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Dear. 리페리우스 공작가의 하녀장, 아델 브라이스 님.
안녕하세요, 아델 님.
오랜만에 편지를 드립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이곳 수도는 모처럼 조용합니다.
황궁 후계자 전쟁이 소강기에 접어들었거든요. (물론, 황녀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건 아직도 충격적입니다.)
이것저것 할 얘기가 많지만, 그건 직접 뵙고 차 한잔 마시며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편지를 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아직 하녀를 구하시나 싶어서 말입니다.
그때 공작가 일손이 부족하다고 고민하셨던 게 생각나 여쭤봅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저희 프레이 백작가의 사정이 나빠져서 말입니다.
백작님께서 하녀들을 대거 정리하라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일 잘하는 하녀 하나를 그쪽으로 보낼까 하는데, 원하신다면 추천장을 써 들려 보내겠습니다.
그럼, 회신을 기다리겠습니다.
- 당신의 친구, ‘켈라 로네인’으로부터.
PS 1. 리페리우스 공작님께서는 아직 출타 중이신가요?
PS 2. 주변 귀족가 중 하녀장 자리 남는 데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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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프레이 백작가의 하녀장 켈라 로네인 님.
안녕하세요, 켈라 님.
오랜만에 편지를 주셔서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이전 수도에서 만난 이후로 잘 지내셨는지 궁금하군요.
수도의 소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가 됐든 흉흉한 분위기가 가라앉은 건 다행입니다.
그럼 1황자님께서 황태자가 되시는 건가요? 심약하신 2황자님께서 다시 후계자 전쟁에 나서실 리는 없고……
(이 부분은 펜으로 검게 덧칠해져 있었다.)
여하튼 제 푸념을 기억해 주시고,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공작가는 항상 일손이 부족하니 전해 주신 제안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 험하고 추운 북부 땅까지 일하러 오는 사람이 정말 없거든요.
때마침 공작님께서도 새롭게 하녀를 들이라고 하셨답니다. 그 까다로우신 공작님이 말이에요.
켈라 님의 추천이라면 검증된 아이겠지요. 다행입니다.
집사장님께 바로 보고드릴 예정이니, 하녀의 도착 시점에 대해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 감사를 담아, 아델 브라이스로부터.
PS 1. 공작님께선 최근 돌아오셨습니다.
PS 2. 남부의 에볼튼 자작가에서 하녀장을 구한다고 들었는데, 한번 알아보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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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리페리우스 공작가의 하녀장 아델 브라이스 님.
안녕하세요, 아델 님.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하녀는 수도에서 바로 출발시킬 예정이니, 3주 후 정도면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 신의를 담아, 켈라 로네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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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프레이 백작가의 하녀장 켈라 로네인 님.
안녕하세요, 켈라 님.
보내 주신 하녀 아이는 잘 도착했습니다. 아주 아름답고 조용한 아이더군요.
감사합니다.
- 감사를 담아, 아델 브라이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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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프레이 백작가의 하녀장 켈라 로네인 님.
켈라 님, 안녕하세요.
수도에서 평안하게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이번에 편지를 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보내 주신 하녀에 관해 여쭤볼 게 있어서요.
석 달 전 제게 추천장을 써 주신 하녀를 기억하시는지요?
에슬린이라는 이름의 연보랏빛 머리를 가진 아이입니다.
보내 주신 추천장과 조금 다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동안은 공작님께서 신입 하녀들에게 간단한 교육만 하라고 하셔서 몰랐는데요. 한 달 전 공작님께서 출타하셨을 때 일을 시켜 보니, 웬걸.
에슬린 그 아이는 하녀 일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게 아니겠습니까?
혹시 추천장을 적어 주신 하녀가 뒤바뀐 게 아닌지 꼭 좀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가급적 빠르게 답장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답장을 기다리며, 아델 브라이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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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프레이 백작가의 하녀장 켈라 로네인 님.
켈라 님, 또다시 편지를 보내게 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전 편지는 읽어 보셨는지요? 답장이 없으셔서요.
일곱 달 전, 저희 공작가로 보내 주신 하녀를 기억하시나요?
에슬린 로즈벨이라는 아이 말입니다.
2주 전부터 그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일하는 것도 영 시원찮더니, 이젠 원인 모를 열병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합니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아서 몹시 우려스럽습니다.
혹시 백작가에서 근무할 때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뭔가 지병이 있었던 건 아닌지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켈라 님께서 추천해 주신 이 하녀와 관련된 일이 자꾸 생겨 솔직히 아주 걱정스럽습니다.
빠른 답장 부탁드립니다.
- 아델 브라이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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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프레이 백작가의 하녀장 켈라 로네인 님.
켈라 님, 답장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하녀를 잘못 들인 것 같습니다. 제 신뢰를 이런 식으로 저버리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확인하시는 대로 답장 주십시오.
- 아델 브라이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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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프레이 백작가의 하녀장 켈라 로네인 님.
켈라 님?
빠른 시일 내로 답장을 주십시오.
- 아델 브라이스로부터.
