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저놈이 신경 쓰이나 보군요.”
테베트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디에리안의 고개가 휙 돌았다. 에슬린은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아니에요. 그저 갑자기 왜 마법사님이 오셨는지 궁금해서요.”
“말했잖아요? 기억을 찾게 해 주겠다고.”
“…….”
“아, 저놈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저와 당신의 관계는 알고 있고.”
그 말에 디에리안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아주 건방지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든 그냥 흘려들으면 됩니다.”
“이봐요, 공작 각하.”
쌀쌀맞은 디에리안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건방진 부름이었으나 테베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 촌구석까지 오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압니까? 춥기는 또 얼마나 더럽게 춥던지……. 목숨 걸고 온 사람에게 뭐가 어쩌고 어째요?”
“봤죠? 저런 개소린 흘려들으면 됩니다.”
테베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날 홀대하면 후회할 일 만들어 줄 겁니다. 반드시 내가……”
“……저.”
에슬린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제야 나불나불 쉬지 않고 움직이던 디에리안의 입술이 뚝 동작을 멈추었다.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에슬린은 디에리안과 자신의 옆에 앉은 테베트를 번갈아 보았다.
“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 거예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그러니 마법으로는…… 그러니까 아마 바로 안 될 테니 굳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테베트가 망설임 없이 일축했다.
“전 반드시 당신 기억을 되찾게 만들 겁니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나을 거고요.”
지극히 합리적이고 옳은 말이었다.
물론 그건 진짜 기억을 잃은 사람에 한해서겠지만.
에슬린은 한참을 입만 달싹였다.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디에리안이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만능 치유사도 아니고 기억을 찾을지 못 찾을지 모르는데, 뭘 근거로 장담을 하는 겁니까? 하여튼 비마법사들의 무지에 기반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란…….”
퍽!
테베트가 가만히 발을 뻗어 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을 걷어찼다.
“악!”
테이블에 정강이를 얻어맞은 디에리안이 단말마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테베트는 싸늘하게 디에리안을 쏘아보았다.
“그만 구시렁대고, 밥값이나 해.”
“아니! 밥이나 주고 밥값을 하라고 하든지 말든지…….”
테베트가 한 번 더 테이블을 찰 기세로 눈을 빛냈다.
“아아아.”
투덜대던 디에리안이 잽싸게 자신의 정강이를 감싸 쥐었다.
쯧, 혀를 한 번 찬 테베트가 그를 노려보았다. 흘끔 그의 눈치를 살핀 디에리안이 곧 허리를 바로 세워 앉았다.
“그래서 답은?”
“아오! 해요, 해!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네…… 한번 마법으로 보긴 할 테니까 이젠 좀 나가요. 정신 사나워 죽겠으니까.”
“내 앞에서 해.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절대 안 됩니다. 기억 마법은 아주 섬세한 작업이라고요. 옆에서 나 숨 쉬는 거 하나까지 다 감시할 거면서, 내가 어떻게 집중하라는 겁니까?”
“…….”
테베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정적이 흘렀다.
팽팽하게 이어지던 신경전을 뚝 끊어 낸 건 디에리안이었다.
“아! 됐습니다. 싫으면 관둬요. 난 이대로 돌아갈 거니까.”
그가 로브의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정말 이대로 돌아갈 것 같은 기세였다.
‘차라리 그냥 돌아갔으면.’
에슬린은 간절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옆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디에리안이 몸을 일으키기 바로 직전이었다.
“……좋아.”
테베트답지 않은 항복이었다. 예상한 바였으나, 에슬린은 절망스러웠다.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리지?”
“그걸 알면 제가 신이지 사람이겠습니까?”
홱 쏘아붙이는 말투에 테베트가 디에리안을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공기가 빠른 속도로 얼어붙었다.
디에리안이 흠, 흠! 하며 목을 가다듬는 척,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하루에 한 시간씩. 일주일 동안 보도록 하죠. 기억이란 건 아주 섬세하니까요. 과한 건 금물입니다.”
테베트는 차갑게 웃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마.”
“나도 내 목숨 아까운 줄은 알거든요!”
디에리안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테베트는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넘겨 주었다.
일하는 날이 아니라 머리를 묶지 않았기에, 긴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흘러내려 있었다.
