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로부터 이틀이 흘렀다.
오늘도 에슬린은 공작의 침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오후 티타임과 저녁 식사 사이의 애매한 시간.
에슬린은 부러 그 시간을 택해 공작의 침실을 정돈했다. 하루에 딱 한 번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그와 마주치는 건 하루에 한 번으로 족했기 때문에.
“와 있었군요.”
등 뒤에서 문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에슬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불을 정리하던 손길이 뚝 멈추었다.
“이런 건 됐습니다.”
공작이 이불의 주름을 펴던 에슬린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 접촉 하나에 온몸이 차갑게 굳었다.
그가 에슬린의 손등을 엄지로 가만히 쓸었다. 검을 쥐는 사람답게 공작의 손은 조금 거칠었고, 여전히 뜨거웠다.
“얼굴이 창백한데, 어디 아픕니까?”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눈동자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에슬린은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끈적하게 이어지던 손길이 툭 떨어졌다.
“청소를 마쳤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에슬린은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공작이 별다른 대꾸 없이 그 모습을 느리게 훑었다.
하아.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기다려요. 차를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침대 옆 설렁줄에 손을 뻗었다. 에슬린이 재빨리 몸을 기울여 그 움직임을 막았다.
“죄송하지만.”
에슬린은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이 많습니다. 차가 드시고 싶으시면 준비해 가져오겠습니다.”
공작에게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시라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에슬린은 빠르게 덧붙이고 몸을 돌렸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함부로 물러나는 건, 하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공작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제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에슬린의 걸음이 멈추었다. 저절로 눈썹이 구겨졌다.
“네?”
“제게 화가 났을 때, 당신은 그런 식으로 저를 피하곤 했죠.”
“그런 게 아닙니다.”
“제게 불만이 있다면 말해요. 단순히 기억 때문이라기엔…….”
머리 위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거운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당신이 지나치게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서늘했다.
“가주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에슬린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단조롭게 중얼거렸다.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았던 건,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저 같은 일개 하녀에게…….”
“일개.”
공작이 에슬린의 말을 되짚으며 피식 웃었다.
“일개 하녀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공작이 한 번 더 거리를 좁혔다. 숙인 시야에 반질반질한 신발이 훅 가까워졌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언제든 하녀 일은 관두게 할 수 있습니다. 아, 기억을 잃었다고 했나요?”
“가주님.”
“그럼 다시 한번 말해 주겠습니다. 언제든 그 일은 그만두게 할 수 있어요.”
“…….”
“당신이 원하지 않았기에 참고 있는 겁니다. 난…….”
무언가를 억누르듯 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 늘 참고 있단 말입니다.”
주먹을 쥔 공작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에슬린은 대꾸할 말을 고르다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잠깐의 침묵이 지났다.
그가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얼굴이 창백합니다.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쉬었다 가도록 해요.”
지친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그러나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다른 일이 많아 바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 또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문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슬린이 그제야 살짝 고개를 들어 공작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묘하게 뒤틀린 표정으로 에슬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앞으론 제 침실에서만 일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잠시 휴식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줄은 몰랐군요.”
“가주님.”
“하녀장에게는 제가 말해 두죠.”
“가주님, 안 됩니다.”
에슬린이 숙였던 허리를 번쩍 세웠다.
그의 입술 끝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검붉은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기색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왜요? 그러다 우리 관계를 들키기라도 할까 걱정됩니까?”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당신 하나 보호하지 못할 머저리 같아 보여요?”
명백한 냉소. 싸늘한 비아냥.
처음이었다, 그가 이렇게 쏘아붙인 것은.
하지만 동시에 그건, 에슬린이 기억하는 리페리우스 공작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것이기도 했다.
에슬린은 입을 다물고 공작의 눈을 응시했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결국 공작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제기랄,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였다.
“……미안해요. 못되게 말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에슬린은 미간을 좁혔다. 먼저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건 그답지 않았다.
‘무의미한 기 싸움이네.’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질식할 것 같은 이 공기와 적응되지 않는 저 남자에게서 말이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부디 제발, 오늘은 이만 물러가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
에슬린이 다시금 허리를 숙였다.
공작은 그런 그녀를 응시하다, 결국 체념하듯 작게 허락을 내렸다.
행여나 다시 붙잡힐까, 돌아서는 에슬린의 걸음은 매우 빨랐다.
탁. 침실 문이 닫혔다.
에슬린은 커다란 방문 앞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휴…….”
내내 막혀 있던 숨이 그제야 길게 터져 나왔다.
* * *
‘에슬린, 가주님께서 침실 상태가 불만스러우신지 침실만 전담할 하녀를 보내라고 하시더구나. 네가 도맡아서 좀 해야겠다.’
공작은 결국 제 고집대로, 그녀를 자신의 침실에 묶어 두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에슬린의 몸은 한가해졌으나, 그녀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하아.”
에슬린은 별채로 향하는 회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싸늘한 북부의 칼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지친 그녀는 추위를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공작의 침실을 정돈하고 나오면 늘 이렇게 녹초가 되곤 했다.
