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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5화 (15/147)

15화

“빨리들 움직여라, 빨리!”

봄과 함께 모두에게 바쁜 시기가 찾아왔다. 하녀장은 새봄맞이 저택 단장에 몰두해 있었다.

에슬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같이 묵은 먼지를 털고, 커튼과 장식을 바꾸고, 벽난로의 재를 쓸어 냈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가 이어졌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기절하듯 잠들 수 있었다.

몸이 바쁘니 생각이 끼어들 여력이 없는 날들.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에슬린은 트롤리를 밀고 와 집사장에게 말했다. 집사장이 가볍게 눈짓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고, 몸을 물렸다.

치료실 이후, 공작과는 한 번도 따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저택이 떠들썩하군.”

서류를 뒤적이며 공작이 중얼거렸다.

“봄맞이 대청소다 뭐다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그렇습니다.”

집사장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사용인이 더 필요하진 않은가?”

“안 그래도 추천장 몇 개를 받아 살폈습니다.”

“그래.”

약간의 간격을 두고, 집사장이 가만히 덧붙였다.

“저래 보여도 다들 꽤 들떠 있답니다.”

공작이 무슨 뜻이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쁜 일이 끝나면 짧은 휴가를 갈 수 있거든요.”

“그렇군.”

공작이 덧붙였다.

“예산에 여유가 있다면 휴가비라도 내주도록 해. 긴 겨울이었으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하겠지.”

에슬린은 옆에 서 있던 하녀의 몸이 움찔 떨리는 걸 느꼈다. 집사장이 빙긋 미소 지었다.

“예, 가주님. 다들 기뻐할 겁니다.”

그때, 하인 하나가 식당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집사장에게 다가선 하인이 속닥속닥, 그녀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래?”

“예, 방금 가주님께 도착했습니다.”

하인이 품 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집사장에게 건넸다.

에슬린은 슬쩍 눈만 들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건 황실의 인장이잖아. 거기다 저 필체는…….’

1황자의 글씨.

에슬린은 눈가를 찌푸렸다. 손끝이 떨려 왔기에, 꾹 주먹을 말아 쥐어야만 했다.

“가주님.”

집사장이 공작에게 편지를 건넸다. 그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편지를 읽었다.

“1황자가 몸이 달았군.”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은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편지를 내려놓았다.

“가서 태우도록 해.”

“하, 하지만 황실에서 온 편지를…….”

“태워.”

그의 표정은 몹시 단호했다. 집사장이 난처한 듯 우물쭈물했다. 금박으로 촘촘하게 장식한 편지는 결국 그녀의 품으로 사라졌다.

이를 지켜보던 에슬린은 미간을 좁혔다.

‘1황자의 측근인 공작이…… 왜지?’

리페리우스 공작은 분명 1황자의 사람일 터다.

그런 자가 1황자의 편지를 저런 식으로 대한다니?

에슬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진 건가?’

시선이 바닥을 헤매었다.

짐작 가는 바가 없었기에, 의문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 * *

정신없이 몰아치던 저택 일이 드디어 끝이 났다. 공작저 하녀들에게 꿀처럼 달콤한 휴가가 찾아온 것이다.

“하! 드디어!”

“드디어 끝났어어어어!”

“휴가다, 휴가야! 드디어 휴가라고!”

세피아, 앤, 레나가 차례로 소리쳤다.

에슬린은 자신의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웃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하녀들은 해방감에 젖어 있었다.

주방장에게 받아 온 구운 호두를 먹으며, 네 사람은 오랜만에 찾아온 꿀 같은 휴식을 즐겼다.

“게다가 이번엔 보너스도 받았잖아! 너무 행복해!”

레나가 두둑해진 주머니를 두드리며 말했다.

“넌 휴가 언제야, 레나?”

“나랑 앤은 다음 주부터야. 우린 고향에 내려가려고. 세피아 넌?”

“난 닷새 후. 나도 동생 보러 집에 갈 거야.”

“그렇구나.”

들뜬 목소리들이 서로의 계획을 공유했다. 하녀들은 일정이 겹치지 않는 선에서 나흘간의 휴가를 얻을 예정이었다.

“에슬린 너는?”

“난 내일부터긴 한데…….”

에슬린은 호두를 먹으며 말했고, 더 덧붙이지 않았다.

그 반응에 세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번에도 휴가 안 나가려고?”

에슬린은 단 한 번도 휴가를 간 적이 없었다. 수석 하녀가 되겠답시고 일을 쉬지 않았던 것 때문도 있지만…….

솔직히 갈 곳이 없었다.

“에슬린, 번화가에 가서 기분 전환이라도 해. 이번 겨울은…… 좀 힘들었잖아?”

세피아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레나와 앤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메르바 번화가에 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고, 쇼핑도 좀 하고. 그러면 좀 기분이 풀릴걸?”

“…….”

에슬린은 잠시 고민했다.

메르바 번화가라.

공작저에 온 이후로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긴 했다.

‘한번 나갔다 와 볼까?’

설렘 가득한 얼굴들을 보다 보니, 에슬린 또한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 그녀는 다소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유명한 식당이라도 알려 줘.”

“너 말 잘했어!”

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슬린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품에 엄청난 것들이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한데?”

