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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6화 (6/147)

6화

‘이건 또 무슨 삼류 망상이야?’

에슬린은 당장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고쳐 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공작의 눈을 정면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분노, 배신감, 실망, 슬픔…….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을 압도하고 떠오른 건, 깊은 고통이었다.

“이리 와요.”

그는 에슬린을 본채로 이끌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공작의 응접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따뜻한 공기가 차갑게 언 뺨을 녹였다. 달칵. 등 뒤에서 가차 없이 문이 닫혔다.

공작은 벽난로와 가까운 곳, 이 방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에 에슬린을 앉게 했다.

왠지 모르게 넋이 나가 있던 에슬린은 그제야 눈앞의 남자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가주님.”

“얘기해 봐요. 내가 들은 게 맞습니까?”

공작이 물었다. 내부는 커튼을 모두 내려 두어, 대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에슬린은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이슨 발론과 관련한 소문이라면, 아닙니다.”

“추천장 얘긴 맞는다는 말이군요.”

“그건…….”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침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공작에게선 잠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한 발짝 다가섰고, 에슬린의 앉은 몸 위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가주님.”

에슬린은 흠칫 놀라 등을 물렸다. 리페리우스 공작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기 때문이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국의 공작이 어떻게…….”

“당신에게 한 맹세조차 잊었습니까?”

그가 에슬린의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커다란 손 아래에 깔린 스커트 자락이 살짝 구겨졌다.

공작이 고개를 들어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맹목적인 시선이었다.

“난 더 이상 당신 앞에서 리페리우스 공작이 아닐 것이라고 했습니다.”

“…….”

절절한 눈동자를 에슬린은 더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정작 고개를 떨어뜨린 건 눈앞의 남자였다.

“떠나겠다는 생각은 접어요.”

“가주님.”

“당신은 절대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접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 당신을…….”

그는 쉬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에슬린의 무릎을 쥔 손의 힘이 조금 강해졌다. 손등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에슬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 저는 가주님과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자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슬린과 눈을 맞추었다. 붉은기 도는 검은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그러니까 가주님 기억 속 인물과 전…… 전혀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에요.”

“…….”

에슬린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공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내를 읽기가 어려웠다.

“상관없습니다. 기억은 어차피 돌아올 테니까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듯한 단호한 말투였다. 이후 공작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짧은 침묵을 지켰다.

쩌적. 벽난로에서 장작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에슬린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듯 공작이 부드럽게 무릎을 토닥였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도에서 마법사를 부를 겁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마법사라고요?”

“네. 기억 상실에 걸린 이들이 마법사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

에슬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사라니.

애초에 자신은 잃은 기억이 없었다.

이 상태에서 마법사를 만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몸의 원래 기억이 되살아나게 되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빙의한 걸 들키게 될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기 연인이라 믿었던 여자가 사실은 제 손으로 죽인 황녀라는 걸 알았을 때…….

공작의 표정은 어떨까?

에슬린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에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기억을 핑계로 절 떠날 수 없다고.”

공작이 자신의 손등 위로 이마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 나른한 목소리에 에슬린은 주문이라도 걸린 듯 꼼짝할 수 없었다.

“하녀장에게 추천장은 없던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가주님!”

에슬린이 몸을 들썩였다. 벌떡 일어나 따지고 싶었으나, 무릎을 내리누르는 커다란 손 탓에 그조차 쉽지 않았다.

공작이 눈을 맞추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매끄러운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억이 없어 부담스러운 거라면, 제가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에슬린의 무릎에서 천천히 손을 거뒀다. 단단한 손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침실 일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죠.”

“…….”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절대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붉게 일렁이는 눈은 좀 전과 달라 보였다.

‘아.’

에슬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공작이 일보 후퇴했다는 것을.

에슬린을 공작저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그녀가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

더는 다가오지 않을 것임을.

‘1년……. 아니, 6개월.’

에슬린은 기한을 가늠해 보았다.

어차피 한 달 뒤에 나가는 건 허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최소 자금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는 게 답이었다.

‘남부로 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자. 다른 대륙으로 떠나는 거야.’

그곳에선 추천장이 없는 이국인이어도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초기 자금이 조금 부족해도 일을 한다면 금세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6개월 후면 초여름쯤이겠네.’

배를 타기 나쁘지 않은 계절이다.

“……마법사는 부르지 마세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축 늘어져 있던 공작의 널따란 어깨가 바짝 경직했다.

“제가 어떻게든 기억을 되찾으려 노력해 볼게요.”

그 말 하나에 공작이 입꼬리를 움직였다. 어떻게든 웃어 보려는 듯한 시도였으나, 그에게서 나온 건 씁쓸한 미소뿐이었다.

거짓말하는 에슬린의 심장이 콕콕 찔릴 정도로 애달픈 표정이었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뭐든 약속하겠습니다.”

