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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7화 (17/147)

17화

포크를 움직이던 에슬린의 손이 멈추자, 테베트가 그녀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하고 이름이 똑같았던가요? 에슬린.”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투로 말했다.

에슬린은 가까스로 다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까와는 달리 모래를 씹는 듯 입 안이 꺼끌거렸다.

“……제국 어디에나 있는 흔한 이름일 뿐이죠.”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립니다.”

“…….”

“황녀에게는…….”

테베트가 말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언저리를 복잡하게 헤매는 걸 에슬린은 보았다.

황녀에게는. 그다음은 뭐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에슬린은 쥐고 있던 포크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가주님.”

“이름을 불러요.”

“……테베트 경.”

그제야 테베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몹시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였다.

“황궁엔 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에슬린은 무심결에 떠오른 걸 물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자신 앞에 놓인 샐러드를 뒤적였다.

“왜 그런 걸 묻습니까?”

“황궁에서…… 편지가 자주 오는 것 같아서요. 특히 1황자께.”

“편지라. 자주 오긴 합니다.”

“수도로 올라오라는 편지인가요?”

“네.”

그는 가볍게 대꾸했다. 샐러드를 조금 집어 에슬린의 접시에 옮겨 주는 것과 동시였다.

“황제의 병환이 깊어지고 있으니 다들 몸이 달았나 봅니다.”

그 말에 저절로 부황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 손으로 친형을 죽이고 황제가 된 아버지.

에슬린이 성인이 되던 때, 황제는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졌다.

피 묻은 손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군주조차 세월의 흐름은 피하지 못한 것이다.

황태자, 그러니까 베르타니아 제국의 다음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막 성인이 된 에슬린이 1황자에 맞서 후계자 전쟁에 나선 것 또한 그즈음이었고.

“지금 황실에 볼일은 없습니다. 입만 열면 헛소리만 늘어놓는 정신 나간 놈들밖에 없으니까요.”

테베트의 대꾸를 들으며 에슬린은 접시 위 음식만 뒤적였다.

“그리고 1황자라…….”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짧은 조소를 흘렸다. 모처럼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 덜떨어진 놈 만날 시간에, 마물 하나 더 베는 게 낫습니다.”

에슬린은 그런 테베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황족을 모독한 남자의 얼굴은 태연했다.

다시 접시에 고개를 묻었다.

한동안 단조로운 식사가 이어졌다.

관자 요리를 포크로 으깨던 에슬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어요.”

“뭐죠?”

“제이슨 발론을 죽인 건 누구인가요?”

테베트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문제가 많은 정원사더군요.”

“…….”

“그에 맞게 처리했을 뿐입니다.”

에슬린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갑자기 목이 타는 듯해 근처에 놓인 물을 마셨다. 의미 없이 액체를 넘기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1황자의 편이 아닌 남자.

제이슨 발론을 죽인 남자.

하녀를 사랑하는 남자.

그러나 에슬린에게 독배를 건넨 남자…….

그는 누구인 걸까?

에슬린은 눈앞의 인물이 혼란스러웠다.

“오늘따라 질문이 많군요.”

빈 컵에 물을 따라 주며 테베트가 다정히 말했다.

“더 물어볼 건 없습니까? 기억을 잃었을 때 일이라든지.”

“……그럼 하나만 더 여쭐게요.”

“얼마든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

에슬린은 테베트와 시선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테베트 경과 이런…… 이런 사이가 된 건가요?”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아.”

테베트의 입꼬리가 애매하게 올라갔다. 살짝 내려간 눈썹이 어딘지 모르게 난처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썩 재미있는 얘긴 아닐 겁니다.”

“왜죠?”

에슬린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흔하디흔한 이야기니까요.”

테베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문득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발끝이 살짝 닿는 게 느껴졌다. 에슬린은 당황하여 재빨리 발을 물렸다.

살짝 물러난 그녀의 발을, 테베트가 한 번 더 다가와 건드렸다. 맨살이 닿은 게 아닌데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제가.”

테베트는 그녀의 양발을 가두듯 감싸고, 봄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살짝 휘어진 눈가에서 다정함이 꿀처럼 떨어져 내렸다.

“제가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거든요.”

아.

‘이 남자는…….’

에슬린은 막힌 숨을 억지로 토해 내었다.

‘정말 이 여자를 사랑하는구나.’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사고처럼 목격한 순간이었다.

짧은 휴가는 순식간에 흘러갔다.

테베트와의 기묘한 동행은 에슬린이 볼일을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다음 날에는 홀로 저택 근처에 있던 헌책방에 갔다.

