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태양처럼
* * *
쉬는 시간.
복도 창문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내쉰다. 석주혁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매우 다급한 눈치로.
"뭐?"
[네. 진짜, 진짜예요 선배님. 거절당했어요.]
눈썹이 일그러진다.
거절당했다.
석주혁이 당황하면서 곧장 내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게 자기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다.
'씨발 아니지?'
"잠깐 기다려 봐. 생각할 시간 좀..."
[...네.]
설마가 혹시로. 혹시가 확신으로 바뀌기 직전. 내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는 희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거 그냥 부끄러워서 거절한 건가?'
그러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거절할 때 반응이 어땠는데? 눈은 제대로 마주쳤어?"
[아, 아뇨... 그냥 피하던데...]
"볼은? 다리는? 막 떨고 불안 해하지 않았어?"
[홍조에 조금... 다리는 떨었던 거 같기도하고...]
"그럼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네?]
석주혁이 당황하며 반문한다.
"잘 들어 주혁아.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거기서 볼까지 붉히고 반으로 돌아갈 때는 뛰쳐나갔다며?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부끄러워서. 너 시윤이 성격 알잖아.]
음침하고 어둡다.
그러면서 사람을 가리고,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불신감이 깊다. 나랑 석주혁을 제외하고는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내성적 성격의 극한.
근데 아카데미 입학후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고백한다?
당장 뛰쳐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 이 말이다.
거기에 볼까지 붉히고, 거동이 수상하고, 시선까지 피했다?
확정이다!
이건 무조건 부끄러워서 피한 거다!
"아... 그러고 보니, 거절할 때 이유로... '나는 음침한 여자니까 네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
거 봐 씨발 맞잖아!
"부끄러워서 도망친거 맞네! 자, 주혁아. 잘 들어봐. 방금 전에 시윤이가 네 고백을 거절한 건 거절하고 싶어서 거절한 게 아니야."
[어, 어... 네?]
석주혁이 당황을 가득 머금은 채 반문한다. 그러면서도 반색이 드는 게 보인다. 희망을 잃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자. 주혁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최시윤이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줬고, 틈만 나면 도와주고, 거기다 이성친구인 네게 과연 관심이 없을까? 그건 거절하고 싶어서 거절한 게 아니야. 단지 우리가 조금 '빨랐'을 뿐이야."
[조금 빨랐을... 뿐이라고요?]
"응."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마음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지 않은 거지. 우리가 너무 빨랐어. 너무 빨라서 최시윤이 당황했을 뿐이야."
[아... 아. 이제 알겠어요.]
석주혁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진다.
"최시윤이 너를 싫어할 리가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 준 사람에게 불쾌한 감정을 느낄리 없잖아. 그냥 성격상 부끄러워서 일단은 내뺐을 뿐이야. 일단 당장은 움직이지 마. 결국은 성격 문제니까... 내가한번 어떻게든 해볼게. 그리고 준비가 되면 다시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진 일단 친구 사이로 평범히 지내는걸 목표로 하고."
[네, 알겠어요 선배님. 그리고... 그.]
"응?"
[...고마워요.]
뚝.
전화가 끊긴다.
결국은 '성격'문제다. 성격만 어떻게든 조금만... 밝게 만들어 준다면 전부 풀릴 문제다.
'아니 그냥 이어 주는 건데 왜 이렇게 어렵냐고.'
툭 밀면 바로 사귈줄 알았는데,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그 말이 진짜였다.
"성격 문제였을 줄이야..."
일단 한 번 말을 건네보자.
처음에는 주혁이에게 '네 그런 부분까지도 좋아한다'고 말하게 해 타파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따지고 보면 그게 더 위험할 거 같다. 애초에 부끄러워서 도망친 건데 따라다니면서 그런 말하면 배로 도망치지 않을까.
역효과다.
'후배의 성격을 고쳐주자.'
적어도 뿌리까지 어두운 아이는 아니니까. 나 따먹을 때만 봐도 사람이 180도 달라지지 않는가.
"...어쩌면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지도 모르지."
