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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4화 (14/147)

14화

“그 백금초가 사라졌을 때,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겁니다.”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를 살짝 흩트렸다.

“기뻤다니…….”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단호한 어조였다. 에슬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급하게 덧붙였다.

“아니, 도움이랄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그건 처음부터 당신에게 선물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냥…… 그냥 당신 물건을 스스로 사용한 거라고 생각해요.”

타이르는 말투가 부드러웠다. 마치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이었다.

에슬린은 그 필사적인 설명에 그냥 입을 꾹 다무는 걸 택했다.

그저 손에 든 물건이 가시덩굴이라도 되는 듯 몹시 불편할 뿐이었다.

“그런데 백금초 보관법을 알고 있었군요.”

공작이 불현듯 화제를 돌렸다. 에슬린은 번쩍 눈을 치켜떴다.

“네?”

“아까 보관법에 대해 말했을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또한 황녀에게 들은 겁니까?”

“저는…….”

“귀족 중에도 백금초의 보관법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저 또한 황녀에게 듣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그걸 당신이 아는 걸 보니…….”

에슬린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황녀와.”

바스락. 그가 걸음을 옮기자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베르타니아의 황녀와 꽤 가까운 사이였나 봅니다.”

몰랐습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몸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그의 말투가 급격히 가라앉은 것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에슬린은 눈을 깜빡이는 것은 물론, 침 한 번 삼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검붉은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리페리우스 공작과 백금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리페리우스 공작과 접점이 없었는데.

관자놀이부터 강렬한 두통이 일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커다란 북소리가 났다.

‘넌 ──을 잃을 것이다.’

뭐지?

에슬린은 머리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에시.”

몸이 한 번 흔들리는 순간, 메마른 북부의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공작이 본능적으로 바람을 막아서며 그녀를 지지했다.

“왜 그래요? 괜찮습니까?”

에슬린의 안색을 살피는 그의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다행히 바람과 함께 두통은 금세 잦아들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길게 털어 냈다. 흐릿했던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지금 방금 뭔가가…….’

뭐였지?

그러나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그때 공작이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시선이 엉망이 된 다리에 닿아 있었다.

“붕대가 풀렸군요.”

커다란 몸이 움직인 건 순식간이었다.

“가주님!”

에슬린이 짧게 소리쳤다. 거부할 틈도 없이 덜컥 공작의 품에 안아 올려졌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니까.”

못마땅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다리에 피까지 납니다.”

그제야 에슬린은 자신의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가늘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 피가 나서…….’

그렇게 어지러웠나 보구나.

“상처가 덧났나 봐요. 괜찮습니다. 걸어갈 수 있어요.”

“안 됩니다.”

“가주님,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이 샛길을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겁니다.”

에슬린이 작게 발버둥을 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두 팔이 에슬린을 옭아매었다.

돌벽 같은 흉곽이 느껴지고, 강인하게 뻗은 그의 목선을 따라 박동하는 맥박이 보였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는 단호했다.

“…….”

결국 백기를 든 건 에슬린이었다. 제국 최강자인 공작을 힘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심장을 도려낼 걸 그랬습니다.”

낮게 분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어는 없었으나, 에슬린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 * *

저택 내 치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이 식사 시간이라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게다가 오전에 그런 사단이 있었으니…….

저택 사람들에겐 아주 긴 점심시간이 될 터였다.

물론, 공작의 품에 안겨 치료실에 들어선 에슬린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의원 놈들부터 잘라야겠군요. 상처 치료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놈들이 게으름까지 피우다니.”

저택의 주인이 산뜻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세요.”

공작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치료실 의자 위에 에슬린을 앉혔다.

“상처를 보여 줘요.”

“가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는 당연하게 못 들은 척했다. 에슬린의 맞은편에 앉아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그녀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

붕대를 풀어 에슬린의 상처를 확인하는 눈빛이 어두웠다. 길게 난 상처 주변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 아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에슬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심각한 건 눈앞의 인물이었다. 지상 최대 난제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그의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소독부터 해야겠군요.”

