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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2화 (12/147)

12화

“가주님, 일개 하녀 아이에게 어찌……”

집사장이 슬쩍 끼어들었으나, 공작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

에슬린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럼······ 가주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손을 짚지 않고 오른쪽 무릎부터 세워 몸을 일으켰다. 반듯한 자세가 마치 무도회에 나선 귀족 영애 같기도 했다.

에슬린은 자신의 근처에 나뒹굴던 물건을 집어 들었다.

물 흐르듯 몹시 우아한 동작이었기에, 누구도 에슬린이 뭘 하려는지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으읍. 윽. 으으으읍!”

오직 제이슨만이 알았다.

그녀는 제이슨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손에 들기도 버거운 묵직한 검을 뽑아 들었다.

푹! 소름 끼치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읍! 으으으윽!”

제이슨의 오른쪽 허벅지에 리페리우스의 보물이 파고들어 있었다. 진한 피가 옷을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 이게 무슨……!”

제이슨을 붙잡고 있던 하인들이 놀라 결박을 풀었다. 그러나 제이슨은 에슬린에게 다시 덤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핏줄이 터진 제이슨의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그의 얼굴을 적셨다.

에슬린은 그런 제이슨의 얼굴을 길게 바라보지 않았다.

“하아…….”

기나긴 숨이 터져 나왔다. 손끝이 몹시 떨렸지만, 부러 감추지는 않았다.

스윽, 스윽. 에슬린은 자신의 옷자락에 검날의 피를 닦아 냈다. 검집에 검을 잘 넣은 뒤 공작에게 가 바쳤다.

“……제가 원하던 일은, 마쳤습니다.”

에슬린은 작게 숨을 헐떡였다.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만큼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공작이 그런 에슬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명쾌하군.”

그의 입꼬리가 나른하게 올라갔다.

* * *

퍽! 퍽!

큼직한 나무 컵이 휴고와 헤즐턴의 가슴팍에 맞고 떨어져 나갔다.

“이 멍청한 것들! 치료실에서 자고 있는 계집애 하나 못 잡아 와?”

제이슨은 에슬린 납치에 실패한 휴고와 헤즐턴을 보며 길길이 날뛰는 중이었다.

“형님, 진정하세요. 대신 저희가 더 기발한 걸 가져왔습니다.”

휴고는 품 안에 고이 품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뭐야, 이 쓰레기는? 이놈들이 어디서 개수작을······.”

“형님! 모르십니까? 남부의 다이아몬드지 않습니까!”

“뭐?”

“아휴, 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건데…… 설마 형님께서 모르고 계셨던 건 아니죠?”

패악을 부리려던 제이슨이 잠시 멈칫했다.

“아니, 알기야 알지…….”

그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누가 봐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휴고는 모른 척 씩 웃었다.

“그쵸? 역시 알고 계셨죠? 남부의 다이아몬드라는 게 이 백금초의 찻잎을 가리킨다는 것을요!”

백금……. 뭐?

제이슨이 입을 다물고 눈동자만 굴렸다. 둘은 말없이 그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뭐, 뭐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신경질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불현듯, 제이슨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잠깐…… 그런 거였군! 에슬린 그게 날 놀린 거였어. 제기랄! 젠장!”

그가 분노에 차 창고 안 물건들을 퍽퍽 걷어차기 시작했다.

“이깟 찻잎을 말하는 거였으면, 시장에서 돈 주고 가짜 다이아몬드를 살 필요도 없었을 것을! 그냥 정원에서 나뭇잎 몇 개 주워다 줄걸!”

씩씩대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근데…….”

제이슨의 발길질이 갑작스레 뚝 멈추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 너희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설마……?”

“맞습니다. 저희가 슬쩍했어요. 형님을 위해서요.”

“이 미친놈들! 감히 가주님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쉿. 쉿. 형님.”

뒷목을 잡고 펄쩍 뛰는 제이슨을 헤즐턴이 진정시켰다.

“잊으셨습니까? 에슬린 누님에게 창피를 당했던 걸요.”

“맞아요. 이번이 기회입니다. 누님을 정원에 매달아 놓으면 뭐 합니까? 형님 혼자 분풀이하는 것뿐이죠.”

“하, 하지만…….”

“누님을 도둑으로 몰고, 형님이 짠! 등장해서 진실을 밝히십시오. 형님의 평판을 다시 올릴 기회란 말입니다!”

“그러다 들켰다간…….”

“왜 들켜요? 여차하면 세피아 누님께 뒤집어씌우면 그만입니다. 세피아 누님이 가주님 침실 담당이잖아요.”

제이슨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흠.”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오른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좋아. 이걸 에슬린의 짐 속에 몰래 숨겨 놓고 와. 에슬린은 아직 치료실에 있을 거고, 세피아는 오전 근무이니 딱이군.”

