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먹히는 순애 금태양-103화 (103/319)

〈 103화 〉 융합

* * *

마물이 서로 합쳐져, 하나가 되려고 하는 성장욕. 일각에서는 마물의 이러한 행동을 '불나방' 같다고 평한다.

융합될 때, 마석이 약한 쪽은 의식이 소멸하니까.

보다 마석이 강한 쪽이 '의식'의 주도권을 잡고. 다른 마물들과 합쳐지며 힘을 키운다. 이것이 '융합'의 기초다. 흡수되는 쪽은, 저항하나 하지 못하고. 설령 의식이 있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으니. 진정한 의미의 불나방이다.

나는... 이 '융합'을 그다지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다.

마석이 강하니까. 마물들은 마석이 강하건 약하건, 일단 합쳐지고 본다. 나도 마물로서 이런 감각을­ 평생토록 느끼며 산다. 길가다가 마물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합쳐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도, 살아생전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은 없다.

그때 그 회백색 살점을 제외하면.

나머지 마물들은 전부 나보다 마석이 약하니. 만날때마다 그저 조금 합쳐진다는데 거부감을 느낄 뿐이지, 그 이상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언제나 자그마한 불안감이 나를 따라다닌다.

"...만약."

나보다 강한 마석을 가진 마물이. 나와 합쳐지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

*

9월 29일.

저녁.

보도블록을 따라 두 사람이 빌라촌으로 향한다.

나는, 평소대로 행동했다.

이미 임자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찢어졌지만, 태호를 잃고 싶지 않기에 평소처럼 다가갔다. 태호는 한예린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보다도 나와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했다. 정성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나를 챙겨줬다.

"하아..."

적어도 나를 '최우선'한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씰룩쌜룩 올라갔지만. 이성으로서의 최우선이 아닌, 친구로서의 최우선이라는걸 재차 깨달은 뒤로는. 그런 감정도 희미해졌다.

그래도, 행복하다.

계속 태호 곁에 있으니까. 태호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부족하다.

좀 더 사랑을 느끼고 싶은데, 태호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을 텐데. 태호 곁에 '여친'으로 있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와 내 가슴을 잠식한다.

태호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하는데.

여친의 이름도 알았다. 유서하. 지금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으며, 오래전부터 태호랑 연인이었다고.

오래전부터.

"흐으..."

가슴이 아프다.

내가 아빠에게 거둬지고 의식을 갖추기 한참 전부터 이미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혼신을 다해서 마도의 끝에 닿고, 이론상이지만 시간을 돌릴 만큼 강한 마법식을 만든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시간을 돌려 네 곁으로 다가가도, 그저 죽임당할 뿐. 나는, 마물이니까.

펜리르와 똑같은. 마물이니까.

중간에 일이 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며 가장 가까이 지내던, 옆자리 친구. 아린이가 공식 석상에 서서 '진실'을 밝혔다.

자신이 한석호를 가스라이팅 했으며, 그게 사이가 틀어진 이유라고. 그러니까, 한석호를 향한 비난을 거둬달라고. 온 국민, 아니 온 나라가 보는 앞에서 진실을 고했다. 결과, 아린이는 순식간에 절벽 끝으로 몰렸으며... 결국,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기사가 올라왔다.

"조금만 더 가면돼에..."

"응... 고, 고마워 설아야..."

뒤를 살짝 흘겨본다. 아린이가 천천히, 나를 따라오고 있다.

순수하게 도와주고 싶었다.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아카데미에 있을 때 처음 다가온 친구였고, 앞으로도 친구일 테니. 내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잃는 건 사랑 하나로 충분하니까.

아린이가 고통받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부탁했다. 아빠는, 이것이 기회라고 말씀하셨다.

커넥션.

이제가라는 거대한 가문에 우리 사이의 연결이 생기면, 차후 내가 마물이라는걸 들켰을시.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 아린이를 우리 집에 들이기로 했다. 여론전에 능숙한 건 둘째치고, 이천화 가주가 외부에서도 유명한 딸바보라는 게 한 몫했다.

