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흘이 흘렀다.
에슬린은 사흘 만에 치료실을 벗어나게 되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바로 업무에 복귀했다.
“에슬린, 몸은 좀 괜찮으냐?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더 쉬지 그랬니?”
“아뇨, 괜찮아졌는데요, 뭘.”
눈에 띄게 핼쑥해진 얼굴에 하녀장이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에슬린은 싱긋 웃어 보였다.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찾아온 하녀장이 고마웠다.
“그놈은 마주치지 않았지?”
떠올리기만 해도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네. 정원 근처에 갈 일도 없었고요.”
“당분간 식품 창고는 다른 아이에게 가라고 시켰으니 넌 주방에만 있거라.”
“감사합니다, 하녀장님.”
에슬린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식품 창고만 드나들지 않으면 제이슨이 있는 정원 근처를 가로지를 일도 없었다.
“에슬린, 식사가 준비되었어. 어, 하녀장님.”
주방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하녀가 하녀장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떴다. 하녀장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바쁜가 보구나. 얼른 일 보렴.”
“네.”
에슬린은 가볍게 목례한 뒤, 하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트롤리에는 어느새 갖가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응. 걱정하지 마.”
하녀는 그제서야 긴장을 지우고 웃었다. 하늘 같은 하녀장에게 밉보인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던 것 같았다.
에슬린은 트롤리를 밀었다.
아직 종아리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천천히 걷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다른 하녀들도 트롤리를 밀며 줄줄이 에슬린의 뒤를 따랐다.
공작의 식당 앞에 도착하자, 집사장이 에슬린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공작님,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집사장이 말했다. 에슬린은 넓은 테이블에 천천히 음식들을 세팅했다. 공작은 오늘도 산더미 같은 서류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
식전주를 따르는 소리에 공작이 눈동자를 슥 올렸다. 에슬린은 최대한 그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잔을 채웠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차림을 마무리하고, 식당 한쪽으로 물러섰다.
“엉망이 따로 없군.”
낮은 저음이 실내를 울렸다. 느닷없는 말에 집사장이 화들짝 놀랐다.
“네?”
“정원 상태가 말이야.”
공작은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진 채였다.
“정원사가 아무래도 딴 데 정신이 팔린 것 같은데.”
“…….”
“그렇지 않나?”
순식간에 식당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철컥. 공작이 자세를 비틀자 허리춤에 찬 검이 묵직한 소리를 냈다.
집사장의 목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고요한 얼굴로 서 있는 하녀에게로 가 박혔다.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늦지 않게 대답했으나, 주인에게선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 * *
“오늘따라 가주님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 보네.”
접시를 닦으며 하녀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렇게 말씀하셨으니 제이슨은 잘리려나?”
“글쎄. 휴고랑 헤즐턴까지 잘리지 않아야 할 텐데.”
다른 하녀가 뒤이어 속삭였다.
휴고와 헤즐턴은 제이슨과 함께 정원에서 일하는 소년들이었다.
에슬린도 몇 번 그 둘과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앳되고 순수한 견습 정원사들이었다.
“에슬린, 넌 그래도 좀 안심이 되겠다.”
이름이 불리자 에슬린은 옆을 바라보았다.
“제이슨이 잘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응. 그렇지, 뭐.”
에슬린은 다소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설거지물에 손을 담그려던 그때였다.
밝은 갈색 머리를 한 하녀가 주방으로 달려들어 왔다.
“얘들아!”
레나였다. 그녀는 머리가 잔뜩 흐트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왜 저러지?
주방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야, 레나?”
“저택, 저택의 사용인들 모두 별채 1층에 모이래.”
레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에슬린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남부의 다이아몬드가.”
그녀가 던진 화두는 아주 뜬금없는 것이었다. 주방 내의 모든 소음이 멈추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가주님이 가져오신 남부의 다이아몬드가 사라졌대!”
“…….”
“어떤 멍청이가 가주님의 다이아몬드를 훔쳤다고!”
실내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잠깐이었을 뿐, 사람들이 뒤집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 * *
로비는 벌써부터 북적북적했다.
북쪽 별채는 사용인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공작저에는 수백 명의 사용인이 있었으므로, 별채의 1층 로비 또한 아주 넓은 공간을 자랑했다.
‘난리가 났네.’
걸음을 옮기며 에슬린은 생각했다. 로비를 꽉 메운 사용인들이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다들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오른편을 돌아보니, 제이슨 발론과 눈이 마주쳤다.
흠칫, 그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려 에슬린의 종아리를 바라보았다.
‘신경이 쓰이긴 하는 모양이지.’
에슬린은 그 시선을 속으로 비웃었다.
“에슬린, 안쪽으로 와.”
세피아가 제이슨을 발견하곤 눈썹을 찌푸렸다. 에슬린을 벽과 가까운 곳으로 끌어, 제이슨의 시선으로부터 가려 주었다.
“조용히들 하거라.”
하녀장 아델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잘대던 소음들이 일제히 뚝 끊겼다.