운 좋게도 다른 대륙에 관한 책들을 구할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은 방에서 그 책들을 읽으며 보냈다.

“아이고, 얘가 귀한 휴가를 낭비하네.”

세피아가 쯧쯧 혀를 찼지만, 정작 에슬린에게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휴가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너,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세피아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내 방에만 처박혀 있던 에슬린은 조금 민망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나오니 상쾌하긴 하네.”

북쪽 회랑을 걸으며 짧게 기지개를 켰다.

사위는 어둑했으나, 완전한 밤도 아니었다. 볼에 닿는 공기가 따스했다. 봄 냄새가 났다. 그녀는 문득 정원에 가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휴고랑 헤즐턴을 만나러 가 볼까?’

그런 생각으로 발을 옮겼다.

동쪽 정원으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본채를 지나가야만 했다.

‘응?’

본채의 입구가 어렴풋이 보이자, 에슬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못 보던 마차 한 대가 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이런 시간에.’

손님이 온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에슬린은 순간적으로 어둠에 몸을 묻었다. 집사장이 계단을 내려와 마차 안의 인물을 맞이하는 게 보였다.

“……!”

에슬린은 벼락 맞은 사람처럼 놀라 눈을 치켜떴다. 마차에서 내린 인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긴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어떻게 저 모습을 잊을 수 있을까?

“디엘……?”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간 목소리에 로브를 입은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녹음을 닮은 진녹색 머리, 냉랭한 적갈색 눈동자.

에슬린 베르타니아의 최측근 마법사.

디에리안 프레이였다.

“디에리안 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갑자기 걸음을 멈춘 디에리안에게 집사장이 물었다.

“……아니. 잘못 들었나 봐.”

그는 주변을 살피던 날카로운 표정을 거두었다.

“쯧. 역시 이 북부 촌구석하고는 기운이 전혀 안 맞는군.”

“…….”

집사장이 듣거나 말거나, 디에리안이 큰 소리로 구시렁댔다.

그런 그들의 근처, 어둠에 잠긴 기둥 뒤에서 에슬린은 두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왜, 왜 디에리안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에슬린이 기억하기로, 디에리안은 테베트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을 터였다.

그때 테베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기억 상실에 걸린 이들이 마법사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납득이 됐다.

‘내 기억을 되찾게 하려고 마법사를 부른 거구나.’

에슬린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이대로라면 디에리안을 만나는 건 당연한 수순일 터였다.

‘마법사인 디엘을 만나도 될까? 내 정체를 들키게 되는 게 아닐까?’

디에리안은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상태를 보여야 한다니…….

물론 빙의라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은, 아무리 디에리안이라도 쉽게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려웠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떡하지?’

에슬린은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혼이 나간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 *

‘진짜 어떡하지?’

에슬린은 소파에 파묻혀 멍하니 생각했다.

“…….”

눈앞의 인물을 보니 다른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눈앞의 인물, 마법사 디에리안 프레이가 그런 에슬린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훑었다.

‘앞이 캄캄하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에슬린은 조금 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혼란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가던 길.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나타난 집사장에게 억지로 끌려온 것이다.

“편하게 앉아요.”

설상가상으로 다정한 목소리가 존재감을 더했다.

에슬린은 뻣뻣한 고개를 돌렸다. 테베트의 날렵한 얼굴선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의 붉은 눈동자와 왼쪽 눈 밑에 난 점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몸을 조금 옆으로 물렸다.

“기억을 위해 마법사 놈을 불렀습니다.”

테베트가 멀어진 만큼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가주님…….”

“이제 이름은 불러 주지 않는 겁니까?”

조금 아쉬운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하. 별꼴을 다…….”

맞은편에서 조소가 튀어나왔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디에리안이었다. 그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턱을 괴고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였다.

‘디엘…….’

에슬린은 살짝 눈만 들어 디에리안을 바라보았다.

로브의 후드를 벗어 드러난 얼굴은 예전과 똑같았다.

대충 내려 묶은 긴 진녹색 머리카락과 쌍꺼풀 없이 날렵하게 긴 두 눈, 고집스럽게 닫은 입술, 창백한 낯빛.

기억보다 좀 더 마르고, 피부가 까칠해 보이긴 했으나 큰 변화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꿰뚫듯 보는 것 같은 저 적갈색 눈동자.

‘전하, 또 밤을 새우신 겁니까? 당장 그거 이리 내놓으십시오. 지금 당장 식사하고 주무시기 전까진 절대 드리지 않을 겁니다. 아주 그냥 마법으로 다 태워 버릴 거예요. 내가 이러려고 화염 마법 배웠지, 진짜…….’

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옛 황궁인지 공작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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