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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0화 (10/147)

10화

“다들 모여 파티라도 하나 보군.”

리페리우스 공작.

이 대저택의 유일무이한 주인의 등장이었다.

“가주님!”

집사장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제멋대로 풀어져 있던 사용인들이 열을 맞춰 선 뒤 허리를 굽혔다.

뚜벅, 뚜벅. 묵직한 발걸음이 로비 한가운데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바다가 갈라지듯, 공작이 걷고자 하는 곳마다 사용인들이 물러서며 길이 만들어졌다.

그는 편안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한 손에 든 검이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주님,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저택이 텅 비어서 말이야.”

싸늘한 검붉은 눈동자가 실내를 훑었다. 가볍게 내린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흩어져 있었다.

“꽤 즐거워 보이는데, 나도 함께하도록 하지.”

공작은 피식 웃으며 집사장을 지나쳤다. 집사장은 한발 늦게 사색이 된 표정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가주님, 제가 잘 해결하여 보고를 올릴 테니……”

“말이 많군.”

차가운 어조에 집사장은 입을 합 다물었다. 금세 널따란 층계참까지 다다른 공작이 집사장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평범한 의자였음에도, 그가 앉으니 지나치게 작아 보였다.

“더 크고 푹신한 의자를 가져와라!”

집사장이 소리쳤다.

“됐다.”

“가주님…….”

“뭘 하고 있었지?”

공작이 팔걸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괴며 물었다.

“사라진 남부의 다이아몬드와 관련해, 사용인들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소득은 있었나?”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집사장이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그 찰나의 망설임을 읽었는지 공작이 눈썹을 치켜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그게…….”

집사장은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에슬린이라는 아이가 범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

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눈동자만 움직였다.

어두운 시선이 수많은 사용인 사이에서 손쉽게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찾아냈다.

“그래서 저 아이의 짐을 조사해 보고자, 하녀장에게 지시를 내린 참입니다.”

“……그렇군.”

공작은 한쪽 허벅지에 내려놓은 손가락을 톡, 톡 움직였다. 그 모습은 에슬린으로 하여금 예전 그의 침실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나게 했다.

‘기억을 이유로 제게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는 봄날의 훈풍처럼 다정했다.

하지만 지금 저기 앉아 있는 남자는…….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는 북부의 칼바람도 우스울 정도로 싸늘하고도 건조한 표정이었다.

익숙한 눈동자가 잠시 에슬린의 얼굴에 머무르다, 미련 없이 거두어졌다.

‘절 공작가의 하녀로만 대해 주세요.’

공작은 에슬린의 요청을 아주 잘 이행하는 중이었다.

“가주님, 하녀장이 돌아왔습니다.”

위쪽 계단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눈만 슥 들어 새로이 나타난 인물들을 훑었다.

“가, 가주님.”

하녀장이 놀란 듯 공작의 얼굴을 보고 뒷걸음쳤다. 그녀의 손은 에슬린의 단출한 짐가방을 들고 있었다.

“하녀장, 가져왔는가? 방은 어떻던가?”

“예, 집사장님. 방은 모두 조사해 봤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에슬린의 짐가방이라면 여기.”

집사장이 가방을 건네받았다.

“에슬린 로즈벨, 이쪽으로 올라오너라. 제이슨, 너도.”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에슬린…….”

세피아가 에슬린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에슬린은 세피아를 보며 웃어 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석상처럼 앉아 있는 공작을 슬쩍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에슬린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디 너도 망신 한번 당해 봐.”

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제이슨이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달아올라 눈동자에 핏발이 잔뜩 서 있는 상태였다.

에슬린은 별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테이블을 가져왔습니다.”

하인 한 명이 테이블을 내려놓았다. 에슬린의 소지품을 전시할 용도였다.

덕분에 층계참 아래에서도 가방 속 물건들이 아주 잘 보일 듯했다.

“꺼내 봐.”

공작의 말에 집사장이 에슬린의 가방에 손을 넣었다. 나무 테이블 위로 익숙한 물건들이 차례로 늘어섰다.

“…….”

탁. 마지막 물건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그녀의 소지품에 고정되었다. 에슬린 또한 테이블 위로 시선을 집중했다.

“하하하하하!”

폭소를 터뜨린 건 아까부터 입가를 씰룩이던 제이슨이었다.

집사장이 미간을 구겼다.

“감히 가주님 앞에서 무슨 경거망동이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보셨지 않습니까?”

제이슨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멀리서 레나와 앤이 고개를 기울이는 게 보였다. 세피아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역시 범인은 에슬린 로즈벨이었습니다! 제 말이 맞았다고요!”

제이슨의 우렁찬 목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그가 몸을 홱 틀어 에슬린을 손가락질했다.

“역시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네가 훔친 거야!”

실내는 깊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에슬린은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하녀복 몇 벌과 평상복 몇 벌, 머리끈, 머리빗, 소식지, 종이 몇 장, 펜 하나, 잉크, 숨겨 둔 군것질거리 몇 개와 포장된 찻잎…….

“……제이슨.”

에슬린은 가만히 제이슨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만 인정하지 그래?”

제이슨이 실실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고개를 기울이고, 제이슨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 대다수가 에슬린과 똑같이 행동했다.

“……다이아몬드가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그 말에 제이슨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뚝 멈추었다.