상황이 너무 안 좋다 보니 성격이 그렇게 어두워진 거다.
"후우..."
뿌리부터 천천히 성격을 밝게 만들어 주면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 괜찮다 느끼기 시작하면, 그때 막타를 치는 거지. 석주혁이라면 해낼 수 있다.
그런생각을 하고 있으면.
"여기서 뭐 해?"
뒤에서 누가 나를 꼬옥 안는다.
익숙한 냉기. 커다란 가슴. 언니보다 살짝 높은 목소리.
"아린아?"
"...요즘 후배 도와주고 다니던데. 그거 아직 해?"
이아린이 새침한 목소리고 내게 쏘아붙듯 말한다. 슬멀슬멀 올라오는 질투심이 느껴진다.
"응."
"아까 전에 통화하던 사람은 누구야?"
"내가 도와주는 후배. 둘이 썸남인데 이어 주는 거 도와주고 있지."
"...저번에 나랑 언니 화해 시켰던 것처럼?"
"응."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태호야... 네가 이타적인 성격이라는 건 알겠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도와줄 필요가 있어? 너랑 전혀 상관없는 연애 이야기잖아."
"..."
나랑 관련이 있어서 문제다.
"그냥 그런 이유가 있어."
이아린은 내가 왜 그러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다행이다. 역시 설아다. 입이 무거운 게 든든함이 느껴진다.
"하아... 뭔지는 몰라도 좀 곤란해 보이네. 태호야. 나도 좀 도와줄까?"
"가스라이팅이 뭘 도와줄 수는 있냐. 됐어. 걱정하지 마."
"으아윽끅으...! 가, 가스라이... 아니, 맞는데. 다 맞는데... 아니, 그냥 말하지마. 자꾸 떠오른다고... 이미 여친도 생겼는데...!"
이아린이 부르르 몸을 떤다. 극도로 후회하는 만큼 전신에 거부 반응이 이는 모습. 알았다고 손사래를 친다.
"알고 있었어?"
이아린이 자기 팔을 쓰다듬다가 나랑 시선을 마주친다.
"당연하지."
이아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조용히 내 곁에서 떨어지며, 달싹이던 입술을 연다.
"신경은 안쓰여?"
"...안쓰여. 애초에 신경을 써서도 안 돼고. 나는 거기에 뭐라 말할 자격이 없으니까."
이아린이 천천히 내 손을 잡는다. 살짝 따듯하다.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는다.
"왜, 태호야. 신경 쓰여?"
"아니."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아린이 시선을 피한다.
"태호야..."
"응?"
"사랑해."
이아린이 아무말없이 나를 앞에서 껴안는다. 억지로 떼어내려고 해도 미동조차 안 한다. 내 품에 꼬옥 안긴 채 스읍하아 스읍하아 거칠게 숨을 쉰다. 푸른 단발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건데...!?"
"...몰라. 그냥, 최근에 태호랑 대화한 적이 없는 거 같아서... 이대로 가다간 태호가 부족해져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이아린이 그대로 얼굴을 박은 채 마구마구 비빈다. 가뜩이나 날씨도 추운데 그대로 얼어버릴 거 같다.
"아니 네가 무슨 설아야? 자, 잠깐 숨 막히는 데..."
"맞아. 요즘 설아랑 자주 붙어다니지...? 나는 가문 복귀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설아도 요즘 좀 짜증 난다? 집으로 돌아오면 뭐가 좋다고 헤실헤실 웃고 있고... 또 그러면서 은연중에 지가 태호랑 얼마나 붙어먹었는지 말한다니까? 이거 완전 자랑 아니야?"
"아니, 그걸 왜 나한테"
"그러니까. 나도 자랑거리 하나 만들고 싶다고. 태호야."
이아린이 갑자기 품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츕."
나와 입술을 부딪힌다. 아예 혀까지 넣고는 내 입안을 마구잡이로 유린하기 시작한다.
"츄르릅, 츄릅, 츄릅... 후웁, 푸하 하아... 하아..."
이아린이 녹아 몽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질해지는 정신에 주변 공기가 혼탁해진다.