To. 켈라 로네인 님.
켈라 님, 읽었으면 답장을 주세요.
- 아델 브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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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라 로네인 보시오.
이 편지에도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슐든 대륙 끝까지라도 쫓아가 반드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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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리페리우스 공작가의 하녀장 아델 브라이스 님.
안녕하세요, 아델 님.
저는 프레이 백작가의 새로운 하녀장 로웰이라고 합니다.
전 하녀장이었던 켈라 로네인은 이 백작가를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시는 건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 로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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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탁!
“하…….”
아델 브라이스는 거칠게 편지를 내려놓았다. 양손에 힘을 꽉 주니, 종이 끝이 허무하게 와작 구겨졌다.
“아까부터 대체…….”
깜빡, 깜빡.
기름이 부족한 램프의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하녀장 아델은 그 불빛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지?”
싸늘한 목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어두운 밤이었다.
모두 잠이 든 가운데 이렇게 자신을 찾아올 이는, 적어도 이 성의 주인이나 집사장뿐이리라.
“에슬린 로즈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잖아.”
그러나 자신을 찾아온 이는 집사장도, 하물며 이 성의 주인도 아니었다.
최근 몇 달간 하녀장의 골머리를 가장 많이 썩인 인물.
문제의 그 하녀, 에슬린 로즈벨이었다.
“에슬린이라. 이름이 같은 건 신기한 우연이군.”
정물처럼, 혹은 아주 오래된 그림 속 미인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여자가 중얼거렸다.
아델은 헛웃음을 삼키며 애써 화를 참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굳이 되묻고 싶지도 않았다.
저 애가 이상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2주나 이유 모를 열병에 시달렸으니, 드디어 머리가 홱 돌아 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지.’
아델은 넌덜머리가 난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됐어. 그냥 내가 말한 대로, 짐을 싸서 날이 밝는 대로 나가도록 해.”
“…….”
“더 이상 널 데리고 있을 수 없겠구나.”
“…….”
하녀에게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아델은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네가 지금까지 대체 뭘 했지? 양심이 있으면 말을 해 보렴. 첫 두 달은 공작님의 명령 때문에 놀고, 그다음은 뭘 맡기든 엉망진창. 열병 때문에 드러누운 건 그렇다고 쳐.”
“…….”
“기껏 정신을 차렸나 싶더니만……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넋이 빠져 있다가, 이젠 한밤중에 내 처소까지 쳐들어와?”
말하다 보니 호흡이 거칠어졌다. 아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알겠어? 알아들었으면 짐을 싸서……”
“하녀장, 내게 기회를 줬으면 해.”
아델은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너무 당황해서일까,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아니 그 전에…….
‘쟤 지금 나한테 반말한 거야?’
혼란한 아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녀의 표정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어두운 그림자에 반쯤 잠긴 창백한 얼굴은 그 와중에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하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깨달음을 얻은 듯 짧게 흔들렸다. 잠시 고민한 끝에 하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요.”
아델은 말문이 턱 막힌다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다.
‘요’?
그건…… 설마 존댓말인 거니?
“네가 진짜 미쳤구나…….”
“내 말을 일단 들어 봐. 아니, 들어 봐요, 하녀장. 아니, 하녀장님.”
엉망진창이었다.
이쯤 되니 아델은 이 하녀의 폭주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졌다.
“딱 3개월만 내게 시간을 줘요. 그동안 내 반드시 실력을 길러 하녀로서의 쓸모를 증명해 보일 테니.”
아델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그녀는 빈 종이 하나를 가져와, 뭔가를 슥슥 써 내려갔다.
힘주어 눌러쓴 그 서류는, 해고 통지서였다.
아주 빼도 박도 못하게 이걸 저 손에 쥐여 주리라.
‘반드시, 반드시 내쫓겠어!’
흐릿한 램프 불빛 아래, 아델의 고동색 눈동자가 뜨겁게 빛났다.
* * *
시간이 흘렀다.
아델은 결심한 대로 그 하녀에게 뭔가를 쥐여 주긴 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해고 통지서는 아니었다.
* * *
에슬린 로즈벨은 오랜만에 짧은 휴식을 갖기로 했다.
“하아…….”
그녀는 작은 분수 정원에 앉아 있었다.
이 버려진 정원은 넓디넓은 공작저에서 에슬린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본 저택과는 거리가 멀어 인적이 뜸했기 때문이었다.
에슬린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석 하녀의 배지.’
이걸 직접 건네주던 하녀장의 뿌듯한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그것은, 모든 하녀들이 꿈꾸는 물건이었다. 물론 에슬린 자신 또한 말이다.
이 작은 배지 하나를 위해 그동안 얼마나 아등바등했던가?
‘말도 안 되는 3개월이었어.’
에슬린은 먼눈으로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 보았다.
처음엔 당연히 엉망이었다.
걸레질 하나 제대로 못 해 선배 하녀에게 탈탈 털렸는데…….
뭐, 이젠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쨌든 에슬린은 공작저에서 쫓겨나지 않았고, 이렇게 진급까지 했다.
