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델의 눈썹이 급한 경사를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아주 황당한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녀장님, 부탁드릴게요.”
에슬린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아델이 그런 에슬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유 없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울 아이는 아니었다.
“갑자기 이유가 뭔지 들어나 보자.”
아델이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택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타당하다면 당연히 추천장을 써 주마.”
그녀는 턱짓으로 에슬린에게 자리를 권했다. 에슬린이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아델의 맞은편에 앉았다.
“며칠 전,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던 동생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동생?”
“네. 지금 수도에서 머물고 있다고…… 저와 같이 살고 싶다고요.”
“…….”
“수도로 가고 싶습니다, 하녀장님.”
아델은 물끄러미 에슬린의 얼굴을 보았다. 매끈한 미간에 살짝 잡힌 주름과 흔들리는 짙푸른 눈동자는 그녀가 진심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델은 찻잔 위로 시선을 옮겼다.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그래……. 네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가족을 찾은 건 잘된 일이구나. 네 사정은 잘 알겠다.”
“그럼……”
“하지만 지금은 안 돼.”
“하녀장님!”
하녀장의 단호한 고동색 눈빛이 에슬린을 향했다. 에슬린은 잘근잘근 입술을 짓씹었다.
그 초조한 기색을 읽은 아델이 다독이듯 입을 열었다.
“한 달이다. 한 달만 기다려. 지금은 알다시피 몹시 바쁘지 않니. 저택 일만도 그런데, 다가올 봄맞이 대청소와 단장도 있고.”
“한 달이라니 너무 길어요. 전……”
“에슬린 로즈벨, 3개월 전 밤에 날 찾아왔던 걸 기억하지?”
“…….”
“난 그때 네게 어렵게 기회를 줬어. 나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한 달만 좀 참아 주렴.”
에슬린은 테이블 아래로 늘어뜨린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3개월 전 은혜를 들먹이니 에슬린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녀장님, 집사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은 조금 더 에슬린을 응시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넌 똑똑한 아이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
“알았지?”
그러나 에슬린은 테이블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끝끝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 *
“어? 에슬린.”
“세피아.”
하녀장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동료 하녀인 세피아를 만났다. 그녀의 짧은 붉은색 단발머리가 바쁘게 흩날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에슬린은 대충 얼버무렸다.
“어디 가는 중이야?”
“이제부터 빨랫간에 가려고. 기사님들이 돌아오시니 일이 미친 듯이 밀려드네.”
세피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공작이 돌아오고 사흘 뒤 기사들이 돌아왔다. 텅 비었던 저택에 사람이 차자 당연히 일거리도 늘었다.
문득 버려진 분수대 앞에서 만난 공작이 떠올랐다. 숙련된 기사들조차 사흘이나 걸리는 거리를 단 하루 만에 주파해 왔던 그가.
에슬린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공작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같이 갈래.”
“빨랫간을?”
“응.”
세피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넌 네 일 다 마친 거 아냐?”
“그렇긴 한데…… 그냥 도와줄게.”
세피아는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며 활짝 웃었다.
‘머리가 복잡할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니까.’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휴, 쌓인 거 봐라.”
세피아가 구시렁댔다.
빨랫간에는 딱 보기에도 산더미 같은 일거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에슬린은 군말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아 손을 움직였다.
하인 하나가 아주 큰 나무통에 물을 한가득 채워 주었다. 세피아는 그 물을 떠 와 능숙한 손길로 벅벅 옷감을 문질렀다.
둘 다 요령이 좋은 편이었기에, 쌓여 있던 빨랫감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청결한 기운과 상쾌한 냄새가 주변을 메웠다. 시궁창 같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에슬린, 네가 도와줘서 살았어.”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
“근데, 진짜 손 시리긴 하다.”
으으, 세피아가 진저리를 치며 손에 입김을 불었다.
한겨울의 빨래는 얼어붙는 손끝과의 전쟁이었다. 에슬린 또한 손을 빼내 후후 불었다. 빨갛게 언 손가락이 시야에 잡혔다.
문득 한겨울 호숫가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호수의 가장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었던 적이 있었다.
‘전하! 이 겨울에 찬물에 손을 담그시다뇨! 여봐라, 얼른 따뜻한 화로를 준비해라.’
에슬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땐 심지어 아주 두꺼운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장갑 끝이 조금 젖은 것만으로 시녀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이었다.
“에슬린, 에슬린.”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에슬린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응?”
“저기…….”
세피아가 에슬린의 등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몸을 돌려 빨랫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꼬리 한쪽이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멍청이가 오네.”
반갑지 않은 손님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슬린은 빨랫감을 담가 두고 몸을 일으켰다.
건들거리며 다가온 남자는 에슬린과 키가 비슷했기에, 올려다보는 느낌이 나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에슬린.”
그는 습관적으로 에슬린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불쾌한 시선이었다.
“오랜만에 보네?”
“제이슨 발론.”
“에이, 왜 그래? 우리 사이에. 그냥 제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에슬린은 그런 제이슨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무슨 일인지 용건만 말해, 제이슨.”
일부러 이름을 강조해 부르자, 제이슨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참 나. 싸늘하기는. 뭐, 좋아. 여잔 좀 튕기는 맛이 있어야지…….”
제이슨은 비식 웃으며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대답은 생각해 봤어?”
“무슨 대답?”