"...어때? 이 정도면 자랑할 만 할까?"
"..."
이아린이 내게 들이댄다. 내 쪽으로 젖가슴을 비비면서, 반쯤 녹은 표정을 짓고는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그러면서도 입맛을 다시는 게 위험해 보인다.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그냥... 이 정도로 만족하게 해주면 안 될까? 나도... 나도 엄청 열심히 참고 있거든. 솔직히 말해서 태호를 볼 때마다 어디 으슥한데 끌고 가서 바로 하고 싶단 말이야...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
태호가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선배님?"
응?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여기서 뭐 하세요...?"
최시윤이 있었다.
"아, 태호야. 이게 네가 도와주고 있다는 그 후배야?"
"어..."
"잠깐만."
이아린이 완전밀착하다가 곁에서 떨어진다. 이아린을 보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한마디 할 거 같다.
"이왕 만났으니 한마디 할게."
"...어, 으... 예?"
"좋은 말 할 때 태호 곁으로 다가오지 마. 불길한 느낌이 들거든."
"...네?"
최시윤이 동공이 흔들린다.
"잠깐, 아린아?"
"태호는 가만히 있어."
이아린이 천천히 나를 자기 뒤로 보낸다. 속절없이 끌려간다.
"부, 불길한 느낌이요...?"
"여자의 감이야. 너, 태호랑 자주 붙어다니지? 안 말해도 알고 있어. 복도에 부딪힐 때마다 항상 태호가 보였거든."
"그, 그게..."
흡사 호랑이와 토끼. 토끼 한 마리가 호랑이 앞에서 덜덜 떨고 있다.
"후배니까 봐주는 거야. 내가 지금 가문에 쫓겨나 있어도 아주 약해빠진 건 아니거든. 집에서 설아가 얼마나 경고를 했는지 알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인데... 직접보니 말이 아니네."
이아린이 점점 앞으로 다가온다.
"보니까 괴롭힘을 당했다며?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녜?"
최시윤이 혀짧은 소리를 내며 당황한다.
아니, 잠깐 뭐라고?
"아니... 뭐, 혼내는 줄 알았어?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다."
"아니, 그으 아린 선배님..."
"힘든데 거기에 소금을 뿌릴 수는 없지. 하아... 그래도 소식을 들어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야. 막 손찌검하거나, 가문의 힘으로 압박하거나 하는 강경책은 쓸 생각 없어. 아니, 가문으로 돌아가지도 못했지만..."
"..."
"그래도 곧 돌아갈 예정이라는 건 똑같지. 적어도 여기 아카데미 내에서 내 경고를 하등시 하는 생도는 없어진다는 말이야. 이제 대충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겠어? 응? 후배야."
이아린이 후배의 양 볼을 잡은 채 억지로 고개를 올린다. 서로 눈을 마주친다. 그 상태 그대로 최시윤이 굳어 버린다.
"내가 태호의 일을 대신할 테니. 그만 내 남자 곁에서 꺼지라고."
"...!"
최시윤이 공포에 부들부들 떤다. 아니, 좀 그만하라고.
"아린아."
"응? 알았어."
이아린이 바로 손에 힘을 푼다. 최시윤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다 겨우겨우 일어선다.
"내... 내 남자요...?"
"응. 그러니까 포기하라고."
"아니, 나 여친 있는데"
"태호는 끼어들지 마. 눈치 없어."
씨발.
"...우웃, 으으읏..."
최시윤이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도망치듯 뛰쳐나간다. 내가 따라 나가려던 그때. 이아린이 먼저 선수를 친다.
"으읏, 어, 으어?"
"가만히 있어."
그대로 최시윤을 붙잡은 채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서, 선배님...?!"
"미안, 방금 전에 욕한 건 미안 해. 진심이긴 한데... 하여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머리가 상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
병주고 약주고? 채찍 후 당근?
"우웃, 우으읏..."
이아린이 그 자세 그대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계속한다.
"내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아. 여기는 이미 정원이 꽉 찼거든? 더 이상 들어오면 터져 버려. 그러니까 곁에 있지 말라는 거야. 태호가 힘들어하니까."
