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작당모의
* * *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언니? 그동안 웬만한 건 다 해봤잖아."
이아린이 한숨을 쉬며 언니를 흘겨본다.
"이제는 심화해서 들어가야지. 너희들, 태호가 뭐 좋아하고 있는지는 다 알고 있지?"
이소천이 풀밭에 앉아 노을을 바라본다.
다들 태호에 대해서는 통달해 있다.
"잘 알고 있어어... 태호에 대해서는."
예컨대, 운동이라거나. 은근히 동물을 좋아한다거나. 색으로는 은색을 좋아하고, 쓰다듬는 걸 좋아하고, 음식으로는 닭가슴살 같은 단백질류, 그러면서도 매번 아침 샐러드를 챙겨 먹을 정도로 건강에 적극적이고, 손재주는 그닥 별로인지 가끔 물건을 부서트리며, 게임은 별로 안 하고... 대신 만화를 즐겨본다거나...
"그것 외에도..."
펜리르에 집착하고, 게이트가 열리기 전 고전 영화를 좋아하며, 매일 아침 구보 뛰는 걸 좋아하고, 총화기류보다는 냉병기류를 더 선호하고, 은근히 모르는 게 있으면 알려주려고 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주려 하고, 가족과의 사이는 각별하며,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고, 그런데도 여친만큼은 버리지 않을 정도로 각별하고...
"여친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없어?"
여친에 대해 알아야 한다. 태호는 여친을 가장 사랑하니까, 벤치마킹이라도 하면...
"저..."
한예린이 손을 든다.
"유서하에 대한 건, 웬만큼 다 알고 있어요..."
시선이 모조리 한예린에 집중된다.
"뭐? 네가 어떻게... 아."
모두 깨달은 듯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그래, 모를 리가 없겠지. 툭만하면 여친을 죽인다고 지랄 방정을 떨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이게, 유서하에요."
한예린이 핸드폰을 들이밀자 모두의 시선이 꽂힌다.
"우와... 생각보다 글래머네."
"머릿결 엄청 좋아보여어..."
"나보다 예쁘잖아..."
"가슴도, 저랑 비슷해요..."
상상 이상으로 예쁘다. 태호가 어째서 여친을 좋아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여자가 봐도 빠져들 정도로 예쁘니까. 매력적인 외양에 다들 약간 주눅이 든다.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내가 더..."
물론, 아예 밀리는 건 아니다. 유서하가 종합적으로 100점이라면 여기 모인 넷은 기본 100점, 부분적으로 98점이니까. 조금 밀릴 뿐, 완벽에 한없이 가까운 게 이곳에 모인 넷이다.
그렇다면, 유서하의 어느 요소가 태호를 사로잡았는가?
"...성격이야아."
답은 마음에 있다. 이런 시각자료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미 알고 있다. 서로 매력이 차고 넘친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완벽히 인지하고 있다. 어디를 가나 외모만큼은 칭찬 일색이었으니까. 하지만 태호는 넘어오지 않았다.
"나도 동감해."
이아린이 거든다. 그렇다면 남은건... 마음.
"한예린. 유서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어?"
이소천이 물어본다. 한예린이 '잠깐만요'라며 핸드폰 화면을 휙휙 넘긴다.
"여기에 다 적혀있으니 참고해보세요."
"으음..."
"음..."
몇 개월간 수집한 정보, 순전히 흥미 본위로 모으기 시작했지만. 필시 태호를 공략하는데 밑바탕이 되리. 기본적으로 착하고, 남친밖에 모르며, 남친이 원하는 건 전부 해주고, 현모양처에 사랑꾼, 학교에서도 남친이야기가 대부분에, 과거에는 행동 대부분을 남친한테 맞출 정도로 극한의 태호 바라기다.
"집착이 조금..."
우리를 못지 않게 강하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뭐든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성격. 남친이 누구 여자라도 만나면 이성 간의 관계발전이 명확해지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넷이 동시에 생각한다. 우리랑 딱히 다를 게 없잖아?
"이것 말고도 많아요."
태호와 비슷하게 일편단심인지 사용인이 유혹해도 전혀 넘어가지 않으며, 자꾸 다가가니 대놓고 윽박지를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그러면서도 남친의 선택을 존중해 웬만해서는 태클을 걸지 않으며, 태클을 걸 때는 백중 구십구 여자 문제와 연관되어있다. 남친을 극도로 아끼며,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응?"
"어?"
"아?"
다들 표정이 찡그려진다. 뭐? 돌아오려고 하고 있다고?
"만약 돌아온다면... 이거 어떻게 해? 막을 수 있어?"
다들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떨어져 있는데도 이 정도로 사랑이 강한데, 한국으로 돌아온다? 아니, 안된다.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영원히 태호와 멀어져 버린다.
"지금은... 귀국문제로 부모님과 싸우고 있다고?"
이아린이 또박또박 문서를 읽는다. 빠르면 이번 년 안으로 돌아올 수 있고, 느리면 졸업하고 나서 한국에 돌아온다. 다들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위험하다. 마음을 돌리기 전에 게임이 끝나버린다.
"이거, 어떻게 해에...?"