“무슨 대답이냐니? 내가 너에게 청혼했잖아.”
“뭐어? 청호온?”
마지막 외침은 잠자코 있던 세피아에게서 튀어나왔다. 타악! 그녀는 물바가지를 팽개치고 벌떡 일어섰다.
“아, 그거.”
에슬린이 짧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웃음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제이슨이 만족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동쪽 숲 앞에 있는 집을 알아봤어. 인적이 좀 드물긴 하지만 뭐, 너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집일 거야.”
이미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전제하였다. 에슬린은 가만히 그 왈왈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가급적 일은 계속해 줬으면 해. 둘이 먹고사는데 나만 벌어 오는 건 불공평하잖아?”
“…….”
“당연히 집안일은 내가 좀 도와주지. 난 여자를 존중할 줄 모르는 보통 남자들과는 다르니까. 아, 근데 난 아침밥은 꼭 먹는 스타일이야. 아이는 한 다섯 정도면 왁자지껄하니 좋겠고.”
“하, 참.”
세피아가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제이슨의 눈동자가 살짝 세피아를 향해 굴렀다가 다시 에슬린에게 와 박혔다.
“그래서 날짜는 언제가 괜찮겠어? 아무래도 봄이 낫겠지만 네가 원한다면야 난 이 겨울에라도 상관없어.”
“제이슨 발론.”
“제이라고 부르라니까. 왜?”
“내가 언제까지 네 망상을 더 듣고 있어야 해?”
“……뭐?”
제이슨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찌푸려졌다. 에슬린은 등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그때 꽃 하나 던지고 도망치는 바람에 이 말을 못 했는데.”
그녀는 눈을 내리깔아 제이슨을 내려다보았다.
“집적대지 말고 꺼져.”
눈앞의 얼굴이 서서히 새빨갛게 물들었다. 에슬린은 피식 웃었다.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꼴이 아주 볼만했다.
우스웠다. 제이슨의 표정이. 이 모든 상황이…….
아, 그래.
사실은 그 사람에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말란 말이야.”
비록 내가 패배했을지언정 자존심까지 버린 기억은 없다.
“제발 나 좀 그만 건드려.”
그러니 당신을 받아들일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씩씩대는 제이슨이 무어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에슬린은 그저 이 모든 상황이 다 지겹고 피곤했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반드시 이 저택을 떠날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 * *
세피아가 방 한가운데에 있는 화로에 장작을 넣었다. 금세 실내가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가운을 벗어 놓고, 자신의 침대로 쏙 들어갔다.
“제이슨 요새 정원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단단히 미쳤나 봐.”
두꺼운 솜이불 아래로 눈만 빼꼼 내민 채 세피아가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글자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흘깃 보았다.
“감히 너한테 청혼하다니.”
세피아는 진심으로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에슬린이 그런 세피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아깐 정말 통쾌했어. 하녀들에게 집적댄 게 한두 번도 아니었잖아. 으으.”
“그랬던가?”
“그래. 작년까지는 헬렌이었거든. 사실 헬렌이 그렇게 나간 건 다 저놈 때문이었지…….”
세피아의 목소리가 안타깝다는 듯 잦아들었다.
둘은 잠시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들은 헬렌의 소식은 사창가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추천장 없이 급하게 저택을 나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하녀들의 최후란 대부분 그런 것이었다.
세피아가 어색한 공기를 몰아내려는 듯 큼큼 헛기침했다.
“아무튼 그놈이 꼬리 말고 도망가서 아깐 재미있었지만, 너 조심해.”
“조심하라니?”
“제이슨 말이야. 저래 봬도 한번 화내면 미친 듯이 폭주한다니까.”
에슬린은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문제가 많은 정원사를 왜 계속 쓰는 거야?”
“뭐, 듣자 하니 하인장님의 친척이라나 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사람 쓰는 게 엉망이군.
에슬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당분간 정원 근처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어, 그럴게.”
얌전히 대답하자 세피아가 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거두었다.
“난 그만 자야겠다. 넌?”
“난 이것만 읽고.”
에슬린은 손에 쥐고 있던 소식지로 시선을 옮겼다. 선명하게 인쇄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 전 소식지를 읽어서 뭐 해? 날짜도 안 맞고, 재미도 없는데.”
“그냥, 내 취미잖아.”
잠들기 전 독서는 에슬린의 유일한 취미이자 습관이었다. 물론 황녀였던 전생에서 말이다.
몸에 밴 습관이란 좀처럼 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날짜가 지나 버릴 소식지를 얻어다 읽곤 했다.
책은 구하기 어려웠으니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너도 참 별나다. ……하암. 그럼 난 먼저 잘게. 에슬린,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잘 자.”
세피아가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에슬린은 램프의 불을 조정해 최대한 어둡게 만들고, 그 앞으로 한껏 몸을 기울였다.
희미해진 불빛 아래 활자들이 춤을 추는 듯했다. 에슬린은 그 춤사위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날이 밝았다.
리페리우스 공작가의 사용인들 사이에 은밀한 소문이 돌았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그 스캔들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화제를 끌었다.
‘그 에슬린 로즈벨과 제이슨 발론이라니.’
‘미녀와 야수의 조합이군.’
누군가 그렇게 속삭였다.
‘야, 야수는 저주받은 왕자님이기라도 하지. 제이슨은 그냥…….’
으레 따라오는 반박은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