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1화 (11/147)

11화

“그, 그, 그건. 그러니까…….”

제이슨이 심하게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사시나무 떨듯 제이슨의 온몸이 경련했다.

“우, 우연히 알았습니다.”

“아하. 우연.”

공작이 단어를 굴리며 웃었다.

“설득력이 부족한데.”

싸늘한 목소리가 넓은 로비에 울렸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침 한 번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예, 예전에 남부 출신 지인에게 들었습니다! 그, 그런 귀한 찻잎이 있다고…….”

“거짓말입니다.”

보다 못한 에슬린이 나섰다. 공작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백금초 찻잎은 황실이 지정한 하급 귀족이 직접 재배하고 납품합니다. 하인들이 쉽게 알 수 없어요. 더군다나…….”

그녀는 살짝 숙인 허리를 틀어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낯이 몹시 볼만했다.

“남부의 다이아몬드라는 별칭은 황실에서 쓰던 말입니다. 공작령 밖으론 나가 본 적도 없는 제이슨이 알 리가 없죠.”

“…….”

긴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에슬린은 가만히 공작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에슬린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정적을 깬 건, 혼란스러운 표정의 집사장이었다.

“그, 그러는 너는 어떻게 아는 거지? 그게 황실에서 쓰던 별칭이라는 걸…….”

에슬린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에슬린이 황실에 있던 시절.

“저는…….”

백금초의 찻잎을 보고 자신이 뭐라고 말했던가?

“예전에 황궁에서 일했습니다.”

‘앞으로 남부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러야겠네.’

그건 에슬린이 만든 별칭이었다.

“우연히 황녀 전하께서 말씀해 주시던 걸 들었고요.”

“에슬린이 황궁에서?”

“어쩐지!”

“황궁에서 어쩌다가 공작저까지 온 거지?”

지켜보던 사용인들이 수군거렸다.

“너는.”

불현듯 아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 소음이 뚝 멎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에슬린은 고개를 들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왠지 모르게 긴장한 사람 같았다.

“공작저에 오기 전 일은 기억합니다. 황궁에서 잠깐 일하다 프레이 백작가를 거쳐, 이곳으로 왔죠.”

예전에 하녀장의 서류를 보고 알아낸 것이었다.

“공작저에 온 직후의 기억은 여전히 없습니다.”

에슬린은 쐐기를 박았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군.”

공작은 부서진 파편에 맞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지 기대했나 보네.’

그 표정의 의미를 읽은 에슬린은 왠지 모르게 입 안이 썼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집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주님…… 에슬린의 말이 맞습니까?”

“그래.”

단호한 대답에 내부가 크게 술렁였다.

“남부의 다이아몬드는 황실 사람들이 쓰던 말이지.”

제이슨의 다리가 휘청였다.

“특히나…… 죽은 황녀의 사람들이 말이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어색했다. 에슬린은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집사장이 눈을 크게 홉떴다.

“그렇다면 제이슨이 에슬린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아니, 아닙니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공작은 차갑게 말했다.

집사장이 제이슨을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이글거리는 시선이 박히자, 그는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려 댔다.

“제이슨 발론. 더 변명할 게 남았느냐?”

“지, 집사장님! 아, 아닙니다! 저는! 저는!”

“감히 가주님의 물건을 훔치고 동료를 모함하다니.”

집사장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저는 억울합니다! 훔친 건 제가 아니에요!”

제이슨이 허공에 미친 듯이 손을 휘저었다.

“제가 아니라!”

별안간 그가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그걸 본 에슬린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집사장님.”

모든 이의 시선이 다시 에슬린에게 모였다.

“자리가 마련된 김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집사장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물었다.

“며칠 전, 치료실에서 홀로 자고 있을 때.”

에슬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이슨이 까득까득, 손톱을 물기 시작했다.

“괴한에게 납치당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세상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로비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용인들의 웅성거림이 절정에 달했다. 집사장이 경악으로 물든 눈으로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에슬린, 그게 사실이냐? 대체 누가 이 저택에서 그런 끔찍한 범죄를!”

“범인을 압니다.”

“누구지? 당장 말해라!”

“제이슨 발론이요.”

사방이 잠시 고요해졌다가, 다시 활활 타올랐다.

탕탕!

참다못한 집사장이 마른 손으로 거칠게 난간을 내리쳤다. 난장판이던 로비가 그제야 조용해졌다.

집사장은 흘끔, 공작을 곁눈질했다.

“에슬린, 신중하거라. 아무리 제이슨이 누명을 씌워 화가 난다지만, 아무렇게나 이야기해선 안 돼.”

“증인이 있습니다.”

“뭐? 증인?”

“절 납치하려 했던 이들이요.”

집사장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제이슨이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증인이라니. 설마……?”

에슬린은 대답하는 대신, 그를 향해 싸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제이슨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말도 안 돼! 에슬린! 너, 나를 모함하려고!”

제이슨이 에슬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이슨을 잡아라!”

그러나 집사장의 명령이 더 빨랐다. 근처에 있던 하인 둘이 그의 팔을 제압해 잡았다.

그와 동시에.

챙그르르. 어디선가 검이 떨어졌다.

“필요하다면 써라.”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검은 리페리우스의 보물 중 하나였다.

‘그걸 저렇게 내팽개치시다니…….’

집사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누구도 차마 공작의 검에 손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주인의 심기가 정말, 심하게, 좋지 않은 듯했다.