“저 건방진 놈이 신경을 거스르거든 잘 기억해 뒀다가 꼭 말해 줘요.”
딱딱하게 굳은 에슬린을 보며, 테베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벌로 저택 밖에 매달아 놓겠습니다.”
“…….”
“물론 머리만.”
그러자 디에리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달칵. 살벌한 협박을 남긴 테베트가 응접실을 나갔다.
그 순간까지도 에슬린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떡한다……?”
굳게 닫힌 문을 본 디에리안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에슬린에게로 이동했다.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보던 그가 툭 말을 걸었다.
“이봐, 원하는 게 따로 있어?”
“……원하는 거라뇨?”
“딱 봐도 떨떠름한 눈치여서 말이야.”
에슬린은 그제야 디에리안과 눈을 맞췄다. 고집스러운 적갈색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 돌아 버린…… 돌아 버리신 공작에게 억지로 끌려다니는 거라면 얘기해.”
“……왜요?”
“봤잖아? 난 저 각하랑 사이가 몹시 나쁘거든.”
디에리안이 푹 젖은 빨래처럼 소파에 널브러졌다. 싫은 일을 할 때면 곧잘 취하던 자세였다.
“정말 마법으로 기억을 찾고 싶어?”
“전…….”
에슬린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까칠한 마법사는 디에리안이었다. 쓸데없이 말을 고르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제가 마법으로 기억을 찾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럼 난 그냥 이 저택의 밥이나 축내다 가지, 뭐.”
디에리안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전 기억은 스스로 찾고 싶어요.”
에슬린은 긴장을 감추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선선한 대답이 즉시 튀어나왔다.
너무나 빠른 긍정에 에슬린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왜……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거죠?”
그 물음에 디에리안은 에슬린을 꿰뚫듯 응시했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마법 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아무리 저 악마가 협박해도 말이지. 그리고…….”
늘 냉랭하던 눈동자에 일렁이는 빛 하나가 살짝 스쳤다.
“에슬린이라고 했던가?”
디에리안이 건조하게 물었다. 에슬린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예전에 모시던 분하고 이름이 같아서 말이야.”
“…….”
“아니, 뭐 별 의미는 없고. 그냥, 그렇다고.”
무릎을 감싸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제 이름에 에슬린은 동요를 감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아는 사람하고 이름이 같으면 괜히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뭐 그런 거 있잖아?”
디에리안은 무심하게 코를 한 번 울렸다.
“그분은.”
에슬린은 다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응?”
“그 예전에 모셨다던 분과는…….”
말꼬리가 저절로 흐려졌다.
뭘 물어보고 싶었던 걸까?
스스로 말을 꺼내 놓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디에리안은 잠시 에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의도를 대충 알겠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내 예전 주인은 1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는 그렇게 설명했다.
“내가 지켜 드리지 못했거든.”
평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말투였다. 마법 수식을 읽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에슬린은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간신히 삼켜야만 했다.
그를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나 나오는 건 떨리는 숨소리뿐이었다.
“자, 그럼 차나 마셔 볼까?”
디에리안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법사님.”
“응?”
사실 디에리안을 처음 봤을 때부터 달려가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괜찮으세요?”
디에리안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누구? 나?”
“네.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그래도 1년이나 시간이 흘렀다고 하셨으니…….”
그러니 이제 좀 괜찮지? 다들 잘 살고 있는 거지?
에슬린은 뒷말을 삼켰다.
디에리안이 입술을 움직였다. 건조한 마법사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 미소에 에슬린은 순간 안도했다.
“아니.”
일그러진 냉소가 흘러나왔다.
“솔직히 전혀 안 괜찮아.”
그 표정에 에슬린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1년?”
그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아직도 1년밖에 안 지났다니, 이 지옥을 얼마나 더 버텨야 하나 싶은데.”
내리깐 시선에서 숨길 수 없는 비관이 느껴졌다.
에슬린은 이제 무릎이 얼얼할 정도로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물어 놓고 답이 없는 에슬린이 이상했던지, 디에리안이 고개를 돌려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왜 울어?”
에슬린은 한발 늦게 자신의 손등 위로 미지근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지는 걸 느꼈다.
디에리안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와작 구겼다.
“날 악마에게 살해당하게 할 셈이야?”
그게 디에리안 나름의 어설픈 위로라는 것을, 에슬린은 알고 있었다.
절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