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2화 (2/147)

2화

탁탁, 먼지를 털던 세피아 레나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주님께서 무슨 바람이 들어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걸까?”

에슬린은 멀거니 서서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오후의 햇살이 별채의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겨울치고 따뜻한 햇볕 탓에 춥지는 않았으나, 에슬린은 아까부터 이유 모를 한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에슬린?”

돌아오는 답이 없자 세피아가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에슬린은 내실 중앙의 탁자 근처에 흔들림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꼿꼿한 허리와 반듯하게 편 어깨는 에슬린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하루 이틀 연습한 게 아닌, 몸에 깊게 밴 듯한 습관.

그 때문인지 에슬린에게서는 종종 알 수 없는 위압감과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어, 너 기름 흘러.”

심지어 램프에 기름을 채우고 있어도 말이다.

“에슬린 로즈벨!”

“어?”

에슬린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보니, 손등을 적시고 탁자 위로 흐르는 기름이 보였다.

세피아가 작게 혀를 차며 걸레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탁자 위에 쏟아진 기름을 먼저 닦았다.

“왜 그래? 너답지 않게. 설마 수석 배지 받았다고 해이해진 건 아니지?”

“……아냐, 그런 거.”

에슬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세피아를 따라 기름얼룩이 남지 않도록 서둘러 걸레질했다.

아, 정신 차려야지.

그녀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꽉 채운 인물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쉽진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야?’

속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다시 기름을 채우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은 리페리우스 공작가의 하녀로 빙의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하였던가?

빙의도 어이없는데 하필이면 리페리우스라니!

하지만 에슬린은 자신의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바다를 건너자. 바다 너머 대륙에서 새롭게 시작하자.’

그러려면 당연하지만, 초기 정착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리페리우스에 남아 돈이 모이면 떠나려고 했는데…….

‘물론 공작을 마주치는 건 각오한 일이었어.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 누가 이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 공작이, 얼음보다 싸늘하다던 악마 공작이.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그 남자가.

이 하녀와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에시, 당신의 시종이 왔습니다.’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종이라니. 그 냉철하다고 소문난 리페리우스 공작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건 삼류 희극에서조차 팔리지 않을 싸구려 대사였다.

“에슬린 로즈벨, 잠깐 나 좀 보자.”

문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슬린은 폭주하는 생각을 억지로 밀어 두었다. 앞치마에 손을 대충 닦으며 재빨리 문으로 걸어갔다.

“하녀장님, 무슨 일이시죠?”

고동색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틀어 올린 중년의 여자를 보며 물었다. 엄숙하지만 따뜻한 시선이 에슬린을 향했다.

“가주님께서 침실 정리를 할 하녀를 찾으시더구나.”

우뚝. 에슬린이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그걸 왜 저에게 말씀하시는 거죠?”

“잊었니?”

아델이 진한 눈썹을 치켜올렸다.

“원래 네 담당이었잖아. 가주님께서 저택에 계시던 때에 말이야.”

“…….”

“……물론 그때 일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내가 뒤치다꺼리하느라 힘들었어.

아델이 에슬린을 흘끗 보며 마지막 말은 작게 덧붙였다. 물론 에슬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하녀장의 작은 타박이 이어졌다. 에슬린은 되는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하, 하녀장 님, 저는…….”

그러나 뭐라고 덧붙일 것인가?

사실 공작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심지어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건 내가 아니었다고?

난 전생에 제국의 황녀였고, 공작에게 독배를 건네받고 죽었다가 빙의한 거라고?

“잠자코 따라오너라. 늘 빠릿빠릿하던 아이가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구나.”

결국 에슬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그냥 지금 도망칠까?’

어차피 1년 후에 저택을 떠날 생각이었다.

이제 허드렛일도 어느 정도 익숙하겠다, 차라리 추천장 없이 갈 수 있는 곳에서 잡일부터 하면…….

‘아니, 안 돼.’

에슬린은 도리질을 쳤다.

공작가만큼 급여를 주는 곳은 결단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추천장 없이 나갔다가 결국 안 좋게 끝난 하녀들 소식을 몇 번 듣지 않았던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뾰족하게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나름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머리는 이제 보니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

결국 그녀는 본채에 있는 공작의 침실 앞에 설 때까지 묘안을 내지 못했다.

끼이익.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묵직한 문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 * *

“아, 뭐야.”

에슬린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침실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잘 생각해 보면 이 대낮에 공작이 침실에 있을 리 없지.’

그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너무 당황했나 봐.’

에슬린은 자신의 상태를 되짚으며 살짝 자조했다. 이성을 찾은 머리가 그제야 끼익 끼익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빨리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야겠어.’

굳은살 박인 손이 청소 도구를 힘주어 잡았다.

‘대응 방법은 이따 밤에 차분히 생각해 보자.’

결의를 다지며 잽싸게 몸을 놀렸다. 공작의 침실은 넓긴 했지만, 물건이 많지 않아 청소하기에 수월해 보였다.

그녀는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창가로 다가갔다. 걸쇠를 풀고, 커다란 창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코끝에 닿았다.