‘빨리 마무리해야겠어.’

집사장이 홱 고개를 돌려 에슬린을 보았다.

“증인이 누군지 말하거라.”

에슬린은 고요한 표정으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휴고, 헤즐턴. 어디에 있어?”

나직한 부름에 하인들 틈 속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쭈뼛거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너희들은…… 제이슨과 함께 일하는 견습 정원사들이 아니냐?”

집사장이 미간을 구겼다. 겁먹은 얼굴을 한 하인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너 이 새끼들! 감히 나를 배신해?”

제이슨이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분노로 절절 끓는 목소리였다.

“저, 저희는…….”

헤즐턴이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제이슨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말을 가로챘다.

“가주님! 절대 아닙니다! 휴고, 헤즐턴 저놈들이 먼저 제게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훔쳐 가져왔습니다! 이것만큼은 진짜입……”

“제이슨 형님이 저희를 협박하였습니다!”

참다못한 휴고가 외쳤다.

제이슨이 이성을 잃고 아아악! 발작했다. 견습 정원사들의 몸이 번쩍 튀어 올랐다.

“휴고, 헤즐턴! 닥쳐!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이 배신자 새끼들!”

“입을 막아라.”

“예.”

누군가 재갈을 가져왔고, 결국 제이슨의 입이 막혔다.

“읍읍! 으으읍!”

그럼에도 그는 발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이야기해 보아라.”

“네, 네에. 형님이 에, 에슬린 누님을 잡아 오라고…… 잡아서 정원에 매, 매달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헤즐턴이 잔뜩 쪼그라든 자세로 말했다. 공작 앞에 선 것만으로도 그는 몹시 두려운 것 같았다.

집사장이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제이슨이 에슬린을 납치한단 말이냐? 휴고, 네가 말해 봐.”

“며칠 전 에슬린 누님께 고백했다 차여서 망신당했거든요. 심지어 누님이 싫다는데 계속 쫓아다니고.”

순간 집사장은 한 번 더 공작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래서 제이슨 형님이 앙심을 품고, 에슬린 누님을 해치려 한 것 같습니다.”

“…….”

“이 북부의 한겨울 날씨에, 사람을 정원에 묶어 놓으라니…….”

휴고가 끔찍한 걸 들은 사람처럼 몸을 떨며 소리쳤다.

“그건 에슬린 누님을 죽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빠직!

어디선가 커다란 파열음이 들렸다.

에슬린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의 정체를 더듬었다.

“가, 가주님.”

공작의 표정은 평연했다. 그러나 그가 쥐고 있던 의자의 팔걸이 장식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걸 모두가 보았다.

알 수 없는 한기가 휘몰아쳤다. 정작 공작은 눈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계속해.”

그는 휴고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집사장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빨리 끝내자, 빨리.

“그, 그래서, 에슬린의 치료실에 잠입했느냐?”

헤즐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이슨 형님이 저흴 쫓아내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진짜로 누님을 납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저흰 누님께 가서 그냥 도망치라고 했어요. 어떻게 에슬린 누님을 해치겠습니까?”

에슬린은 가만히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둘과 눈이 마주쳤다. 이젠 제가 나설 차례였다.

“휴고와 헤즐턴의 말이 맞습니다.”

집사장이 에슬린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아이들이 절 찾아왔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저를 위해서였을 뿐, 실제로 저에게 해를 가하진 않았어요.”

에슬린은 신중히 말을 골랐다. 휴고와 헤즐턴에게 괜한 불똥이 튀어선 안 됐다.

“하지만…… 저들이 말한 것처럼, 제이슨은 절 죽이려 했죠.”

“으으읍!”

“제이슨은 제가 싫다는데도 억지로 청혼을 받아들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이 다리의 상처 또한, 제이슨이 제 뒤를 밟다 입힌 상처입니다.”

“…….”

“만약 그날 밤 절 찾아온 게 휴고와 헤즐턴이 아니라 제이슨이었다면…….”

에슬린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전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집사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때맞춰 헤즐턴이 품 안의 물건을 꺼내 놓았다.

“즈, 증거도 있습니다!”

“증거라고?”

“이 노끈이요!”

탁. 마른 바닥에 동그랗게 만 노끈 다발이 떨어졌다.

“제이슨 형님만 사용하시는 정원의 노끈입니다!”

“으으으읍!”

제이슨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이걸 저희에게 건네면서 누님을 납치해 죽이라고 했습니다!”

쐐기를 박은 건 휴고였다.

“…….”

실내는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에슬린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다리의 상처가 욱신거렸으나,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가주님의 물건에 함부로 손댄 죄, 저택 내에서 험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한 죄…… 어느 하나 가벼운 죄가 아니오니, 부디.”

그녀는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제이슨을 저택에서 내쫓아 주십시오.”

피날레였다.

무감한 검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 공작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쫓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싶은데.”

소름 끼칠 정도로 낮게 깐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모든 이들이 몸을 움츠렸다.

“도둑에, 추행범에, 예비 살인마라…… 우리 공작가가 마치 범죄자 양성소 같지 않은가?”

그는 싸늘하게 웃었다.

에슬린은 살짝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공작을 보았다.

“처벌을 정해 봐. 내쫓는 것만으론 안 돼.”

날카로운 시선이 에슬린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억울한 장본인일 테니 말이야.”

에슬린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