내가 마물 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도와줬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반색할 것이 뻔하다고 하니. 찜찜하지만, 알겠다고 했다.

나를 위해 친구를 이용한다.

이것이 아빠가 원하는 큰 그림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전부 나를 위한 조치지만. 찜찜한 감정을 지울 수는 없다. 결국, 이용하는 거니까. 나중에 사실을 알고 실망하지 않을지, 걱정됐다.

집 앞에 도착한다.

그래서... 약속으로.

"아... 여기야아..."

손가락으로 빌라 단지를 가리킨다. 정문으로 들어가기 직전, 멈춘다.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빠한테도 다 설명해 놨으니 걱정하지 마아..."

"아린아아..."

"내가 '이유'가 있다고 했지이?"

"어, 응..."

"그냥, 이거 하나만 해주면 돼에..."

약속.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약속.

고개를 돌려 아린이를 바라본다.

"그냥... 그, 내 '절친'이 되어줘어..."

"으, 으응?"

"나, 친구가 좀 적거드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배시시 웃는다. 이용해서... 미안해. 나중에 진실을 알아도. 나를 버리지 말아줘.

"이, 일단 들어가자아..."

아린이의 손목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간다.

*

*

*

10월 1일.

점심시간.

'으으읏... 지, 진짜 미치겠어어...!'

여친이 있는걸 알고, 최대한 태호에게 '이성'적으로 다가가지 않겠다며, 친구로만 남겠다고 다짐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 정말 미칠 노릇이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나는 태호를 사랑하니까. 초연해지려고 해도 온몸이 거부한다. 평소대로 지내겠다고 했는데, 내 마음은 그 이상을 원한다.

마물 입장에서 성적으로 함락당하고.

인간 입장에서 사랑으로 함락당했는데 어떻게 버티냐고!

남은 방법은 태호 곁을 떠나, 아예 잊는 것. 절대 안 된다. 그것만큼은 안된다. 이미 태호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돼버렸는데. 불가능하다.

그득그득 가슴에 욕망이 들어차 버티기 힘들다. 그저 태호 곁에 있는 것 하나로 만족하고 살려고 했는데. 자꾸만 그 '욕심'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어...?"

태호에게 다가가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그 결과, 또. 태호 옆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여는 게 일상이 됐으니. 어쩔 수 없다.

"도시락?"

"으응, 아린이랑 같이 만들었어어..."

아린이랑 같이 만들었다. 아린이가 집안일을 자주 도와주려고 하는데, 아빠가 이제가를 의식해서 그런지 일을 전부 빼앗는다. 불쌍해 보여, 아무 일이라도 주는 게 좋겠다 싶어. 같이 도시락을 만들었다.

"떡이 좀 많네?"

"응... 나 떡 엄청 좋아하니까아..."

식감이 쫄깃하니, 이것만큼 맛있는 게 없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와 태호를 감싼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고있어도, 멈추지 않는다.

꼭... 꿈같다. 여친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계속 곁에 있으니.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이아린은?"

"옥상에서 쉬고 있어어..."

"음..."

아린이를 우리집에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따로 이천화 가주가 우리 아빠를 찾아왔다. 진심으로 고맙다고 허리를 숙이는 걸 보자마자, 아빠가 내게 공로를 넘겼다. 우리 집으로 데려온 건 전부 우리 딸 덕분이라고. 딸이 먼저 말해서 도와줄 수 있었다고.

그토록 부담스러운 눈은... 난생 처음 봤다.

대화가 끝나고, 나중에 혹여 도움 줄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달라며 아빠끼리 서로 전화번호까지 교환했다.

"오늘도 빵이야아?"

태호의 손을 바라본다. 또 단팥빵이다.

"응."

"빵만 먹으면 건강 안좋은데에..."

태호를 걱정스럽게 처다본다. 도와주고 싶다는 감정과 사랑이 얽히고설켜 공명한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계속해서 사랑을 원한다. 그렇다면. 네게 사랑을 받을 수 없다면.