그 말에 휴고와 헤즐턴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네, 알겠습니다. 형님!”

그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둘은 그 길로 에슬린을 찾아갔다.

“누님.”

에슬린은 홀로 자신의 방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햇살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에슬린의 몸의 윤곽을 따라 빛났다.

휴고와 헤즐턴은 홀린 듯 그 모습을 보며 숨을 골랐다.

“예상대로 제이슨 형님이 이걸 누님 짐에 숨겨 놓으랍니다.”

“그래, 수고들 했어.”

차분한 음성이었다. 마치 당연히 그러리라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헤즐턴은 에슬린에게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건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괘, 괜찮을까요? 세피아 누님께서 이걸 건넬 때 어찌나 손을 떠시던지…… 저희도 덩달아 겁이 나서…….”

“걱정하지 마. 너희들에게 피해가 가진 않게 할게.”

에슬린은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쑥.

자신의 짐가방 속에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집어넣었다.

“누님, 이걸로 정말 제이슨 형님을 내쫓을 수 있겠죠?”

휴고가 물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여명이 오기 전 짙은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그래.”

망설임 없는 단호한 긍정이었다.

“제이슨이 나가면, 너희가 정식 정원사야.”

“저, 저희가 정식 정원사…….”

헤즐턴이 손을 꾸물거렸다. 휴고는 바닥 어딘가에 시선을 두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견습 생활은 지독했다. 제이슨의 괴롭힘은 나날이 강도를 더해 가는 중이었다. 거기다 이젠 범죄를 사주하기까지…….

휴고는 가만히 에슬린의 치료실에 난입한 밤을 떠올렸다.

‘차라리 잘됐네. 내가 직접 너흴 찾아갈 수고를 덜었어.’

그녀는 어쩐지 자신들을 찾아올 예정이었던 것처럼 말했다.

‘너희, 언제까지 제이슨의 꼭두각시처럼 지낼 거야?’

그 말이 시작이었다.

그제야 휴고는 자신의 제이슨을 향한 분노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결심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원사로서도 너희가 제이슨보다 훨씬 훌륭해.”

문득 에슬린에게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만년 견습인 둘은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휴고 넌 미감이 뛰어나 조경을 잘하고, 헤즐턴은 온갖 식물에 대한 지식에 해박하지.”

“누님.”

“너희는 마땅한 자리를 찾는 것뿐이야.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에슬린은 살짝 웃었다.

휴고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 누구도 저렇게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제이슨 형님은 정원사 취급은커녕, 인간 대접조차 해 주지 않았지.’

그는 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확신에 찬 눈동자를 하고 휴고는 물었다.

“저희는 이제 뭘 하면 됩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피와 눈물을 줄줄 흘리던 제이슨은 하인 몇에게 끌려갔다. 아마 그 길로 짐도 챙기지 못한 채 쫓겨나리라.

뒤늦게 상황을 듣고 온 늙은 하인장은 조카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떨구었다.

“일들 해라, 일들 해!”

집사장과 하녀장의 지휘 아래, 사용인들은 빠르게 일터로 복귀했다.

에슬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전에 피범벅이 된 앞치마를 갈아입고, 짐가방을 방에 가져다 놓았다. 세피아와 앤, 레나가 그녀를 따랐다.

“에슬린,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일터로 향하는 회랑을 걸으며 세피아가 물었다.

“괜찮아. 좀 지쳤을 뿐이야.”

창백해진 낯으로 에슬린이 답했다.

온몸에 있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에슬린은 치료실에 잠깐 들러야 할지 짧게 고민했다.

“제이슨 그놈이 그렇게 악랄했을 줄이야!”

아까부터 씩씩대던 앤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널 죽이려 했다니 진짜 그놈이 미쳤나 봐.”

레나 또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근데 가주님께서 직접 오실 줄이야. 어휴, 난 아까 소름이…….”

“내 말이. 나 솔직히 가주님 눈치 보여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

둘은 조금 전 일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당분간 이 일로 시끄럽겠네.’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다행이야, 에슬린. 드디어 그 제이슨 발론이 쫓겨났잖아. 내 속이 다 시원해.”

“그러게.”

에슬린은 가볍게 대꾸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예정대로 제이슨은 처리했다.

이제 그녀의 신경 쓰이는 거스러미는 없다. 그러니 일에만 집중하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에슬린은 결의를 다지듯 손끝을 말아 쥐었다.

“아.”

희미한 통증이 느껴져,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세피아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 치료실에 좀 들렀다 갈게. 붕대가 풀려서…….”

“부축해 줄까?”

“괜찮아. 못 걷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말하며 에슬린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하녀들과 인사를 한 뒤, 그녀는 회랑을 빠져나갔다.

에슬린은 천천히 치료실을 향해 걸었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인적은 없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마른 풀과 나뭇가지가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

느닷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심하고 있던 에슬린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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