‘오늘은 별일 없어서 다행이었어.’
그날 이후, 공작은 에슬린을 몰아세우거나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늘 차를 마시고 가라, 식사를 하고 가라 권유하긴 했지만 에슬린이 정중히 거절하면 더는 붙잡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희뿌연 입김과 함께 그녀의 한탄 섞인 중얼거림이 튀어 나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
이 상태로 1년이나 버틸 수 있을까?
마음이 복잡했다.
에슬린의 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회랑 벽면 한쪽에 새겨진 리페리우스 공작가의 문장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문장의 주인에게 지금까지 시달렸기 때문일까. 저택 어디에 가도 있는 그 문장이 새삼스럽게 눈에 와 박혔다.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 중립을 상징하는 천칭…….’
에슬린은 씁쓸하게 그 문장을 훑었다.
‘그것도 이제 옛말이지.’
방금 만난 남자는 중립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낯을 하고 있었다.
테베트 리페리우스.
리페리우스 역대 가주 중에서도 가장 냉혈한이라고 소문난 악마 공작.
그런 그가 저렇게 기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과거에 젖은 에슬린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졌다. 그녀는 리페리우스의 천칭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에슬린은 천천히 회랑의 벽면을 향해 움직였다.
리페리우스 문장 위에 있는 건, 제국의 문장이었다.
‘한땐 이 문장이 새겨진 옷만 입을 수 있었지.’
교차하고 있는 쌍검과 그 안에 보호받듯 새겨진 작은 고블릿 잔.
‘베르타니아의 성배.’
에슬린은 그 고블릿 잔을 손가락으로 덧그려 보았다.
‘성배가 사라진 지도 벌써 100년…….’
‘성배’는 베르타니아의 다음 황제를 계시해 주던 성물이었다.
그러나 100년 전부터 그 모습을 감추었다.
누구는 마우시스 신이 다시 거둬 갔다느니, 누구는 마물들이 훔쳐 갔다느니 하고 쑥덕댔으나 그중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성배가 사라지니, 황제를 가려 줄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후계자들은 피 터지는 전쟁을 시작했다.
최후에 살아남는 자가 다음 황제.
성배만큼이나 간단한 방법이었다. 황좌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자신의 아버지인 로텐 베르타니아 또한 친형을 직접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나는 결국 지고 말았지만.’
한때 에슬린 또한 그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자신의 숙적이었던 1황자를 무찌르고 황제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
에슬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1황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리페리우스 공작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침실에서의 다정한 얼굴이 아닌, 싸늘하고 냉혹하기 그지없던 그 얼굴이.
‘리페리우스의 천칭은 1황자 쪽으로 기울었어.’
그날, 1황자의 지시로 자신에게 독배를 들고 온 건 리페리우스 공작이었다.
죽는 날의 기억은 대부분 흐릿했으나, 그 얼굴만큼은 어떻게 잊겠는가?
대대로 중립을 고수하던 리페리우스가 1황자 편에 선 역사적인 날이었는데.
문득 오른쪽 벽에 걸린 금속 장식이 보였다.
어찌나 반질반질 닦아 놓았는지 제 얼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역겹네.”
에슬린은 장식에 비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과 짙푸른 눈동자는 전생에 가졌던 것과 똑같은 빛깔이었다.
그러나 전생과는 명백하게 다른 인물이다.
눈코 입의 모양이나 체격이 조금 달라진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인상을 바꾼 건, 그 생기 없는 표정 탓이 컸다.
볼품없이 마른 얼굴과 총기라곤 없는 눈동자, 창백한 낯빛.
모든 독기가 사라져 그저 현실에 순응하고자 하는 패배자의 얼굴…….
자신이 기억하는 제 얼굴은 이런 게 아니었을 터다.
까드득.
공작가의 문장을 긁는 손끝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날 죽인 공작과 비밀 연인 관계라니.’
이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것이다.
애써 잊으려 했던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공작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도, 패배한 주제에 이런 식으로 살아남은 자신의 구질구질함까지.
모든 게 수치스러웠다.
“…….”
에슬린은 다소 충동적으로 걸음을 돌렸다. 회랑을 성큼성큼 되돌아 나가는 몸짓에 망설임은 없었다.
하녀장이 어디에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 3개월간 하녀장의 눈에 띄기 위해 그녀의 동선은 다 파악해 두었으니까.
본채 가장 구석에 있는 사용인 휴게실에 들어섰다.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훅 끼쳐 왔다.
하녀장은 한쪽 창가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에슬린의 등장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에슬린? 네가 지금 여긴 웬일이니?”
에슬린은 하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더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하녀장님, 추천장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더 이상의 굴욕은 사양이다.
“어디든 상관없어요. 여길 떠날 수만 있다면.”
이건 패배자의 추잡한 발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적의 편에서 자신에게 죽음을 권한 남자를, 그의 연인 노릇을.
어떻게 더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