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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화 (5/147)

5화

“그거 알아? 가주님께서 이번 귀환 때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가져오셨대.”

“뭐? 다이아몬드? 드디어 마음에 드는 영애라도 발견하신 건가?”

“설마. 저 얼음장 같은 가주님께서?”

“에이, 또 모르는 일이지.”

“그런가?”

하녀 둘이 까르르 웃었다.

에슬린은 계단을 닦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공작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반사적으로 멈춰 있던 손이었다.

“에슬린, 이제 됐어. 그만 도와줘도 돼.”

“아.”

옅은 갈색 머리 하녀가 다가와 말했다. 그녀의 가슴팍엔 에슬린과 같은 금색 배지가 달려 있었다.

에슬린은 계단에서 손을 뗐다. 수석 하녀, 레나가 에슬린을 바라보며 웃었다.

“일 없으면 그냥 편하게 있어도 될 텐데. 하여튼 성실하다니까.”

중앙 현관을 청소하는 레나와 앤을 먼저 돕겠다고 나선 건 에슬린이었다. 요즘 에슬린의 정해진 일과였다.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누구든 돕겠답시고 끼어드는 것.

덕분에 에슬린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복잡한 생각을 지울 수 있다는 점에서 에슬린 또한 좋았다.

“아직 마무리가 덜 됐어.”

“됐어, 됐어. 네가 도와줘서 벌써 다 끝났는걸. 마무리는 우리가 할게. 그것보다, 넌 네 일 보러 갈 시간 아니야?”

“…….”

정곡을 찔린 에슬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넌지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니 해가 길어져 있었다.

“그래, 그러네.”

에슬린은 싱긋 웃으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저, 에슬린.”

“응?”

레나는 말을 고르듯 한참을 입술만 달싹였다.

“너 말이야…….”

“응. 내가 뭐?”

“그…….”

좀처럼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슬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문득 머리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혹시 제이슨 발론 얘기하려는 거야?”

“어? 어어…….”

“레나랑 난 그 소문을 듣고 너무 깜짝 놀랐어.”

불쑥 끼어든 건 뒤에 서 있던 앤이었다. 두 쌍의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에슬린에게 박혀 들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진짜야? 아니지?”

레나가 물었다.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슬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헛소문이니까 걱정하지 마.”

“아, 다행이다!”

둘의 표정이 동시에 밝아졌다.

“그거 봐. 에슬린이 왜 그런 놈이랑 만나냐고 했잖아.”

“근데 그럼 그 소문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글쎄…….”

앤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슬린은 별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다시 창밖을 본 뒤 몸을 돌렸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난 가 볼게.”

“그래, 에슬린! 도와줘서 고마워.”

“혹시 우리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 뭐든지 말이야.”

“알겠어.”

살짝 웃으며 그녀는 레나와 앤을 뒤로 하고 별관을 나섰다.

‘지겨워 죽겠네.’

에슬린은 천천히 걸었다. 며칠 전부터 반복되는 대화에 이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가슴께가 답답해 손으로 문질렀다. 마음이 혼란스럽다 보니 뭘 먹어도 체한 듯 속이 묵직했다.

에슬린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일단 오늘 일이나 잘 끝내고 생각하자.’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솔직히 공작과의 일만으로도 머리는 한계였다. 제이슨 따위에게 뇌를 할애할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제이슨 발론 정도야 마음만 먹는다면…….

“에슬린!”

누군가 거칠게 어깨를 잡아 돌렸다. 멀리서 달려온 듯 헐떡이는 목소리와 함께였다.

“……슬슬 찾아올 것 같았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바쁘니까 용건만 말해, 제이슨 발론.”

“너, 너! 나한테 그런 말투를!”

에슬린이 팔짱을 끼고 눈앞의 인물을 응시했다. 제이슨은 콧김을 내뿜으며 에슬린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근데 그럼 그 소문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조금 전 레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연히 이 멍청이겠지.’

에슬린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빨랫간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제이슨의 동선은 손바닥 보듯 훤한 것이었기에, 그를 피하는 것 따위 일도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작정하고 뒤를 밟으면 어쩔 수 없지만.

“할 말 없으면 갈게.”

에슬린이 몸을 돌리자 제이슨이 다급하게 그녀를 잡아 세웠다.

“너!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우리의 소문 말이야.”

에슬린은 속으로 비웃었다. 어떻게든 엮어 보려는 꼴이 같잖았다.

“그래. 들었어.”

“하! 너는 그걸 들었으면서도 날 안 만나러 와?”

“어차피 헛소문인데 뭐 하러 널 찾아가?”

“뭐?”

“저리 비켜. 나 바빠.”

에슬린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제이슨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너 나한테 왜 그러는데? 너도 내가 좋다고 했잖아!”

“대체 내가 언제?”

에슬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몇 주 전에 내 가위를 주워 주며 웃었잖아!”

“…….”

왈왈왈, 왈왈왈왈.

그렇게 들렸기 때문에 에슬린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나 다시 어깨를 잡혔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거기 서!”