‘이 기세라면, 1년 뒤에 공작저를 나갈 수 있어.’
에슬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이 배지에 집착했던 진짜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수석 하녀가 되면 급여가 오른다. 그러면 돈이 더 빨리 모일 것이고, 이 공작저를 떠나게 될 날도 더 가까워지겠지.
에슬린은 자신의 급여를 대략 계산해 보았다. 벌써부터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이 작은 배지가 뭐라고…….’
순간 감정이 복받쳤다. 그동안의 고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녀에 빙의했다는 사실에 적응할 틈조차 없었다.
당장 목을 옥죄는 생계의 위협이 있었으니까.
아직도 하녀장 아델을 처음 찾아간 그 밤이 생생했다.
제발 자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부터가 에슬린으로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누구에게 머리를 숙여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에슬린은 요령이 좋은 인물이었다. 하녀장에게 기회를 얻고 난 다음, 그녀는 타고난 일머리와 센스로 금세 저택의 업무 흐름을 파악했다.
‘몸에 배지 않은 하녀 일이 문제였지만…….’
노력 앞에 장사 없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코피가 일상일 정도로 에슬린의 집념은 모두가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썩 우수한 하녀가 아니었던 에슬린의 작은 변화는, 금세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궂은일도, 쉬운 일도, 내 일도, 남 일도, 눈에 띌 수만 있다면 닥치는 대로 했다.
막판엔 자신을 어떻게든 내쫓으려 혈안이 되어 있던 하녀장마저 박수를 치며 인정할 정도였다.
“후우…….”
회상을 마친 에슬린이 또다시 긴 숨을 내뱉었다. 뽀얀 입김이 청량한 하늘 위로 흩어졌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감자, 작열하는 태양 빛이 얼굴에 고스란히 쏟아져 내렸다.
한때는…….
‘한때는 저 태양에 닿기 위해 애썼던 적도 있었지.’
에슬린은 피식 웃음 지었다. 높게 올려 묶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아무래도 난 하녀가 천직이었나 봐.”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가벼웠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
에슬린은 손안의 배지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하얗게 일어난 손은 온통 거칠거칠했다.
이전엔 아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니까 에슬린이 기억하는 전생에서 말이다.
“돌아가야겠다.”
에슬린은 기나긴 상념을 털어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짧은 휴식은 여기서 끝내야만 했다.
사흘 뒤면 공작이 돌아온다.
저택은 8개월 만에 귀환하는 주인맞이에 한창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녀장이 찾을 거야.’
몸을 일으켰다. 언 땅을 밟고 서니 비로소 한기가 몰려들었다. 에슬린은 몸을 움츠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휘이잉-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메마른 가지와 풀들이 제각기 몸을 스치며 소리를 냈다.
정원 입구가 눈앞에 보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느닷없이 허리를 잡혔다.
에슬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여기 있었군요.”
귓가에 낮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등 뒤로 단단하고 뜨거운 벽이 느껴졌다.
벽? 아니, 아니다. 그건 사람의 몸이었다.
에슬린은 그제야 누군가 자신을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탁!
에슬린은 허리를 뱀처럼 휘감은 팔을 억지로 뿌리쳤다.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팔뚝이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심장이 터질 듯 쿵쿵 뛰었다. 에슬린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럽게 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
그리고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저 남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랐습니까? 접니다, 테베트. 당신이 보고 싶어 공작령에 들어서자마자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렸습니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세상의 모든 꿀을 다 발라 놓은 듯한 달콤한 표정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아니, 모른다.
저런 표정을 할 줄 아는 남자는 모른다.
‘대체 이게……?’
에슬린은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과 이렇게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기만을 기다렸는데…… 내가 반갑지 않아요?”
남자가 에슬린을 다독이려는 듯 검은 망토 사이로 다시 손을 뻗어 왔다. 에슬린은 뒤로 물러섰다. 남자가 그제야 더 다가오지 않았다.
“들킬까 봐 무서워서 그럽니까? 괜찮아요.”
“…….”
“아직 아무도 우리 관계는 모르니까.”
그제야 벼락처럼 에슬린의 머릿속에 어떤 깨달음이 내리꽂혔다.
그러니까 지금…… 이 하녀와 리페리우스 공작이……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거야?
‘말도 안 돼. 난 3개월 전에 이 몸에 빙의한 것뿐이라고.’
에슬린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남자가, 리페리우스 공작이 다정한 미소를 그리며 다가왔다. 머릿속에서 경고를 알리는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그녀는 멍하니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빛나는 검붉은 눈동자, 왼쪽 눈 밑에 난 점, 오뚝한 콧날, 깎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턱선…….
어떻게 이 얼굴을 잊겠는가?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그대가 마실 독배를 가져왔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었는데…….
공작이 자세를 낮추었다. 더러운 흙바닥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에슬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에시, 당신의 시종이 왔습니다.”
자신에게 독배를 먹인 남자가 그렇게 속삭였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진 이유는 그의 목소리가 달콤해서였을까, 아니면 잊었던 죽음의 감각이 떠올라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