"으읏..."
"대신 도와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야. 가문으로 복귀하고 나면 내가 물심양껏 도와줄게. 집 문제도 좀 있다며. 직접 사람을 써서 부모들과 떨어뜨리게 해주고, 새로운 집을 줄게. 이제까지의 생활과는 비교도 안 될정도로 편해질거야. 혹시 돈 필요해? 필요하지 않아도 줄게. 값지 않아도 되니까 걱정하지 마."
"서, 선배..."
이아린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돈 몇 장을 쥐어 준다.
"힘들면 내게 말해 줘. 괴롭히는 녀석이 있으면 바로 코를 깨부숴줄게. 태호보다는 잘해 줄 자신 있거든. 그래, 쓰읍... 눈빛보니까 아예 떨어질 생각은 없구만. 그냥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는 마."
이아린이 거칠게 최시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당황에 가득 차있던 눈동자가 살짝 풀어진다.
"너를 괴롭힐 생각은 조금도 없어. 싫다고 내칠 생각도 없고. 그러기에는 네 마음이 너무 약하니까. 도와주는 것 뿐이야. 그러니까, 부탁해."
둘이서 시선을 마주친다. 이전처럼 공포에 찬 눈빛이 아닌, 살짝 유해진 눈빛.
"... .... ."
이아린이 최시윤의 귓가에 다가가 뭐라 속삭인다. 그러자.
마지막 교시, 수업 종이 친다.
"자, 이제 반으로 돌아가. 힘든 일 있으면... 이제 나한테 연락해. 여기, 전화번호."
이아린이 후배의 손에 작은 종잇조각을 쥐여 준다. 그러곤 툭툭 등을 치니 반으로 도망치듯 달려 나간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
*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이아린이 도와 준다고 해도, 아니, 솔직히 내 처지에선 엄청 고맙기는 해도. 아직은 불안정하다.
쉬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자살하지 않을까 곧장 달려가기까지 했으니까. 다행히 별일 없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류장에서 최시윤과 만났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
최시윤이 움찔움찔 시선을 피하며 볼을 붉힌 채 천천히 내 옆자리에 앉는다.
"괜찮아?"
"느, 네? 네... 괘, 괜찮아요..."
최시윤이 우물쭈물 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시도해볼 생각이었는데... 이아린 때문에 시간이 뒤로 밀렸다.
"선배..."
"응?"
"제가, 많이... 불길한가요? 아니... 마, 많이 음침한가요?"
최시윤이 반쯤 울먹거리며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바로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니, 아니 아니? 음침하긴. 안 음침한데? 그냥, 뭐냐... 살짝 우울해 보일 뿐이야.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
성격 이야기가 나왔다. 침을 꿀꺽 삼킨다.
그 말이 신경 쓰였구나. 하긴, 최시윤 처지에선 성격이 콤플렉스니까. 더 깊게 후벼 파인 거겠지.
"으읏, 네에... 고, 고마워요 선배에... 히히."
최시윤이 밝게 웃는다.
"그, 근데 선배님... 사실, 저, 고민이 있는데..."
"고민?"
"저, 저어... 이, 성격을 고치고 싶어서..."
아.
확신한다.
이건 연애 상담이다.
고백때 부끄럽다고 도망쳤으니,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그, 그래서 그런데... 선배. 서, 선배는 어떤 성격을 좋아하세요? 호, 혹시 좋아하시는 성격이, 이, 있으신가요?"
최시윤이 시선을 피한 채 방금 흘린 눈물을 훔치곤 나를 바라본다. 이건 굴러들어온 기회다. 이걸 놓칠 수는 없다.
"나는... 뭐냐, 밝은성격을 좋아하지."
성격을 바꿀 의지를 주는 것. 최시윤이 내게 의지하는 처지에서, 내 말이 가지는 무게는 상당하다.
표정을 살펴보니 드러나는 감정은 당황도, 슬픔도, 후회도 부정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그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것뿐.
"서, 선배는... 밝은성격. 밝은성격... 밝은성격... 밝은..."