“이거 놔.”

그녀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제이슨의 손을 털어 냈다. 제이슨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날 받아 줄 건데?”

“내가 널 왜 받아 줘야 하는데?”

“에슬린 로즈벨!”

“그래, 나 에슬린 로즈벨인 거 알아.”

싸늘한 대꾸에 제이슨은 빠득 이를 갈았다.

“너 진짜, 얌전하고 착한 애인 줄 알았는데.”

에슬린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얌전하고 착하다니…….

맹세컨대 단 한 번도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디엘이 들으면 몹시 기뻐하겠군.”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제이슨은 미간을 구기며 한 발자국 다가섰다.

“뭐라고 중얼대는 거야?”

“꺼지라고 중얼댔어. 굳이 듣고 싶다면 또 말해 줄 수 있어.”

“이익!”

제이슨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타오르는 회색 눈동자를 한 번 노려본 뒤, 에슬린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러다 진짜 늦겠어.’

자신이 늦는다고 공작이 화를 낼 것 같진 않았지만, 그 때문에 한마디라도 더 섞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감히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대면, 진짜 가만 안 둬.”

새파란 일갈이었다.

제이슨은 입술을 굳혔다. 너 따위가 가만 안 두면 어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에슬린이 등을 돌렸다. 그제야 부들부들 떨고 있던 제이슨에게서 비굴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

“씨이. 에슬린!”

“하, 진짜. 그렇게 나랑 만나고 싶거든 남부의 다이아몬드라도 가져오든가. 그럼 생각해 볼 테니까.”

에슬린은 되는대로 지껄였다.

“그걸 말이라고! 너 그렇게 사치스러운 애였어?”

“그래. 그러니까 그만 귀찮게 굴어. 남들 앞에선 한마디도 못 하면서 뒤에서만 이렇게 수작 부리지 말고.”

제이슨이 씩씩거렸다. 에슬린은 미련 없이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젠장!”

뒤에서 제이슨의 고함이 들려왔다. 제 분을 참지 못하고 돌기둥을 걷어차다 악! 비명을 내지른다.

‘가지가지 하네.’

에슬린은 고개를 저었다.

“나 포기 안 해! 못 해!”

악에 받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에슬린은 한 번 더 그 모습을 비웃은 뒤 발을 재촉했다.

‘어쩌다 저런 거랑 엮여서는.’

걷는 걸음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빠르게 걷자 금세 긴 회랑의 끝에 다다랐다.

모퉁이만 돌면 본채가 보일 터였다.

‘서둘러야겠어.’

다소 급한 움직임으로 그 모퉁이를 돌 때였다. 몸이 크게 휘청였다. 비틀거리는 에슬린을 뭔가가 단단히 잡아 세웠다.

“……!”

그 ‘뭔가’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에슬린은 숨을 집어삼켰다. 그녀와 마주친 사람 또한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가주님.”

리페리우스 공작이었다.

‘공작이 갑자기 왜 이런 데서 튀어나오지?’

에슬린은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공작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금세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웃는다.

눈부신 오후였다. 햇빛에 빛나 반짝이는 얼굴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침실로 가는 길입니까?”

“……네.”

공작이 매끄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었다.

“데려다주겠습니다.”

문득 팔에서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에슬린은 그제야 자신의 한쪽 팔이 붙잡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에슬린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늘 그렇듯 공작의 손은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아뇨, 괜찮습니다. 가주님께서는 다른 볼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에슬린이 공작의 한쪽 손에 든 검을 보며 말했다.

“아, 이거.”

공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슬린은 그가 무기고나, 연무장…… 하여튼 그런 곳에 볼일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볼일이라. 있긴 있었죠.”

공작은 나른한 미소를 띤 채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에슬린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러 묻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작이 가벼운 어조로 그 침묵을 깼다.

“그보다, 방금 하녀장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네, 그러셨군요.”

갑자기 자신의 일과 보고라니.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없어 에슬린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하녀장이 이상한 소릴 하던데. 설명 좀 해 주겠습니까?”

에슬린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공작이 웃으며 시선을 맞춰 왔다.

그 눈동자에서 에슬린은 문득 온몸을 휘감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한 달 뒤에 추천장을 써 주기로 했다더군요.”

저절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슬린 로즈벨의 추천장 말입니다. 본인이 써 달라고 졸랐다던데…….”

“가주님, 그건…….”

“직접 말해 봐요. 내가 들은 게 맞습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귀가 떨어져 나갈 듯 달콤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에슬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공작이 아까부터 무언가를 꾹 참고 있다는 것을.

“에시.”

그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움직였다. 몇 번이고 움찔거리던 손끝이 그러나 결국 에슬린의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툭 떨어졌다.

“정말 날 버릴 생각이었어요?”

붉은 홍채 안쪽으로 온갖 감정들이 크게 일렁이며 소용돌이쳤다.

“날 버리고.”

그는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눌러 삼켰다.

“정원사 놈과 달아날 생각이었습니까?”

“……뭐라고요?”

에슬린의 몸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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