“콜록.”

몰아치는 한기에 저절로 목이 간지러워졌다.

이따 주방에서 따뜻한 차 한잔 얻어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창문을 열었을 때였다.

끼이익, 철컥.

에슬린은 자신이 연 창문이 그대로 닫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문을 닫는 손은 몹시 크고, 투박하며, 매우 단단해 보였다.

“아무래도 하녀장에게 벌을 줘야겠습니다.”

에슬린은 차마 옆을 돌아보지 못했다.

“감히 당신에게 일을 시키다니 말입니다.”

부드럽지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삐걱삐걱.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가 돌아갔다.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있지? 공작은 지금 당연히 집무실이나 응접실에 있어야 할 터.

귀신이라도 마주한 듯 온몸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

검붉은 눈동자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고, 그 밑에 난 점이 살짝 올라가는 것까지 아주 느린 속도로 보였다.

“이제 내 얼굴을 제대로 봐 줄 마음이 들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남자는 순하게 배를 드러낸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목을 물어뜯을 독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슬린이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러자 공작이 주변 공기를 눈으로 한 번 훑었다.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나더니 활짝 열려 있던 창문이 빠른 속도로 닫혔다.

“이리 와요.”

그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에슬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가, 가주님!”

뜨거운 체온에 놀란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공작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짙은 눈썹이 크게 한 번 꿈틀거렸다.

“……가주님?”

서늘한 음성이었다.

“이름을 불러요. 늘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는 몹시 못마땅한 말을 들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에슬린은 허리를 바로 세우고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아뇨. 그럴 순 없습니다.”

“…….”

양손을 공손하게 모은 건 행여나 떨리는 손끝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태산같이 서 있는 남자가 습관처럼 미소를 머금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서로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그 시선에 에슬린은 오히려 머리가 차분해짐을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어쨌든 그를 계속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긴장을 감추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몸을 틀더니 침대 옆 설렁줄을 흔들었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묵직한 침실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중년의 집사장이 얼굴을 드러냈다.

공작의 최측근 가신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에슬린과는 별다른 접점이 없는 이였다.

“차를 내오너라. 내가 가져온 짐에서 감국을 찾아가져 와.”

“알겠습니다.”

집사장은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투명한 안경 너머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가 에슬린을 슥 훑었다.

“두 명분으로 준비해 오면 될는지요?”

“그래.”

순간 에슬린은 깨달았다.

‘집사장은 알고 있는 거야.’

공작과 이 하녀의 관계를…….

아찔한 감각이 온몸을 내달렸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탁. 집사장이 사라지고, 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둘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행히 차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빠르게 준비되었다. 하녀가 아닌, 집사장이 직접 차를 가져왔다.

에슬린은 한 번 더 확신했다.

집사장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숨겨 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좋아하던 남부산 감국차입니다. 노는 것에 환장한 남부 놈들이라 그런지, 찻잎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말리더군요.”

공작은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손길로 차를 우렸다. 방 안 가득 향긋한 꽃향기가 퍼져 나갔다.

“이리 와서 마셔요. 몸을 떨고 있지 않습니까?”

“가주님, 저는……”

“차를 마시면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다정하지만 단호한 표정이었다.

에슬린은 입술을 꾹 말아 물며 티 테이블 근처로 다가갔다. 그제야 공작이 기쁜 듯 의자를 빼 주었다.

“…….”

에슬린은 물끄러미 그런 공작의 행동을 응시했다.

‘그 리페리우스 공작이 일개 하녀의 몸종으로 전락했다니.’

수도의 호사가들이 알면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 만한 소식이었다.

에슬린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맞은편에 앉은 공작은 목숨이라도 내줄 기세로 에슬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에슬린은 한숨을 삼키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찻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그녀는 그제야 제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주님.”

무슨 맛인지도 모를 차를 억지로 넘기며, 에슬린이 입을 열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공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단단하고도 매끄러운 턱선이 드러났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3개월 전 열병을 크게 앓는 바람에 이 저택에 온 다음의 기억을 모두 잃어서…….”

에슬린의 시선이 테이블 언저리를 헤맸다.

“알고 있습니다.”

고개가 번쩍 들렸다.

“네?”

“알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내내 눈치를 봤던 겁니까?”

공작이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기억을 잃은 걸 알고 있었다고?

“설마…… 제가 당신에 대한 소식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작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눈썹을 기울였다. 그가 한쪽 다리를 꼬며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톡, 톡. 마디가 굵은 검지가 일정한 속도로 그 위를 두드렸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에게 기억이 있든, 없든. 어차피 제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기억을 이유로 제게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건 마치 아주 오래 기다려 온 먹잇감을 보는 듯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에슬린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분명 따뜻한 차로 몸을 데운 것 같았는데, 왜…….

왜 이렇게 갑자기 춥지?

“알겠습니까, 에시?”

공작이 양손을 무릎 위로 모아 쥐었다. 핏빛 웅덩이를 보는 듯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에슬린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나른한 웃음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절대 제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사냥을 마친 맹수 앞에서, 에슬린은 목덜미를 물어뜯긴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