메르바 신상 맛집 리스트, 메르바 쇼핑 거리 지도, 숨은 메르바 디저트 카페 위치, 메르바 야경 명소 등등…….

첫 휴가를 나가는 동료를 위해, 하녀들이 집단 지성을 발휘한 결과였다.

‘하녀들의 휴가는 아주 전투적이구나.’

에슬린은 멍하니 생각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시간대별로 자신의 휴가 동선이 짜여 있었다. 그걸 분 단위로 쪼개려는 그들을 겨우 만류했다.

* * *

“아이고, 포도를 보십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슬린이 고개를 돌렸다. 갈색 턱수염이 수북하게 난 남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발길 따라 닿은 과일 가게였다. 귀족들이 자주 들르는 모양인 건지, 일반 노점상과 달리 과일의 포장 자체가 화려했다.

“아직 포도가 날 시기가 아니라 신기해서요.”

에슬린이 조용히 대답했다.

‘어라?’

가게 주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티 나지 않게 눈앞의 여인을 훑어보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옷차림과 장신구 하나 없는 소소한 행색.

‘평민인가? ……왜 귀족인 줄 알았지?’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평민이라 잘 모르는가 보구먼. 이젠 돈만 있으면 한겨울에도 달콤한 포도를 맛볼 수 있다오. 로하르트 젤킨스 님 같은 미식가 귀족 나리들께서도 즐기실 정도니까.”

“그런가요?”

“그럼. 덕분에 수도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겨울 포도가 유행이었지. 그 왜 돌아가신 황녀님께서 개발하신 재배 기술 덕분에…… 아차차.”

이놈의 주둥이.

주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죽은 황녀 이야기는 뭐 하러 해? 1황자가 득세한 마당에 무슨 트집을 잡히려고…….’

“크흠!”

민망스러운 마음에 그는 괜히 커다랗게 기침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슬린은 물끄러미 동그란 포도알을 바라보았다. 남에게서 듣는 자신의 이야기는 조금 어색한 데가 있었다.

“아, 아무튼. 살 거요?”

“네. 조금만 주세요.”

달콤했던 과육의 기억이 떠올라 그녀는 홀린 듯 포도를 구매했다. 주인이 잽싸게 포도를 상자에 포장해 안겨 주었다.

‘근데…… 리페리우스 공작령에 이 기술을 전달했던가?’

값을 치르며, 에슬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제 영지와 일부 귀족령에만 전파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이상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죽고, 측근들이 전파한 건가?’

에슬린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과일 가게를 나섰다.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었다.

리페리우스 공작령의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인 메르바는 대단히 떠들썩하고, 사람이 많아 북적였다.

‘이제 하녀장의 심부름만 하면 되는데.’

에슬린은 다음 일정을 떠올려 보았다.

하녀장에게 몇 가지 물건을 부탁받았기에 그걸 사러 갈 생각이었다.

‘먼저 새 머리빗과 머릿기름부터 사야겠네.’

그녀는 주변 상점을 둘러보았다. 다소 긴장한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게, 에슬린은 이런 번화가를 혼자 걷는 것이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전……’

‘조용히 해, 디엘. 내가 황녀란 걸 동네방네 소문낼 참이야?’

‘아니, 혼자 그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 호위하는 사람도 좀 생각하셔야죠.’

‘나도 혼자 다닐 수 있어. 다들 혼자서도 잘 다니는데, 뭘.’

‘아이고. 물건 하나 제대로 못 사시면서 무슨.’

‘이게 날 아주 바보로 아네.’

‘차라리 바보처럼 가만히 좀 계셔 주십쇼. 저기 젝스 경이 사색이 된 게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디에리안의 타박 소리가 귀에 선명했다. 뒤이어 허둥지둥 달려오던 호위 기사의 표정도 함께 떠올랐다.

빛바랜 기억에 에슬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근데 그때 왜 황궁 밖으로 나갔더라?’

그때도 포도를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에슬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이었다.

“아!”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지나가던 행인과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에슬린은 얼얼한 어깨를 문지르며 사과했다. 상대는 험악한 낯을 한 덩치 큰 남자였다.

“뭐야? 부딪쳤으면 제대로 사과를…….”

남자가 말을 하다 말고 물끄러미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호오.”

불길한 감탄사였다. 에슬린은 재빨리 인사를 하고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남자가 슥 몸을 틀어 에슬린의 앞을 막았다.

“잠깐, 잠깐. 메르바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니. 내가 왜 몰랐지?”

에슬린은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홀릴 것처럼 예쁘잖아!”

“무례하시네요.”

“무례라니? 칭찬인데! 이봐, 갑자기 잘 가고 있는 사람한테 부딪친 건 당신이라고. 지금 내 어깨가 빠질 것 같다니까? 아이고, 어깨야!”

그가 과장해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죠?”

“그러니까 어때? 내게 사과할 마음이 있다면 차나 한잔해.”

남자의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에슬린은 몹시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싫어요. 더 이상 다가오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아, 질러 질러. 얼마든지 질러 보라고.”

남자가 에슬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울퉁불퉁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거세게 쥐려고 했다.

그러나 그 동작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에슬린이 다급히 뒷걸음질 쳤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악!”

단말마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드득. 남자의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린 건 그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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