내가 사랑을 주면 되지 않나?

볼이 살짝 붉어진다. 모르겠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태호가 빵을 자기 입에 쑤셔 넣는다.

"흐흠, 음, 태호야아..."

"응음?"

"내 도시락... 같이 먹을래에?"

입이 저절로 열린다. 가, 같이 먹고 싶다! 태호랑 같이 도시락을... 나눠 먹고 싶다. 내가 만든, 아니, 아린이랑 같이 만든 도시락을 먹여주고 싶다. 태호가 건강했으면 하니까. 같이... 아니.

내가.

먹여주고 싶다.

"응어, 읍, 후우... 뭐?"

태호가 당황한다. 그, 그렇지? 당황하는 게 당연하지?

"아니, 그 으음... 태호야 우리 '친구'잖아아... 같이 먹어도 그으... 으으으...!"

태호가 나를 바라본다. 내 얼굴이 새빨개져, 열이 팍팍 올라온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온몸을 엄습한다. 발을 동동 굴리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는다.

"괜찮아."

두 눈이 번뜩 뜨인다.

"으으, 읏, 괘, 괜찮아아?"

지, 진짜 괜찮은 건가? 내가... 먹여줘도 괜찮은 건가?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심장박동에 손이 떨린다. 여, 여친 있는데...! 이런 짓 해도 괜찮은거야...?! 허둥지둥 젓가락으로 떡볶이 하나를 집는다.

"그, 그그, 그러엄... 으, 으음..."

먹여, 내, 내가... 먹여주면...!

"으음, 으, 으으... 내가, 그, 먹, 으으으... 흐으!"

"뭐?"

"그, 흐음, 으, 아, 아니야아!"

'여, 역시 안될 거 같아아...!'

"미, 미아내에, 나, 먼저 갈게에?"

덜덜 떨리는 손. 떡볶이가 바닥에 떨어진다. 시야가 빛으로 휩싸인다. 절제하지 못했다. 여, 여친도 있는데...! 욕심에 사로잡혀 남친이랑 할법한 행동을 태호에게 했다! 남친도 아닌데!

'태, 태호가 싫어하면 어떡하지이...?'

부끄럽다.

"어, 어?"

"읏, 여친도 있는데에...!"

"뭐라고?"

"아, 아니야아! 갈게!"

파앗­

집으로 도망친다. 바보 같은 짓을...!

"으으... 바, 바보야 바보, 바보야아...!"

어떻게든 부끄러움을 잊으려, 침대로 다이빙한다. 그대로 동동 발을 구르며 몸부림친다.

"왜, 왜에 그런 말을 한거야아...!!"

여친이 있는데 왜! 왜 그런말을...! 이, 이상하잖아아... 나, 나는 여친도 아닌데!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 이리저리 막 구른다.

"으, 으으으읏...!"

도저히 얼굴을 볼 낯이 없다.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 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진짜... 으읏, 바보야 바보야 바보...!

문자가 오지만, 애써 무시한다. 아니, 아예 전원을 끈다.

"흐으으..."

내, 내일 아카데미... 갈 수 있을까?

으으으...

*

*

*

가지 않았다.

여친있는 사람한테 그런 짓을 했으니, 부끄러워서 아카데미는커녕 방 밖으로도 안 나왔다. 아린이가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물어봐, 그냥 몸이 안 좋다고 얼버무렸다.

나중에 아카데미가, 은퇴기사 천수아 때문에 반파 당했고. 그걸 태호가 막아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몸은 괜찮은지 계속 전화로 물어봤다. 죄책감을 느끼며,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아..."

심부름하느라고, 마트에 갔을 때. 태호를 만났다. 그것도 여동생과 같이.

태호의 여동생과... 상상 이상으로 마음이 잘 맞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태호랑 통화했다. 일주일 뒤에 같이 놀이동산에서... 놀자고.