최시윤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린다. 작게 말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무어라 끼어들기 전에,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한다.
"아... 버스가... 서, 선배... 저 먼저 갈게요! 내일 봐요..."
최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버스안으로 들어간다.
노을이지고 달빛이 어스러진다.
*
*
*
도와 준다고 해도, 선배를 포기할 리가 없잖아.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버스의 창가 자리에 앉아 생각한다. 역시, 선배는 밝은 성격을 좋아하셨어.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일은 단 하나.
'성격 고치기...'
그래야만 좀 더 선배와 가까이 지낼 수 있으니까. 그, 그래야만... 선배가 나를...
좋아해 주시니까.
바뀔 수 있다. 바뀌어여만 한다. 선배가 여러 여자를 끼고 사는 건 상관없다. 하, 하지만... 거기에 내가 낄 수 없다면... 그대로 자살해 버릴 거다. 그러니까.
무조건 바뀌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어야 해.
'바, 밝은성격... 밝은성격이 어떤게...'
밝은 성격이 어떤게 있지?
난잡한 머릿속을 뒤지며 정리한다. 대체, 어떤 밝은 성격을... 어떻게 밝은 성격을 좋아하시는 거지? 선배님은 대체...
"아."
청각신룡 레기우스.
선배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만화책.
우울한 세계관 속, 우울한 등장인물들. 그중에서 군계일학처럼 언제나 밝고 거친 등장인물이 하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
'레베카.'
빨간 머리에 굉장히 밝고 툭만하면 주변 인물과 투탁거리고, 최고 인싸에, 트러블메이커. '밝음'하나로는 최고인, 그런 등장인물이...
"하아... 하아..."
하면 된다.
선배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속 등장인물이니까, 선배가 좋아하는 '밝은성격'에 가장 가깝겠지?
기저에서부터 강렬한 의지가 끓어오른다. 당장에라도 터질 거 같은, 의지.
사랑이 발 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히... 흐히..."
선배는 밝은 성격을 좋아하시니까. 내가 바뀌면 돼. 내가 전부 달라지면 돼.
"하아... 하아..."
주머니에 넣어 둔 돈을 꺼낸다. 꼬깃꼬깃한 5만원권 여러 장이 손바닥 위에 펼쳐진다.
'태호를 사랑하지 마.'
아린선배가 했던 말씀을 복기한다.
...싫어요.
그럴 수 없어요. 이미 사랑하는걸요. 그러니까...
"...태호 선배."
저.
바뀔게요.
최대한 밝게... 그 누구보다 밝게... 최고로 밝게...
마치.
태양처럼.
*
*
*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덜덜 다리가 떨린다. 불안 함을 숨기지 못하고, 제대로 수업에 집중조차 못하겠다.
오늘.
최시윤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전화, 문자를 날려도 받지를 않고... 곧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하아..."
점심시간 종이 친다.
여전히 묵묵부답. 짧게 한숨을 내쉬곤 교실 밖으로 나서려던 찰나.
"선배에에에!!"
투쾅!
"어?"
문이 날라간다.
"으악 씨발 뭐, 뭐야?!"
"으어, 어어...?!"
"천수아다! 천수, 천수아다...!"
"뭐야, 무슨, 뭐... 켈록! 켈록!"
부욱 떠오르는 자욱한 연기에 소매로 입을 가린 채. 눈앞에 있는 인영에 집중한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숨어 있던 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두 눈이 번뜩 뜨인다.
"...시, 시윤아?"
노란 금발에 포니테일.
살짝 풀어해친 껄렁한 옷차림새.
사라진 다크서클.
그리고.
연갈색으로 태닝 된 피부까지.
"사랑해요오오오...!!"
완벽한 '금태녀'가 돼 버린 후배가.
주변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냅다 사랑 고백을 하며.
내 품으로 달려든다.
"...끄허억!"
흡사 교통사고와 비슷한 충격량이 그대로 내 배에 전해진다! 자지가 쥐어뜯기는 듯 비슷한 고통에 두눈이 까뒤집힌다.
"선배, 선배엣...!!"
살... 려 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