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바스락, 바스락. 바닥을 밟는 묵직한 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가, 가주님.”
에슬린이 놀란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커다란 그림자를 보았다.
줄곧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였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에슬린의 앞까지 온 공작이 별안간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뭐 하시는……”
“쉿. 가만히.”
그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에슬린의 왼쪽 손을 내려다보았다.
둥그렇게 말려 있는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펼치자, 가로로 긴 생채기가 난 손바닥이 드러났다.
공작이 낮게 혀를 찼다.
“가만히 있어요.”
강인한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반듯한 눈가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에슬린은 딱딱하게 굳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손의 상처만 치료하겠습니다.”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손바닥의 상처는 아까 검집에 검을 넣으면서 생긴 것이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범위가 넓었다.
티를 내지 않았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줄 알았는데…….
그는 대체 어떻게 안 걸까?
“검에 익숙지 않아 그럽니다. 그 검은 당신이 쥐기엔 너무 무거워요.”
공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직접 베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곤 품 안에서 약을 꺼내 조심스럽게 펴 발랐다.
‘치료실에 치료받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그러나 왠지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제 상처에 너무 몰입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려 준 거예요.”
에슬린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공작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가주님이 죽이실 거 같아서.”
에슬린은 조그맣게 덧붙였다.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는 몹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말을 쏟아붓는 대신, 한 번 피식 웃는 걸 택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냥…… 감이에요.”
“잘 맞혔군요. 정답입니다.”
그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제야 북부의 칼바람 같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의 다정한 미소는 무척 오랜만이었다.
“사실은 진작 죽여 버리고 싶었죠.”
붕대를 감아 주며 공작이 속삭였다.
“당신을 보는 눈을 도려낼까, 건방진 말을 하는 혀를 뽑을까, 아님 주제를 모르는 손발을 자를까.”
“…….”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악마 공작이 그 명성에 어울리는 말을 지껄였다. 에슬린은 기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큰일 날 뻔했네요.”
“제겐 이게 더 큰일입니다.”
공작은 에슬린의 상처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눈이 마주치자, 날카로운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그 태연함이 어처구니가 없어 저절로 허탈한 숨이 흘렀다.
붕대를 감는 공작의 동작이 점점 느려졌다.
“당신과 이야기하니 좋군요.”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문득 잡힌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 온도를 인지하는 순간, 죽어 있던 촉각이 되살아났다.
굵은 손마디와 조금 거친 살갗, 딱딱한 굳은살 같은 것들이 새삼 선명하게 다가왔다.
동시에 이마에 열이 올랐다. 밤새 자신의 열을 앗아 가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리의 상처는 좀 어때요?”
“네?”
“다리의 상처 말입니다.”
다른 생각에 젖어 있던 에슬린은 뒤늦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열은?”
“없어요.”
“안색이 창백한데, 다른 곳은…… 손 말고 다른 아픈 곳은 없습니까?”
그는 초조해 보였다. 마치 두 번 다시 대화할 기회가 없는 사람처럼.
“아직도…….”
그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아직도 제가 싫습니까?”
에슬린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주머니를 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목마른 방랑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슬린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제 몸은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전 가주님을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그 말에 공작이 움찔 손을 떨었다. 일렁이는 눈동자엔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기억을 찾을 때까지만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겁니다.”
“…….”
“그게 서로에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서로에게라.”
황량한 북부의 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절 고문할 생각이었다면, 성공하셨습니다.”
그는 눈썹을 구기며 웃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뻘겋게 드러난 짐승의 상처처럼 보였다.
에슬린은 그 상처를 가만히 응시했다.
“…….”
만나면 만날수록 깨닫게 된다.
이 하녀에 대한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건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에슬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공작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걸까?’
글쎄.
처음에야 경악과 두려움으로 그를 멀리하겠다고 다짐했으나, 그를 할퀴고 난도질해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건 아니었다.
