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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6화 (16/147)

16화

에슬린은 멍하니 자신의 귀 옆에서 뻗어 나온 강인한 팔뚝을 응시했다.

단단한 근육은 남자의 팔을 거의 부러뜨릴 기세로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참 찾았습니다.”

익숙한 향기가 났다.

“가주……!”

흡. 에슬린은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은 번화가였고, 공작의 차림새가 평소와 아주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그가 칭찬하듯 입술을 끌어 올렸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요?”

몹시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쓰레기까지 달고.”

그렇게 속삭이는 사람의 낯은 지나치게 달콤한 것이었다.

“아야야야!”

남자가 유난스럽게 비명을 내질렀다. 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거렸다.

“뭐, 뭐야! 호위 기사인가? 제, 젠장!”

남자가 팔을 비틀어 빼냈다.

작지 않은 덩치라고 생각했음에도, 공작 앞에 서니 그저 범 앞에 선 하룻강아지였다.

“두, 두고 봐!”

남자가 슬금슬금 몸을 물리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에슬린은 그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하아.”

무뢰한이 사라지자 에슬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풀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문득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여긴 어쩐 일이신 거죠? 가주…….”

그 순간 공작이 에슬린의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 정체를 들통나게 만들 셈입니까?”

부드럽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에슬린은 천천히 공작의 차림새를 훑었다.

장식 하나 없이 검고 긴 망토에 평범한 셔츠와 바지. 가죽으로 된 허리띠와 거기에 매어 둔 검까지.

영락없는 용병 기사의 차림이었다.

“이런 차림으로 뭐 하시는 거예요?”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편안하게 내린 앞머리가 그에 맞춰 흔들렸다.

“잠깐 볼일이 있어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넓은 번화가에서 만나다니, 우연이군요.”

에슬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까…… 한참 찾았다고 하지 않았나?’

잘못 들은 건가?

그녀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공작은 생각에 잠긴 에슬린을 잠시 바라보다, 그녀의 등 뒤로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공작의 시선을 받은 그의 호위가 민첩하게 움직였다. 달아난 남자를 쫓아 처리하라는 신호였다.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은 다시 시선을 에슬린에게로 옮겼다.

살기 어린 매서운 눈빛은 눈 녹듯 사라지고 저절로 달콤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만의 말씀을.”

에슬린은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흘끔거리며 두려운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공작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호위가 필요할 것 같군요.”

에슬린의 눈동자가 공작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까 같은 상황에 처하는 건 사양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하녀장이 부탁한 물건은 하나도 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용병 길드에서 호위라도 고용해야 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오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할 때였다.

“어디부터 가면 됩니까?”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네?”

“제 볼일은 다 끝났고…….”

그가 소년처럼 씩 웃었다.

“때마침 전 이런 차림이군요.”

에슬린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말도 안 돼요, 가주님께서 왜……”

쉿. 공작이 몸을 바짝 붙여 왔다. 갑자기 가까워진 얼굴에 에슬린은 숨을 멈췄다. 그녀의 얼굴에 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늘 전 일개 용병일 뿐이니.”

그가 낮게 속삭였다.

“이름을 불러요.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그저 이름일 뿐입니다.”

에슬린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침묵하는 그녀를 보던 공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가죠.”

그는 에슬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에슬린은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며 떨어졌다.

“혼자 다닐 수 있어요, 가주…….”

흡. 스스로 말을 삼키자 기다렸다는 듯, 공작이 웃었다. 다음 말을 기대하는 얼굴이 능청스러웠다.

검붉은 눈동자가 짓궂게 빛났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동네 악동이라도 만난 기분이야.’

에슬린은 긴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많았다. 결국 자신이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더 눈에 띄겠어요. 그만 손을 놔주세요. ……테베트 경.”

그 순간 공작의 팔 힘이 느슨하게 풀렸다. 그림 같은 미소가 머물던 입매가 딱딱하게 굳음과 동시였다.

그 틈을 타 에슬린이 빠르게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

한편 공작, 그러니까 테베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혼란스러운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이거 생각보다 더…….”

에슬린의 가느다란 뒷모습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둔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춤추듯 살랑거렸다.

순간 에슬린이 사라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가서 품에 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이를 꽉 물자 단단한 턱 근육이 바짝 경직했다.