“절 공작가의 하녀로만 대해 주세요.”

공작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러나 에슬린은 단호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결국 그가 미소를 덧그리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말투와, 애칭도요.”

“…….”

이번에야말로 공작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에슬린은 그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편하게 설 수 있도록, 공작이 자신의 몸을 뒤로 물려 주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전 계속 공작저에서 가주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양손을 앞치마 앞에 공손하게 모아 쥐었다. 고개를 꺾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을,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

공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시선이 반전되었다. 그녀는 살짝 허리를 굽혔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예정대로 침실 정리는 마치겠습니다. 다 끝나면 차를 올릴까요?”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괜찮다.”

공작은 꽉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에슬린은 등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존댓말 하지 않는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북부의 매서운 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에슬린은 세피아와 함께 사용인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식사를 깔짝대?”

“그냥, 입맛이 좀 없네.”

멀건 수프를 휘젓는 손길에 성의가 없었다.

하녀에 빙의한 뒤, 아직도 적응이 어려운 건 바로 이 식사였다. 태어날 때부터 황실의 온갖 음식에 길들어 있던 그녀였다.

대단한 미식가도, 식탐이 많은 타입도 아니었으나 이 차가운 빵과 희멀건 수프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에슬린 너 또 업무가 바뀌었다며? 식당 보조로.”

세피아가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그릇을 다 비우고 주스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응. 그렇게 됐어.”

“가주님 침실 담당이 그렇게 힘들어? 네가 못 해낼 정도라니.”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에휴, 하긴. 가주님이 좀 깐깐하셔야 말이지.”

세피아가 짧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멋대로 이유를 짐작한 것 같았지만, 에슬린은 굳이 말을 더하지 않았다.

“아, 배고프다!”

식당 안으로 사용인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제대로 된 점심시간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세피아, 오늘은 식사가 빠르네.”

“응, 레나. 나 요새 업무 하나 추가됐거든. 빨리 가 보려고.”

레나가 그렇구나, 중얼거리며 에슬린 옆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어, 에슬린! 너 여기 있었어?”

어디선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레나의 뒤를 따라 쟁반을 내려놓은 앤이었다.

“응. 왜?”

“아니, 제이슨이 아까부터 널 찾고 있는 것 같아서.”

“제이슨이?”

“……에슬린, 제이슨이다.”

세피아가 어깨를 툭툭 쳤다. 에슬린은 반사적으로 식당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흉물은 대체 뭐야?”

에슬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 있는 모든 사용인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니까 그건, 커다란 공작새였다.

“세상에. 쟤가 미쳤나 봐.”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이슨 발론은 프릴이 덕지덕지 달린 연미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목깃 뒤로 촘촘하게 잡힌 주름이 활짝 펼쳐져, 그가 걸을 때마다 심하게 펄럭거렸다.

뭐지? 저런 옷도 돈 주고 사는 건가?

에슬린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에슬린 로즈벨.”

공작새가 에슬린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양손으로 소중히 쥐고 있던 정사각형의 상자를 내밀었다.

“네가 원하던 다이아몬드를 가져왔어.”

뭐? 다이아몬드? 어머! 주변에서 놀라움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원하던 다이아몬드? 무슨?’

에슬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그렇게 나랑 만나고 싶거든 남부의 다이아몬드라도 가져오든가.’

그렇게 말했던 게 떠올랐다.

에슬린은 반도 먹지 않은 빵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 식사는 여기까지인 듯했다.

“이제 나랑 결혼해 줄래?”

에슬린은 눈만 들어 제이슨을 보았다. 자신만만한 표정이 가관이라고 생각했다.

“…….”

그녀는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 보았다.

과연, 그 안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하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헉. 진짜 다이아몬드야?”

“나 처음 봐. 세상에나! 제이슨이 무슨 돈이 있어서?”

“웬일이야!”

주변의 쑥덕거림이 절정에 달했다. 세피아와 앤, 레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에슬린과 제이슨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큼큼. 어때? 멋지지?”

제이슨이 가슴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에슬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목걸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너무 좋아 죽을 것 같아?”

제이슨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에슬린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사용인들까지 모두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상자에 곱게 누워 있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입가를 가리고 청량하게 웃는 에슬린의 모습에, 모든 사람이 잠시 숨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웃어?”

귀가 빨갛게 익은 제이슨이 툴툴거렸다. 에슬린은 눈가 맺힌 눈물을 닦으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투명도, 반사 빛, 경도, 무게…… 모두 엉망이네.”

작게 중얼거린 뒤, 에슬린은 목걸이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짙푸른 눈동자가 냅킨을 눌러 둔 작은 돌멩이에 가닿았다.

망설임 없이 돌멩이를 치켜들었다. 즐거움 가득한 아름다운 미소는 덤이었다.

“가짜 다이아몬드 구하느라 수고했어.”

빠지직!

뭔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식당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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