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에슬린은 저택 내 치료실로 옮겨졌다. 다행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으나, 그 때문에 타는 듯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움직이는 걸음마다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깊게 베였구나. 어쩌다 그랬지?”
공작저 주치의 밑에서 수련 중인 견습 의원이 말했다.
“가윗날에 스쳤어요.”
“저런.”
의원이 상처를 소독했다. 넓은 치료실 한쪽에 앉아 에슬린은 소름 끼치는 아픔을 참아 냈다.
그때 치료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에슬린!”
헝클어진 붉은 머리가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세피아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제이슨 그 미친놈!”
에슬린의 상처를 본 세피아가 울분을 터뜨렸다.
“세피아, 난 괜찮아.”
에슬린이 다독이듯 말했다. 그러나 세피아는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 꾹 말아 문 입술을 풀지 않았다.
“일단 처치는 끝났다. 열이 날지도 모르니 오늘은 치료실에서 머물거라.”
“네, 알겠습니다.”
의원이 붕대 뭉치를 내려놓았다.
“흐음. 하녀장에게는…….”
“제가 얘기할게요. 에슬린, 걱정하지 마.”
대신 대답한 건 세피아였다. 친친 감은 붕대를 보는 얼굴이 여전히 심각했다.
에슬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피를 한바탕 흘렸더니 영 기운이 없었다.
“고마워, 세피아.”
“제이슨 그 미친놈.”
“…….”
세피아가 아득 이를 갈았다.
* * *
치료실에는 네 개의 침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에슬린은 창가에 붙은 침대에 홀로 앉아 있었다. 분노에 찬 세피아를 겨우 달래 일터로 돌려보낸 참이었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베개에 기댄 그녀는 오늘 하루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제이슨 발론…….’
그놈이 그렇게까지 구제 불능일 줄은 몰랐다.
하아. 에슬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문 쪽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앤, 레나.”
“에슬린!”
안타까움으로 물든 두 얼굴을 보며 에슬린은 살짝 웃었다. 두 사람이 한달음에 침대 근처로 다가왔다.
“괜찮아?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레나가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기 가슴을 퍽퍽 쳤다.
“내가 너무 방심했나 봐.”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가까이에 다른 하녀들이 있었을 텐데, 왜 혼자 제이슨에게 맞섰어?”
“그야…….”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러나 에슬린은 말하지 않았다.
“앤, 에슬린을 탓하지 마. 제이슨이 잘못한 거잖아.”
“알아. 속상해서 그러지.”
“제이슨은 어떻게 됐어?”
“…….”
“앤? 레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에슬린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차분히 입을 연 건 레나였다.
“하녀장님이 네 소식을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시며 하인장님께 따지셨어.”
레나는 살짝 에슬린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늘 그렇듯 잔잔한 호수 같았다.
“하인장님께선 제이슨에게 3개월 무급 처분을 내리신대.”
“……그렇구나.”
대충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나 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떻게 제이슨을 내보내지 않으실 수 있지? 곧 은퇴를 앞두고 계셔서 그런가, 판단력이 흐려지신 게 분명해.”
그녀가 분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하녀장이 저택의 실세이긴 하지만, 나이 지긋한 하인장을 완벽하게 누를 순 없었겠지.’
에슬린은 힘의 구조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그러진 마. 난 괜찮아.”
“그래도 제이슨 놈도 놀랐는지 좀 깨갱한 모습이긴 하더라.”
“그건 그래. 당분간 네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걸.”
“저택에도 소문이 다 퍼져서 아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거야.”
앤이 그렇게 말하며 에슬린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래, 다행이네.”
과연 그럴까?
제이슨은 배포가 큰 인물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성이 사라져 탁하던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에슬린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레나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에슬린, 네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어. 열이 오르나 봐.”
“어…….”
스스로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까부터 몸이 춥고 머리가 아프더라니, 의원의 말대로 열이 나는 듯했다.
“우리가 너무 방해했다. 얼른 쉬어. 응?”
“알겠어, 와 줘서 고마워.”
에슬린은 잠시 고민했다.
“저 혹시.”
“응?”
둘은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세피아 좀 다시 불러 줄 수 있을까?”
“그래.”
앤이 웃는 낯으로 선선히 대답했다.
* * *
에슬린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긴 벨벳 의자, 공들여 세공된 장식품들, 금사로 수놓은 두꺼운 커튼, 따뜻한 실내의 온도,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향료의 냄새…….
그리고 자신을 엄한 눈길로 바라보는 눈앞의 인물까지 말이다.
“안 됩니다.”
“왜?”
에슬린은 불만스러운 듯 되물었다.
눈앞의 인물, 디에리안이 그녀를 바라보며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어이없다는 듯한 코웃음은 덤이었다.
“사람을 어떻게 생쥐로 바꿉니까? 그것도 황녀 전하를요.”
“못 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못 하는 겁니다.”
“에이, 뭐야. 재미없어.”
에슬린은 피식 웃었다.
가로로 긴 벨벳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하녀 한 명이 다가와 에슬린의 손이 닿는 곳에 포도 접시를 내려놓았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라고요.”
한겨울에 포도를 재배하게 하는 그 기술이 만능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뭐가 만능인 거지?
에슬린은 웃음을 삼키며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상큼하고 달달한 과즙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대체 생쥐가 돼서 뭘 하시려고요?”