일부로 시간을 뒤로 밀었다. 성광그룹 회장 딸의 돌잔치 일이니까. 할인을 노렸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실패는 한 번으로 충분하니. 그저, 지금에 집중하려고 했다.

정신 나간 범퍼카 레이싱을 즐기고. 같이 햄버거를 먹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태호랑 단둘이서 오리배를 타고 있고. 또 정신을 차려보니 한예린과 게임장에서 놀고 있다.

'한예리인...'

급작스러운 침입이었다. 바로 태호 곁에 붙어­ 마법식을 만들었는데.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며 해볼 테면 해보라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게... 블랙카드?"

힐끗 태호를 본다. 블랙카드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 모습. 솔직히 나도 놀랐다. 블랙카드라고 말만 들어봤지. 실제로 경험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한예린이 나를 싫어하는 건 확실하다. 태호 곁에 다가가기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노려볼 뿐이지. 나를 괴롭히지 않아. 솔직히 당황스럽다.

'이게 필요하다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가져오고, 능글능글 웃으며 전부 도와준다. 되려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태호의 시선을 신경 써서 그러는 건가? 모르겠다.

"곧 있으면 퍼레이드도 하네요."

어느덧 오후 6시.

한예린이 태호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한예린을 노려보니, 뭐 어쩌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속을 벅벅 긁는다.

'오늘은... 둘이서만 놀 줄 알았는데에...!'

갑자기 한예린이 끼어드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나도 웃으며 태호를 바라본다. 한예린이 나를 노려본다. 혹시... 한예린도 태호를 좋아하는 건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한예린이 했던 말을 곱씹는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천천히 태호 곁에 붙는다.

"태호야. 저기 봐봐. 퍼레이드 시작한다아..."

한예린의 눈이 번뜩 뜨인다. 서, 설마... 진짜?

진짜 태호를 좋아하는 거야?

두 눈이 번뜩 뜨인다.

"오..."

"빨리 가죠. 강아지."

한예린과 동시에 태호의 팔목을 붙잡는다. 으읏, 태호를 개 취급하는 주제에…. 태호를 좋아한다고? 아니, 사랑한다고? 믿기지 않지만...

'으으...'

'으읏...'

분위기를 보아선 맞는 거 같다. 이를 악물고 태호 옆에 있는 한예린을 노려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스파크가 튄다.

태호는... 내껀데.

아니, 그, 여친이 있기는 하지만... 으으... 내, 내가 여친 다음인데!

한예린이 빼앗게 두지 않는다.

태호를 질질 앞으로 끌고 가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네가 뭔데 태호랑 팔짱을 껴?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건데...

'여, 여친을 제외하면...'

나만 할 수 있는 건데!

...암고양이 주제에.

"우와..."

태호가 감탄한다. 서둘러 표정을 풀고 정면을 바라본다. 길게 늘어진 행렬. 퍼레이드다. 사람 몇몇이 길가로 나와 퍼레이드를 찍고 있다. 그러다.

덜컹.

"응?"

"...으응?"

"음?"

셋이 동시에 아래를 내려다본다. 잠깐...

온몸의 세포가 공명한다.

"...씨발!"

태호가 나와 한예린을 업고 자리에서 벗어난다. 시야가 급속도로 좁아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저 맨홀 아래에 숨어있는 '그것'밖에,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으엇, 엇, 가, 강아지!?"

"아... 아아..."

동시에.

쿠과가가강­!!

맨홀이 포탄처럼 하늘 위로 치솟는다.

"으, 아, 으으... 아... 아아..."

암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오직 마물뿐.

내 모든 신경, 의지, 생각, 자아가 저 '마물'에게로 집중된다. 아니, 정확히는­

"으아... 에, 으... 으아..."

몸속에 있는 '회백색 살점'에. 모든 의지를 빼앗긴다. 아아, 확신한다. 저 마물. 저 인간형 마물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융합.

"이, 이이, 인간형!?"

"인간형! 씨발 인간형이다! 누, 누가...!"