그가 배운 거라곤 인내뿐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제 성질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그러나 엄혹한 현실이 결국 그를 내리눌렀다.

에슬린은 손에 쥐려 하면 할수록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사람이었다.

‘신중하게.’

그러나 절대 놓치진 않도록.

테베트는 몸을 낮추기로 했다.

사냥을 앞둔 맹수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에슬린이 한 달 뒤에 추천장을 써 달라고 했습니다.’

다신 그따위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억……. 그 빌어먹을 기억.’

이 모든 게 에슬린의 기억이 날아간 탓이었다.

테베트는 으득 이를 갈았다. 며칠 전 날아든 마법사의 편지가 저절로 떠올랐다.

‘마법사 놈이 빨리 도착해야 할 텐데.’

그는 번들거리는 붉은 눈으로 에슬린의 모습을 좇았다.

이 봄의 끝, 새로운 여름의 시작.

그는 그때까지 에슬린을 되찾겠노라 결심했다.

* * *

“주십시오.”

“아.”

별안간 뻗어 나온 팔에 에슬린이 짧게 소리를 냈다.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 있던 상자를 웬 용병 기사가 채어 가는 게 보였다.

그녀는 제 옆에 선 테베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건 기사에게 맡겨요.”

“호위라면 제가 알아서……”

“용병 길드에 가도 소용없을 겁니다.”

에슬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뜻이죠?”

“남부 엔더스로 가는 대규모 상단 호위 임무에 웬만한 용병 기사들은 다 차출되었다더군요.”

테베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 이 메르바에서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저뿐일 겁니다.”

에슬린은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노려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오늘따라 고집스러웠다.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긴장했던 심신이 아까 그 일을 겪고 모두 지쳐 버렸다.

‘오늘은 모처럼 얻은 휴가 날인데.’

일일이 생각하고, 재고, 따지는 것도 그냥 다 피곤했다.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에슬린은 램프의 불을 끄듯, 자신의 뇌 어딘가를 툭 꺼 놓기로 했다. 이 짧은 휴가 기간만이라도 말이다.

“식사는 했습니까? 근처에 맛있는 음식을 파는 데를 압니다.”

테베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제대로 뭘 먹은 기억이 없었다. 에슬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가죠.”

순순히 튀어나온 말에 테베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슬린이 동의할 줄 몰랐던 눈치였다.

그러나 곧 그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그 기꺼운 표정에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데려간 식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뭐야, 여기?’

에슬린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생각했다. 내부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또 고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뿐인가 봅니다. 운이 좋군요.”

테베트가 옆에서 그렇게 속삭였다.

그런…… 건가?

물론 황궁 밖에서 뭘 사 먹어 본 적은 손에 꼽았다.

‘하지만 딱 봐도 고급 식당 같은데…….’

게다가 둘은 누가 봐도 평민의 차림새였다.

그러나 내부의 종업원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에슬린과 테베트를 맞이했다.

“따로 먹고 싶은 게 있어요?”

“아뇨. 딱히.”

“그럼 제가 적당히 주문하겠습니다.”

테베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때문에 에슬린도 더 생각하는 걸 멈추었다.

곧 온갖 종류의 요리가 테이블을 가득 메웠다.

하녀로 빙의하고 이런 식사는 처음이었다. 에슬린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음식을 덜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제가 할게요.”

“에시, 여긴 공작저가 아니니 가만히 있어요.”

그럼 왜 물어본 거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에슬린은 꾹 참았다.

테베트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에슬린은 더 말하지 않고 버터와 치즈를 두른 새우 요리를 먹었다. 과연, 입에서 살살 녹았다.

“포도를 샀나 봅니다.”

푹 익힌 병아리콩이 든 호박 수프를 덜어 주며, 테베트가 말했다.

“네, 맞아요.”

“겨울 포도는 오랜만이군요.”

“메르바에도 겨울 포도가 나는 줄은 몰랐어요.”

에슬린은 상자를 보며 말했다.

“아, 그건.”

테베트가 그녀의 접시에 부드러운 빵을 옮겨 주었다.

“황녀가 재배법을 알려 주었으니까요.”

달그락. 그 순간 에슬린의 동작이 뚝 멈추었다.

‘내가?’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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