그는 치료실 근처의 물품을 뒤적여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꺼냈다. 전쟁터를 누비는 사람답게 이런 처치에 익숙해 보였다.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요.”

“괜찮아요.”

“괜찮지 않으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

“제게 다 말해요. 난 당신을 돕기 위해 있는 거니까.”

에슬린은 상처에 몰두한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열린 창문에서 불어온 바람이 반짝이는 머리칼을 우아하게 뒤흔들었다.

살짝 내리깐 눈빛이 더없이 진지했다. 섬세한 손길 탓에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짧은 침묵을 깨며,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는.”

그 소리에 공작이 고개를 들어 에슬린을 보았다.

에슬린은 바로 옆 테이블에 내려놓은 백금초의 찻잎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저 찻잎을 제게 주려 하셨나요?”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황실에 납품되는 차라, 구하기도 어려우셨을 텐데요.”

에슬린의 상처 위를 오가던 손길이 뚝 멈추었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공작이 피식 웃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가벼운 말투였다.

“당신에게 그 맛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다시 상처로 시선을 옮겼다.

“그 남부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게 백금초였기 때문입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어조였다.

에슬린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가장 비싸고 귀한 것.

자신이 아는 가장 좋은 것만 안겨 주고 싶은 연인의 마음.

하물며 그 물건을 훔쳐 이용한 하녀에게, 도움이 되어 기뻤다고 말하는 그 마음…….

그의 헌신이 창처럼 다가와 몸을 꿰뚫는 듯했다. 애정 어린 진심은 무거운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에슬린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하녀의 영혼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열병을 크게 앓았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이미 죽은 거겠지. 자신은 그 빈 껍데기를 차지한 것뿐이고.

에슬린은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그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두렵고 증오스럽다가도, 이렇게 거대한 애정을 내보일 때면…… 가끔은 안타깝기도 했다.

절절한 마음을 한결같이 내보이는 그의 연인은, 사실 이제 죽고 없는데.

그 사실조차 모른 채 매달리는 그가.

그건 인간 대 인간으로서 드는 순수한 연민이었다.

그의 진심을 확인하면 할수록 더.

“다 됐습니다. 아프지 않았습니까?”

붕대를 단단하게 여며 주며, 공작이 부드럽게 물었다. 다정한 시선에 가슴 한켠이 따끔거렸다.

“네. 덕분에 괜찮아요.”

기운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이 에슬린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그녀의 사소한 말투, 작은 표정 변화 하나까지 파헤치려 드는 저 맹목적인 눈빛.

‘……내가 과연 이 저택을 떠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안 돼.’

에슬린은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떠나야만 해. 이건 공작에게도 못 할 짓이야.’

저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면 질수록 더욱더.

‘몸이 멀어지면 마음 또한 자연히 사그라지겠지.’

그러니 계획대로, 여름이 오기 전 저택을 떠나야 한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에슬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에시.”

나직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아래로 내린 시야에, 문득 공작의 빈손이 들어왔다. 그의 손끝이 무언가를 참아 내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돌렸다.

흘러넘치는 애정을 외면하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 * *

에슬린은 몹시 기괴한 소문을 들었다.

제이슨 발론이 골목 어딘가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근데 그 시체 상태가…….’

소문을 전해 주던 세피아의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눈과 혀가 모두 뽑혀 나가고, 손발도 잘린 채였대.’

그 말을 들은 에슬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니겠지.

그러나 자꾸만 공작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날, 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늙은 하인장이 이른 은퇴를 선언했다.

하인장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었으나, 수석 하인이었던 자가 곧 그 자리를 대신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시간은 쏜 화살처럼 흘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북부의 칼바람이 멈추었다.

코끝에 닿는 공기의 냄새가 달라지고, 황량한 북부에도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봄이었다.

이 봄의 끝. 새로운 여름의 시작.

에슬린이 저택을 나가기로 결심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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