한설아가 불안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다리를 떨다가 한숨을 내쉰다.
"저도... 나름 노력하고 있어요."
"노력?"
"Null그룹은 하청이 많아요. 많은 수준이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있죠, 동아시아부터 시작해서 남미의 아르헨티나까지. 미국도 예외는 아니에요. 찾아보니... 캘리포니아에서 한국 법인으로 들어선 회사가 몇몇 있더라고요."
한예린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사명을 말한다. 도광컴피니.
"저도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죠. 이제 와서... 죽인다고 협박한다거나 그런 건 못해요. 태호가 괴로워 할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여친이 돌아온다면, 진짜 모든 게 끝날 거라는 걸 알기에 조금, 돈을 썼죠."
"돈을 썼다고?"
"네. 조금 힘을 썼죠. 유서하의 아버지는 '절대' 넘어오지 않을 거예요. 아니, 절대는 아니고... 그래도 딸바보는 딸바보인지라 아마 적정선에 타협을 볼 거에요. 아마 졸업하고 나서 1~2년 뒤에 오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저도 모르겠어요."
"시간이 충분할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것도 나름 최대한으로 시간을 번 건데, 사장이 생각보다 쥐새끼 같아서... 자기가 우위에 있다는 걸 감쪽같이 눈치채고는 판돈을 올리고 있어요. 저도 부모님께 들키면 안 되니까 사비로 하는 건데... 하아."
다들 직감한다. 지금 여친이 돌아오면 모든 게 끝이다. 유서하의 아버지가 딸바보라고? 어느 정도 때가 지나면 버티는 데 한계가 올 거고, 결국 귀국을 허락할 것이다.
그전까지 태호를 꼬셔야 한다.
"나도 도와줄게."
이아린이 끼어든다. 한예린이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어려울 거예요. 도광컴피니가 과거 이제가에 크게 데인 적이 있어서... 그 아티팩트 사건 기억나시죠? 중심에 도광이 있었거든요. 워낙 그때 이제가한테 피해를 많이 봐서 다가가면 바로 내칠 거에요. 그냥, 접근조차 안 하시는걸 추천드릴게요."
도광컴피니는 이제가 하면 치를 떨어요.
"나느은..."
"아쉽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저도 시간을 끄는 게 한계에요. 여기, 문서를 보시면... '졸업하고 나서 일주일 뒤에 올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잖아요. 이게 차악의 시나리오에요. 만약 이쪽 시나리오로 간다면 저도 장담 못 해요."
"만약, 여친이 온다면 강제로 떨어뜨릴 수 있어?"
이소천이 물어본다. 셋이 동시에 답한다.
"아니이..."
"하아... 아니."
"...아니요."
지금 태호를 보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랬다간 태호가 역정을 낼 테고, 모든 관계는 거기서 끝장날 테니까. 유서하가 한국에 오기라도 한다면, 꿀 떨어지는 커플을 꼼짝없이 구경하며 멀어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무것도 못 한 채.
모든 게 끝이다.
유서하가 한국에 돌아오면, 모든 게 끝난다.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끝난다.
"납치를... 할 수도 없고."
관계만 멀어질 뿐이다. 심지어 하수구 마물을 때려잡은 이후 스포트라이트가 끊이질 않으니, 시도라도 했다간 죽도 밥도 못 된다. 정말, 돌아온다면 모든 게 끝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합심해서 태호를 꼬시는 것뿐."
다들 이마를 맞댄다.
조금만 기다려 태호야.
우리한테 빠져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다들 투지를 불태운다.
*
*
*
수업시간.
"다들 188페이지 펴라. 어느 정도 '지성'이 있는 마물이라면 빠짐없이 말하는 엘레나. 오늘 소주제는 '엘레나'다."
교수님이 하는 말씀을 귀담아들으며 생각한다. 설아가 알려주는 '묶음마법'이 생각보다 어려워 밤낮을 설치고 공부하고 있는 참인데...
'진짜,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설아가 나름 쉽게 설명했다고 하는데, 느낌이 꼭 수학과 대학생이 초등학생한테 기하학을 알려주는 거 같다. 내가 멍청한 건 절대 아닌데, 아니, 연화를 염동력 하나로 이긴 마물을 어떻게 따라가냐고.
"이 '엘레나'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대표적인 이론을 보자면, 마물들에게 입력된 '기본값'이 아니냐는 의견이 지금 대세를 차지하고 있다. 그게 아니면 마물의 '모체'를 부르는 요컨대 '엄마' 같은 말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고. 인류마물 전쟁 개전 초기부터 쭉 있던 논쟁인데... 아직도 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간단한 역사 시간이다. 옆에 한예린을 보니, 이제 어느 정도 여론이 사그라들어서 그런지 안정된 모습이다.
"지금은 우주로 날아간 인간형 마물 '리플리쿠스'도 빠짐없이 엘레나를 입에 담았다. 어쩌면 마물이 '지성'을 갖추기 전 나타나는 중간기전이 아닌가 했지만, 강제로 지능을 줘본 결과 그냥 끝없이 엘레나만 주구장창 말해 아니라고 결론이 나왔다. 근데, 그러다가... 하수구 마물이 나왔지."