디에리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에슬린에게 물었다. 에슬린은 새삼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당연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야길 엿들어야지. 1황자께서 날 없애기 위해 이번엔 무슨 수를 쓰고 계시나, 하고.”
“하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아님 하녀로 변장이라도 해 볼까? 어때?”
“부탁드리니 제발, 제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은 마시고 얌전히 계십시오. 얌전히요.”
젊은 마법사가 자신의 미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하하. 에슬린이 입가를 가리며 청아하게 웃었다.
“디엘, 넌 그 잔소리 지겹지도 않아?”
“지겹습니다. 저도 지겨워요. 이젠 진짜 그만 말하고 싶다니까요?”
“그럼 그만 말하면 되잖아. 난 잔소리하라고 시킨 적 없어.”
“아이고, 전하…….”
그는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즐겁게 웃으며 포도를 한 알 더 집어 먹었다.
“알았어, 이제 그만 놀릴게.”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요.”
디에리안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삐죽이는 입술은 여전히 뭔가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에슬린은 잠시 그 모습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져 있던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하녀가 다가와 마른 비단을 건넸다. 손에 묻은 과즙을 닦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럼 이제…… 보고할 내용이나 읊어 봐.”
더 이상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 * *
눈을 떴다. 사위는 온통 컴컴했다.
그녀는 제 손을 더듬어 보았다. 버석거리는 거친 이불의 감촉. 싸늘하고 건조한 공기.
“꿈…….”
에슬린은 그제야 과거의 일을 꿈에서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디엘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다음 내용을 더듬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말한 것 같은데……. 그러나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휘이잉.
북부의 칼바람이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려 댔다. 오래돼 틈이 생긴 창틀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추워…….’
에슬린은 몸을 움츠렸다.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심한 한기를 느꼈다. 분명 잠들기 전 의원이 화로를 놓아 주고 갔건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신음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참기 위해서였다.
추운 와중에도 머리는 절절 끓어올랐다. 상처가 난 종아리가 뜨겁고 몹시 욱신거렸다.
이불을 한껏 뭉쳐 쥐며 에슬린은 애써 눈을 감았다. 고통을 잊으려면 잠드는 수밖에 없었다.
짧은 선잠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에슬린은 번쩍 눈을 떴다. 닫혀 있던 치료실의 문이 갑자기 열렸기 때문이었다.
“…….”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랐다. 심지어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에슬린은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달칵.
침대 옆 협탁에 무언가 무거운 게 놓이는 듯했다.
뒤이어 물건을 뒤적이는 소리, 꺼내서 내려놓는 소리 같은 것들이 이어졌다. 모든 동작이 하나같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깨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라.”
“네, 가주님.”
딱딱하게 몸이 굳었다. 한밤중의 침입자는 다름 아닌 리페리우스 공작이었다.
“공기가 차군. 화로와 장작을 더 가져와.”
“알겠습니다.”
에슬린은 이불 아래에서 손끝을 말아 쥐었다. 얼굴 근육이 뻣뻣하게 긴장했다. 램프의 불빛이 조금만 더 밝았다면, 아마 깨어 있는 걸 들켰으리라.
‘이 시간에 대체 왜?’
에슬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숨을 죽였다.
곧이어 약재와 허브를 태우는 냄새가 났다. 그녀는 이 냄새를 맡아 본 기억이 있었다. 진통 역할을 하는 수면 향의 일종이었다.
그는 화로의 온도를 가늠해 보고, 창문을 한 번 더 단단히 고정했다.
“하…….”
문득 공작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얼마 후, 에슬린의 이마에 크고, 단단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금이 간 유리잔을 만지는 듯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
항상 뜨겁다고 생각했던 체온이었다. 그러나 그 체온이 오늘만큼은 차게 식어 있었다.
에슬린은 커다란 손이 자신의 열기를 앗아 가는 걸 느꼈다. 들끓던 열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떻게.”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 없는 물음이었다. 수천 개의 가시를 삼킨 듯한 목소리에, 눈을 뜨지 않아도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딱딱하고 거친 손이 오래도록 이마를 쓸어 주었다. 검으로 인해 생긴 굳은살이 선연했다.
그 투박한 손길에 우습게도 머리를 찌르던 두통이 가라앉았다.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정신도 아득히 몽롱해졌다.
드르륵.
다시 문이 열리고 하인이 화로를 추가했다. 방 안이 금세 따끈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왔다는 건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예, 가주님.”
“그만 나가 봐.”
이마에 다시 차가운 것이 올라왔다. 이번엔 차게 식힌 물수건이었다.
“…….”
공작은 말없이 에슬린을 보살폈다. 물수건을 바꿔 주고, 식은땀을 닦아 주고, 화로의 불을 지키고, 이불을 여며 주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몸짓이었다. 에슬린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문을 보니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만 들어 주변을 살폈다. 더 이상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 근처에 놓인 화로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협탁엔 작은 향로와 온갖 종류의 약과 연고들…….
왜일까? 그 흔적들을 보는 순간 에슬린은 가슴 한켠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대체 이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도대체 얼마나 이 하녀를 사랑하기에?
질문은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러나 다시 혼곤해지는 정신은 아무런 답도 내어 주지 못했다.
* * *
그날도 에슬린은 치료실에서 홀로 잠들어 있었다.
드르륵!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등장한 발걸음 두 개가 빠르게 침대로 향했다.
“헉!”
에슬린이 놀라 눈을 떴다. 누군가 이불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두 개의 램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까만 손이 그녀를 향했다.
에슬린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