"도, 도망쳐 씨이발!!"

"으아... 아, 아아... 아..."

"기사, 기, 기사는 어디에...!"

"전화, 전, 왜 전화가 안 되는 거야...!"

비명이 뭉개져 들린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마법을 쓰려고 하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모든 의지가 저 마물을 죽이길 거부한다. 혼신을 다해도, 불가능. 살 아래 숨어있는 자지에 정신이 빼앗긴다. 공포와 흥분이 뒤섞여 그대로, 기절해버릴 거 같다.

이대로 있다가는, 융합 당한다. 전부 합쳐져, 저 마물에게 먹혀버린다.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이대로 먹히면, 자아의 리셋. 저 마물과 다름없어진다. 아니, 저 마물이 완벽히 형태를 잡아버리고, 그대로 모두가­ 죽어버린다.

극한의 공포.

"흐읏, 읏, 흐으... 흐읏, 으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양팔로 얼굴을 가리는 것 뿐. 그대로 정신이 빼앗길 거 같아. 온 힘을 다해 마물에게서 저항한다. 마물이, 이쪽을 바라본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명백히, 너무나도 명백히 나와의 융합을 바라고 있다.

나보다 강한 마석. 그러나, 불안정함. 먹히면, 그대로 끝.

마물과 시선이 마주친다.

아.

정신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버텨낸다. 온몸이 격렬히 원한다, 저 마물과 하나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합쳐져, 자아가 사라지기를. 한없이 원하고 있다. 압도적인 본능의 파도. 파도에 먹혀버린다.

내게 남은길은 오직 하나.

도망쳐야 한다. 공격도, 불가능.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먹혀버린다.

온몸에 빛이 몰려든다.

"흐읏, 읏...!"

파앗­!

빛 터지며.

풍경이 달라진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진다. 공명하던 세포가, 천천히 잦아든다.

"하아... 하아... 하아..."

그토록 강한 마물 앞에서, 도망쳐 버렸다. 사람들이 전부 죽을 위기에 처해있는데, 나만. 도망쳤다. 파도가 잦아들자, 또 다른 파도가 나를 덮친다. 그대로 땅바닥을 기며, 오열한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는데.

도망쳐 버렸다. 기사의 긍지도, 친구로서의 우정도. 전부 모두, 도망쳤다.

도망치고 도망쳐, 내게 남은 건 오직 절망.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아도, 멈추지 않는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 가슴을 쥐어짜도. 멈추지 않는다. 흐르고 흘러 눈물도 내게서 도망치는데,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눈물이 끝도 없이 나와, 멈추지 않아.

정신이 끝에 몰린다.

합쳐지면 모두가 죽는다. 그렇지만, 도망쳐도... 결과가.

아.

아아...

"흐으, 읏, 으으... 아아..."

돌아가도 공격하나 하지 못하고, 모든 의지가 박탈당한 채. 융합 당할 뿐.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

너는, 내게 희망을 줬는데.

나는, 네게 절망을 주는구나.

가슴이 찢어진다. 고통에 신음한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한다. 그래도, 그, 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핸드폰을 들어 전화한다. 먹통이다. 작동하나 되지 않는다. 다시, 절망. 이를 악물고 거리로 뛰쳐나가 동전하나 가지고 공중전화를 전전하며 현 상황을 기사에게 알린다. 경찰에게도 알린다.

돌아오는 대답은 '개소리 말라' 하나뿐. 그래도 계속 전화했다. 알겠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

조금이라도 힘이 되도록.

계속.

*

*

*

태호가 크게 다쳤다고.

온몸이 망가져, 위험하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달려갔다.

달려가서, 미안하다고. 그저, 미안하다고 말하며, 태호의 몸을 고쳐줬다. 그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

만신창이.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온몸이 걸레짝이다. 그래도,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 태호 곁에 남아 몸을 치료해줬다.

흐느끼며, 태호에게 미안하다고. 계속 말하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계속.