* * *

“에슬린, 날 찾았다며? 앤이랑 레나가 그러던데.”

“응, 세피아. 왔어?”

에슬린은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치료실 문으로 세피아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왜? 다리 상처가 아파? 의원님을 부를까?”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라…….”

에슬린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새로 추가된 업무는 어때?”

“갑자기 그게 웬 소리야?”

“그냥.”

세피아가 김이 샌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냥 말동무가 필요했던 건가? 그렇게 짐작하며 세피아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뭐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단 별거 없던데? 가주님도 오후엔 침실에 오지 않으시고, 별로 청소할 거리도 없고.”

에슬린은 물끄러미 세피아를 바라보았다.

‘나 요새 업무 하나 추가됐거든. 빨리 가 보려고.’

에슬린 다음으로 공작의 침실을 맡게 된 하녀는 다름 아닌 세피아였다.

원한다면 후임을 지정하라는 하녀장의 말에,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세피아를 추천했다.

물론 그 일이 일 자체만으로 몹시 편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나 부탁이 있어.”

“뭔데?”

세피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가주님 침실에 있는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가져다줘.”

“…….”

세피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커다란 갈색 눈망울만 오래도록 깜빡일 뿐이었다.

“뭐어?”

새된 비명은 뒤늦게 터져 나왔다.

“에, 에슬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이슨을 내보낼까 해. 이렇게 몸까지 다치게 되니…….”

에슬린은 다친 다리를 슬쩍 보았다.

“이젠 정말 칼이라도 맞을까 무서워져서.”

그 목소리에 세피아의 얼빠진 시선이 에슬린의 다리에 가닿았다. 상처를 보는 세피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하, 하지만 에슬린, 가주님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건…….”

“헬렌, 메이안, 노라.”

세피아는 에슬린의 얼굴을 보았다. 익숙한 이름을 읊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짙푸른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 시선에 사로잡힌 듯, 도무지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제이슨 때문에 공작저를 떠나게 된 하녀들의 이름이잖아. 그리고 그 하녀들은 모두.”

죽었지.

에슬린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다음이 내가 되면 어떡해?”

그러나 왠지 불안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이 잘못되어도 너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해.”

세피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에슬린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내 안위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세피아는 꽉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에슬린, 내가 약속했잖아. 네 부탁은 그게 뭐가 됐든 반드시 들어줄 거라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예쁘기만 한 이상한 하녀라고 생각했다.

절대 친해질 일은 없겠네. 그게 에슬린에 대한 감상의 전부였다.

“네가 전 재산을 털어 내 동생 약값을 내 주지 않았다면, 레피아는 죽었을 거야. 내 가족을 살려 준 은혜는 잊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세피아의 얼굴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래. 에슬린에게는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모두가 자신을 외면했을 때, 유일하게 손 내밀어 준 은인에 대한 당연한 예의였다.

“하지만, 하지만 에슬린, 너무 위험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없어.”

대답은 단호했다.

“제이슨은 사용인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킨 정도로는 내쫓을 수 없어. 너도 알잖아?”

“아, 하인장님께서…….”

“그래. 어떻게든 하인장님께서 막으실 거야.”

“…….”

“그러니 다른 쪽으로 제이슨을 몰아가야지. 하인장님조차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그제야 세피아는 깨달았다.

에슬린이 살짝 웃고 있다는 것을.

항상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이던 얼굴이 아니었다.

생기, 그걸 넘어선 즐거움.

“어려운 일은 아니야, 제이슨 정도면.”

에슬린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잠깐의 여흥일 뿐이지.”

그걸 깨닫자마자 세피아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에슬린, 너.”

“세피아, 난 네 도움이 필요해.”

에슬린이 세피아의 손을 와락 붙잡았다. 그 체온이 뜨거웠다.

세피아는 에슬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분명 에슬린이다.

자신의 친구이자 은인인 에슬린 로즈벨.

그러나 뭘까?

사람을 끌려가게 만드는, 거부할 수 없게 하는 이 위압감은.

“넌 내 친구이자 은인이야.”

세피아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러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그래, 알겠어.”

그 말에 에슬린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약속해 줘. 반드시 제이슨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겠다고.”

“물론이야.”

에슬린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미소였다.

“……그런데 침실에 남부의 다이아몬드가 있는 게 확실해?”

문득 세피아가 물었다. 공작의 침실에서 다이아몬드를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하지만…… 침실 어디에도 보석은 없었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응?”

턱을 살짝 들어 올린 그녀는, 흡사 야생 동물 무리의 우두머리 같은 얼굴이었다.

“남부의 다이아몬드는 보석이 아니야. 남부의 다이아몬드는…….”

* * *

“찻잎이지.”

잠자코 있던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위가 온통 고요했다.

에슬린은 가만히 공작을 바라보았다.

“남부에서만 자라는 귀한 백금초를 긴 시간 숙성해 말리면, 그 값은 웬만한 다이아몬드 이상이라더군.”

“…….”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었지. 남부의 다이아몬드.”

공작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단조로웠다. 제이슨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느 순간, 공작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내내 멀어져 있던 그의 시선이 처음으로 에슬린을 향했다.

“황실에만 납품되는 이 차를, 우리 정원사는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붉은 눈동자가 칼날처럼 와 박혔다. 자신에게 묻는 게 아님에도, 에슬린은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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