곧이어 집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쓴 중년의 여인이 사용인들 사이를 가로질러 계단 위로 올라섰다.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하녀들이, 왼쪽에는 하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몇몇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늘 저택에서 아주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집사장이 내부를 쭉 훑으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 가져오신 남부의 다이아몬드가 사라졌어.”
그 말에 사용인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쿵쿵쿵. 집사장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물론 우린 한 식구나 다름없다. 그래서 너흴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말을 덧붙였다.
“최근 공작저를 드나든 사람이 따로 없으니, 범인은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구나.”
몹시 유감인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자수하면 간단한 벌만 내리고 용서해 주겠다.”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에슬린은 살며시 눈동자만 굴려, 사람들 틈으로 보이는 제이슨 발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아까부터 싱글거리는 표정이었다.
“……없어? 정말 없느냐? 이렇게 되면 너희 모두의 방과 짐을 검사해야 한다.”
집사장이 피곤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방 검사? 짐 검사라고?
사용인들 몇몇이 불만을 토해 냈다.
바로 그때, 하인들 틈에서 손 하나가 번쩍 올라갔다.
“그래, 제이슨 발론.”
집사장이 안경 너머로 제이슨을 응시했다.
“집사장님, 제가 범인을 압니다.”
제이슨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에슬린에게 슬쩍 비열한 시선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이슨 발론, 너 정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 정말이냐?”
“예. 제가 봤거든요.”
제이슨이 느릿하게 몸을 돌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짤막한 검지 끝이 한 인물을 가리켰다.
“에슬린 로즈벨이 훔치는 것을요.”
뭐? 뭐라고?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터졌다.
에슬린은 자신만만하게 웃는 제이슨 발론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넌 진짜 기대를 어긋나지 않는구나.’
에슬린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에슬린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집사장이 에슬린을 향해 물었다.
“에슬린, 정말이냐?”
“당연히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제 방과 짐을 검사해 보셔도 됩니다.”
깨끗하고 명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당당한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잠시 수군거림을 멈추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제이슨만큼은 그 싱글대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시죠, 집사장님. 오늘 아침에 에슬린이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제가 봤으니까요!”
“제이슨 발론, 너 진짜 미친 거야? 에슬린은 나랑 같은 방을 쓴다고!”
보다 못한 세피아가 나섰다.
“세피아, 넌 아침부터 빨랫간에 있지 않았나? 온종일 에슬린이랑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네가 어떻게 알아?”
제이슨이 소리쳤다. 그러자 세피아가 뭐라고 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이 맞느냐?”
집사장이 다시 물었다. 에슬린은 반듯하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제가 아침에 치료실에서 나와 잠깐 방에 들른 건 맞습니다.”
“그거 보십시오!”
“조용히 좀 해라, 제이슨.”
“하지만 그건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지,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 제이슨에게서 발작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집사장님께서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 음흉한지 모르십니다!”
그는 씩씩 콧김을 내뿜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게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오라며 어찌나 닦달해대던지! 전 그것도 모르고 그냥 다이아몬드를 구하느라…….”
억울함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짧게 조소했다.
‘어차피 진짜 다이아몬드도 아니었으면서.’
누가 들으면 진짜라도 구해 온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아무튼 제 말이 맞습니다. 게다가 에슬린은 사흘 동안 혼자 있었다고요!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갔을지, 또 누가 압니까?”
“제이슨! 말이 되는 소릴 해! 에슬린은 너 때문에 다리를 다쳤다고!”
“참 나. 저렇게 멀쩡히 움직이는 걸 보니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제이슨!”
참다못한 앤과 레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지켜보던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집사장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만! 그만들 좀 해라!”
집사장은 에슬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에슬린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안경 너머 시선은 익숙한 것이었다.
공작의 침실에서도, 식당에서도.
집사장은 종종 에슬린을 흘끔거리곤 했다. 그 시선에는 다양한 의도가 있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깔려 있는 건 숨길 수 없는 못마땅함이었다.
그녀는 에슬린을 싫어한다.
‘집사장은 내가 훔쳤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공작의 연인인 이 하녀가?’
그러나 곧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은 집사장의 생각 따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슬린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집사장님. 부디 제 누명을 벗겨 주십시오. 차라리 제 방과 짐을 샅샅이 검사해 주세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가장 깔끔하겠구나.”
집사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한 번 손짓하자, 근처에 서 있던 하녀장이 다가섰다.
“하녀장 자네가 가서 에슬린 로즈벨의 방을 검사하고, 저 아이의 짐을 모두 가져오게.”
“……예,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얼굴의 하녀장이 몇몇 하녀와 함께 로비를 떠났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논쟁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집사장은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발 빠른 하녀 하나가 그녀를 위해 층계참에 나무 의자를 놔주었다.
에슬린은 물끄러미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그는 비열하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남부의 다이아몬드…….’
그건 분명 공작의 침실에 있던 물건이었다.
‘제이슨이 왜 저렇게 기분이 좋지?’
심장이 불안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별안간 굳게 닫혀 있던 로비의 정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