비록 그가 준 독배를 먹고 죽었으나…….
공작 또한 예상이나 했겠는가?
자신이 죽으라고 등 떠민 황녀가, 사랑하는 연인의 몸속에 들어와 있을 줄이야.
“무슨 생각을 하죠?”
눈앞의 남자가 물었다. 에슬린의 표정을 살피듯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 공작이 자신의 품속을 뒤져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요.”
엉겁결에 물건을 받아 든 에슬린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원래부터 당신에게 선물하려 했던 물건입니다. 건넬 시기를 조금 놓쳐 버렸군요.”
포장지의 감촉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화제의 중심에 있던 바로 그것, 백금초의 찻잎이었다.
“차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귀한 건 받을 수 없습니다.”
에슬린은 고개를 내저으며 손에 쥔 물건을 다시 내밀었다. 당연히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받지 않으면 버리겠습니다.”
“버린다니…….”
농담이겠지?
에슬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공작의 표정은 농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에슬린은 남부의 다이아몬드의 값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무게와 크기라면…….
자신조차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의 금액이 떠올랐다.
“당신이 갖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 없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에슬린을 보며, 공작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아까 로비에서 사용인들이 이 찻잎을 모두 보았습니다.”
“압니다.”
“그런데 이걸 제가 갖고 있으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제가 훔친 줄 알 거예요.”
공작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탐색하듯 에슬린을 응시하던 시선 끝에, 그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낯이었다. 그러나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깨달음은, 아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가주님께선.”
에슬린은 미간을 구겼다.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한 번 호흡을 골랐다.
“……알고 계셨던 거군요. 제가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이용했다는 걸.”
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빙긋 웃을 뿐이었다.
“에시, 백금초 찻잎의 보관 방법에 대해서 압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갑자기 무슨?”
“햇볕이 들지 않는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게 기본이라더군요.”
“그야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에슬린은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하,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일부러……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침실에 두신 거군요.”
공작의 침실은 언제나 따뜻했고, 강한 태양 빛이 내리쬐었다. 백금초를 보관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보란 듯이 남부의 다이아몬드를 침실 한가운데에 전시해 두었다.
에슬린이 침실을 드나들던 그때부터 말이다.
“그래요. 당신이 필요할 때, 언제든 가져갈 수 있도록.”
공작은 선선히 답하며 피식 웃었다.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지만.”
그는 로비에서의 상황을 잠시 회상했다. 짧고도 강렬한 감정의 격류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대체 왜……?”
에슬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공작은 그런 에슬린의 반응이 오히려 신기한 듯했다.
“제가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정말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건…….”
“진작 손쓰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이 이상 참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낮게 혼잣말하며 그는 에슬린의 다리를 흘깃 보았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거친 음성이었다.
“제가 나서는 건 쉽지만, 그건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니었을 테니까.”
“…….”
“제 짐작이 틀렸다면 말해줘요.”
틀리지 않았다.
공작이 먼저 나서서 제이슨을 처리했다 한들, 에슬린은 전혀 고맙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슨은 직접 제 손으로 처리하고 싶었고,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리페리우스 공작에게 도움받고 싶지 않았어.’
그런 그녀의 마음을 공작은 이상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도움을 받은 셈이네.’
사실 제이슨을 처리할 다른 방법들도 많았지만,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을 택하다 보니 결국 이런 꼴이었다.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 신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리페리우스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니…… 우습지도 않지.’
따지고 보면, 대륙을 떠날 자금을 모을 수 있는 것도 다 리페리우스 공작저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보다 리페리우스의 도움에 기대어 살고 있는 주제에…….
급격히 짙은 무력감과 허무감이 몰려왔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에슬린은 차갑게 말했다. 공작이 눈썹을 비쭉 치켜올렸다.
“주제?”
“가주님의 물건에 멋대로 손댄 책임을 물으시겠다면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그렇게 결론이 나는 겁니까?”
탓하듯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