정신이 끝에 몰리고 돌아오고를 반복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몰리게 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좀먹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선, 한동안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오는 전화는 전부 받지 않고, 혼자 침대 구석에 몸을 만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태호가, 나를 싫어할 것이 분명하기에.

친구를 눈앞에 두고 도망친, 나를 혐오할 것이 분명하기에. 돌돌 몸을 만 채.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서, 설아야? 벌써 이틀째인데... 이, 이제 아카데미..."

아린이가 내 곁에 꼭 달라붙는다.

"미, 미안해... 미안..."

"아니아니아니 설아야! 아니, 괜찮다니까?! 도, 도망친 것도 전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아니야... 으읏, 흐, 미, 미안해에... 내가 잘못­"

"설아야! 서, 설아야 그거 알아? 태호가 너 보고 싶어 하는 거?"

"으, 으응...?"

'어, 어째서어...?'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는다.

"이거 봐봐! 태호가 보고 싶다잖아. 왜, 왜 도망쳤는지 그때 설명하면 되는 거 아니야?! 설아야 진짜 걱정돼서 그래... 힘든 일 있으면 의지해도 괜찮으니까... 응? 화 안 나니까...!"

아린이가 내게 핸드폰을 들이댄다. 문자기록. 태호와 아린이 둘이서 진짜 걱정되는 투로 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 왜 그러는거야아...? 나, 나 도망쳤는데에...!“

절친이 되자고 했는데.

절친 실격이잖아. 도망쳤는데...!

"도망쳤으니까 걱정되는 거야."

"읏, 으응...?"

"설아가 그 상황에서 도망칠 인물은 아니잖아? 근데 도망쳤으니까 걱정이 안될 리가 없지! 자, 설아야? 설아야!? 나를 봐. 진짜 실망했다면 이러겠어? 진짜... 진짜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고!"

"으읏..."

"태호랑 엄청 친하게 지냈잖아. 네가 태호랑 친하게 지낸 만큼, 태호도 너를 걱정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친구에게 말해줘. 백지장도 맞들면 났다고 하잖아?"

"..."

"그, 그러니까 설아야...? 조금 쉬고 있어? 진정되면... 꼭 돌아와 줘.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으니까..."

아린이가 곁에서 떨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간다.

'태, 태호가 나를 보고 싶다고...?'

또, 나를 걱정하고 있다고?

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는데, 화를 내지는 못할망정. 나를 걱정하고 있다고?

"대, 체..."

얼마나 착한... 거야.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친구를 걱정시킬 수는 없다. 태호랑 아린이 둘 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길은 하나.

진실을 고하는 것.

궁지에 몰인 정신을, 억지로 세우고.

마음을 다잡는다.

*

*

*

다가갈 수 없다.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태호가 보여도. 뒤에 숨어 발만 동동 구를 뿐 벤치에 앉아 한숨을 돌린다. 그러다.

"...설아야."

"흐읏!? 으, 태, 태호야아..."

태호가 다가온다. 바로 임계점을 찍는 죄책감에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미, 미안해... 읏, 그때 도망치면, 안됐는데... 흐으..."

"괜찮아."

"...으응?"

...괜찮다고?

'대, 대체 어디까지 착한거야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너는 괜찮아? 상태가 말이 아닌데..."

태호가 걱정한다. 그것도 진심 어리게.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진짜,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나를, 걱정하고 있다. 이토록 착한 사람을 반송장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손이 떨린다. 나를 탓하지 않는다.

오직, 걱정뿐.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나, 나는 괜찮아아... 태호야. 그, 신경 안 쓰는 거야...? 나, 도, 도망쳤는데에..."

"...괜찮아."

"...읏."

진심이다.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킨다.

나를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다잡는다. 아린이치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그것만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아빠와는... 이미 대화를 끝맞췄다. 괜찮다고. 말해도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태호야."

"응?"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이제 결심할 차례. 고개를 들어 태호와 시선을 마주친다.

"오늘 방과후... 혹시 시간 돼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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