 되뇐다. 죽기 직전 넘어가는 숨을 들이마시고. 끝없이 생각한다.

둑아, 무너져라.

무너져라.

무너져라.

"제발...!"

무너져라.

마물의 주먹이 코끝을 스친다. 두 번째로 날라온 주먹을 차마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복부에 직격당한다.

"크억...!"

새빨간 피를 바닥에 토하며 저 멀리 날아간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새까매. 그 무엇하나. 보이지 않는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게 아닌, 걸어 다니는 산송장. 거죽을 뒤집어쓴 시체.

죽음.

땅과 강 사이.

뱃사공이 나를 바라본다.

"...흐어억­!"

쩌적­

벽이 무너지는 소리에 두 눈을 번뜩 뜬다. 부서지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쓰러지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둑이 터진다.

지반을 가득 삼킬 만큼 압도적인 유량이 가슴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을 뒤덮는다.

온몸의 힘이 강제로 되돌아오는 걸 느낀다.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수해??가 손끝, 발끝에 전해진다.

내 머리 위로 스멀스멀 증기가 피어오른다. 주체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하아... 하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물을 바라본다.

"아... 아아... 아..."

마물이 당황에 나를 바라보면서, 뒷걸음질을 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단 한방.

다리에 힘을, 허리에 힘을, 가슴에 힘을, 어깨에 힘을.

그리고.

주먹에, 힘을.

단 한 번의 권격.

"아."

구름이 갈라진다.

단말마를 끝으로 마물의 몸이 터지며 상체가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간다. 오직 단 한방. 주변 외벽이 폭풍에 휘말려 뜯겨 나가고 이후 몰려오는 후폭풍에 돌과 먼지가 쓸려나간다.

남은 건 오직, 마물의 하체뿐. 그마저도 시들어. 죽어버린다.

"태, 태호야...!"

이아린이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바라본다.

그저, 단 한방.

한방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겼다. 그저 버티는 것이 아닌. 내 주먹. 내 힘으로.

"하아... 하아..."

긴장이 풀리자마자.

시야가 급속도로 좁아진다.

이미, 체력은 방전.

풀리는 힘에 자리에서 쓰러진다. 그러다, 마물의 신체 안에서.

회백색 점토를 발견한다.

급격하게 좁아지는 시야에, 그만.

두 눈을 감는다.

*

*

*

감겼던 눈꺼풀이 서서히 떠진다. 새하얀 조명에 두 눈을 찡그린다. 귓가가 이명으로 가득하다.

몸을 일으키니. 본디 무겁다 못해 아예 굳어있어야 할 몸이. 멀쩡히 움직인다. 귓가를 괴롭히던 이명이 서서히 걷히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다.

병원.

그리고 흐느끼는 소리.

아래를 바라보니, 동생과 엄마가 눈물을 훌쩍이며 나를 바라본다.

"흐읏, 흐으... 긋, 깨, 깼다!"

동생의 눈물로 점철된 얼굴이 코앞 까지 다가온다.

"태호야, 괜찮아?! 엄마 보이지?!"

"흐으... 읏, 오빠..."

"으, 어..."

"태호야. 일단, 응? 너무 크게 움직이지 마? 엄마 걱정되잖아..."

엄마가 내 어깨를 붙잡고 나를 강제로 다시 눕힌다. 몽롱하던 시야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온다.

"흐읏, 흐으... 오빠. 갑자기 연락도 안 되고...!"

동생이 나를 꼬옥 껴안고 소리높여 운다. 나는 괜찮다고 등을 토닥이니. 겨우겨우 곁에서 떨어진다. 맞다, 그러고 보니...

"돈은...?"

"아, 그게... 예린언니가 병원비는 전부 내줬어..."

"뭐?"

예린언니?

"언니?"

"으응... 자기는 아무것도 못 해서 미안하다며, 그냥 일시불로..."

"아... 얼마 정도 나왔는데?"

동생이 귓가로 다가가 속삭인다.

"...뭐?"

그 정도로 많이 냈다고?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아린은?"

"아린언니는 오빠가 못 움직이니까... 업은 다음 빙룡타고 여기까지 날라왔어."

"날라왔다고?"

"응. 그리고 곁에서 오빠 좀 보고 있다가... 나랑 엄마 오니까 인사하고 바로 나갔어."

"나연아."

"응? 왜 오빠?"

"오늘이 며칠이지?"

"...10월 18일이야. 오빠."

"뭐?"

이상하다.

그 정도로 몸이 만신창이가 됐는데, 고작 하루 지나서 멀쩡히 나았다고?

"오빠도 조금 당황스러울 거야. 그게 사실... 설아언니가 오빠를 찾아왔어."

동생과 시선이 마주친다.

"울면서 마법으로 고쳐줬다고... 들었어. 그래서 이렇게 일찍 나은 거야."

"뭐?"

"잘못했다고 끝없이 되뇌이면서, 어떻게든 고쳤다고 하는데... 으읏. 설아언니가 왜 도망친 거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나도 의문이다. 내 둘도 없는 친구인데... 플래시백처럼 어제의 일이 스쳐 지나간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흠칫흠칫 떠는 어깨. 양팔로 얼굴을 가린 채 덜덜 몸을 떠는 모습.

평소의 설아와는 확연히 다르다. 흥분과 공포가 이리저리 섞인 모습.

...공포?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도망쳤었지? 그때는 저위험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비슷했는데... 아니.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제아무리 설아가 마물을 무서워한다고 해도 이처럼 목숨이 걸린 일에서까지 도망칠 리는 없으니, 2개월 이상 설아 곁에 있던 사람으로서. 설아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절대로.

한예린 앞에서도 일갈할 정도로 심지 곧은 사람이, 마물 앞에서 도망친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싸우는 중간에도 오지 않고, 친구가 위험에 빠진 걸 애써 무시할 정도로 커다란 '무언가'가 있다는 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설아가 병원에와서... 아예 내 몸을 고쳐줄 정도로 내게 친구로서 관심이 있는데, 도망친다는 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도망친 걸 알고 있어?"

동생을 바라본다.

"응.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 없을걸?"

"...응?"

동생이 리모컨을 잡고 벽에 걸린 티비를 튼다.

팻말을 짊어진 시위대가 광화문 앞에 집결해있다.

[우리는 공정을 원한다! 지위가 아닌! 실력으로! 기사를 뽑아라!!]

[기사 정신없는 기사는 한국에서 나가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김태호만큼만 해라!!]

[아카데미는 각성하라! 아카데미는 각성하라! 아카데미는 각성하라!]

두 눈이 번뜩 뜨인다.

이전보다 수백, 아니. 수천 배로 불어난 시위대가 아카데미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다들 분노로 가득 차 사방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아."

심지가 전부 타들어 가다 못해, 결국.

대한민국이.

폭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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