다들 190페이지를 펴라.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운다. '묶음마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끙끙 머리를 싸맨다. 이거, 이러다가... 색적실습에 써먹기는커녕 아무것도 못 하겠다.
"여기에 반대되는, '엘레나' 외에도 다른 말을 할 줄 아는 마물이 나왔다. 이전에도 나왔지만, 어째서 다른 말을 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기에 그 답이 있다. 집합체. 다른 말로는 회색 점토. 본래 마석 하나로는 단세포처럼 '엘레나'밖에 말할 줄 모르는 고깃덩이지만, 이 집합체가 있으면 우리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고 종국에는 인간이나 다름없게 변할 수 있다."
...집합체?
가만 생각해보니... 저번에 설아한테 강제로 교실에서 따먹힐 때, 흐릿한 빛 사이로 몸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순간 보았다.
온몸이 빠짐없이 회색빛. 고운 질감. 그때 봤던 회색 점토랑 다를 게 없다. 그럼... 설아는 온전히 '집합체'로만 이루어진 건가? 강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이 집합체를 찾는 데 혈안이다. 마물이랑 붙어먹으려는 성질은 둘째치고, 만약 마물이 이 집합체와 접합된다면 백중 구십구는 '인간형'마물이 되려고 하니까. 자, 보면 실제로 연구결과도 있다. 그것 외에도... 사실상 집합체는 마석이 뭉친 고분자 덩어리인지라 각국마다 만드는 '결전병기'에 요긴이 쓰이기도 하고. 그것 외에는 전방위적 '마물 탐지기'라거나, 마석답게 쓰는 곳이 무궁무진하다. 크흠. 자, 이제 페이지를 넘겨라."
곧 있으면 색적실습이 다가오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밥도 못쓴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참는다.
"초고위험 마물 '바그다'다. 같은 초고위험 마물인 펜리르랑 스바로지치와 함께 다니'던' 마물."
"아직도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대놓고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펜리르는 한국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게 확실시되지만. 이 바그다는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말 그대로 사라졌으니, 지금, 이 늑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교수님이 손목시계를 보곤, 말을 계속한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묶음마법을 어떻게든 완성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냥 평소대로 할까? 아니다. 그래도 이 마법만큼은 꼭 성공시키고 싶다. 심화에 첫발을 내딛는 거니까.
"일각에서는 게이트를 탄 게 아니냐 말하지만, 아닌 거로 결론이 났다. 아니면 순간이동을 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지만, 그때 대치했던 기사의 말에 따르면 마력 파동은 물론이거니와 관련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며 당황했으니까. 이제껏 지구 땅을 밟은 초고위험 마물중에 유일하게 '실종'된 마물이 바로 바그다다."
"이제 페이지를... 아니다."
교수님이 벽시계를 바라보신다. 그러곤, 얼마 뒤.
종이 친다.
종소리와 동시 학생들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고, 나는 심란한 마음을 참지 못해 가만히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아니요아니요."
한예린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어본다. 대충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니,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그냥, 색적실습 때문에..."
"색적실습이 문제인가요?"
"네?"
"걱정 마세요."
한예린이 빵긋 웃는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제 보살핌은 끝났으니 더는 볼일 없다. 서둘러 교실 문밖으로 나가니 한예린이 따라 나온다.
"...어디 가세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빨리한다. 걷다 보면 저절로 한예린이 멀어진다. 뒤에서 침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내 소명은 끝났다. 재빨리 도서관에 도착하니. 이미 설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안녀엉..."
설아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자리에 앉으니 설아가 책을 펼친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설아가 괜찮다며 웃는다. 아직 시간은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아니... 시간 없는데?
"이걸 이렇게 하면... 아니야. 그 식이 아니야아..."
설아가 친절히 잘못된 부분을 짚어준다. 그렇게 한동안 가르침을 받다 보면, 이야기가 다른 데로 센다.
"아, 태호야... 그거 봤어어?"
"응?"
"꿈속의 꿈. 그 영화 있잖아아... 인셉션?"
...내가 어제 봤던 영화잖아?
고개를 끄덕이니 설아가 밝게 웃는다. 설아가 친절히 식을 고쳐주며 입을 연다.
"나, 옛날 영화 좋아해서 종종 보거드은..."
"그래?"
"응. 고전영화가 좋아서, 아빠랑 같이 자주봐아..."
"설아야 정말? 나도 그런데."
응?
가만히 식을 고치고 있으면 이제가 자매가 다가온다.
'또 싸우려고?'
의자를 빼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으면, 소천선배가 의자를 잡는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옆에 끼어들며... 서로 하하호호 웃기 시작한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셋이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태호는... 무슨 영화 좋아해?"
뭐지?
너네 안 싸워?
당황에 머리가 굳는다. 그러자, 핸드폰이 진동한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니, 문자에 공지사항이...
'응?'
색적실습 연기 공지. 해당 실습은 12월로 이월됐으며 자세한 사항은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축축해진다. 뭔가, 이상하다.
색적실습이 연기됐다고?
'아니... 왜? 뭔데? 어째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식은땀이 멈추질 않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