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에슬린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앤과 레나를 도와 야외 회랑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멀리서 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그 모습에 앤이 왜 그래? 하고 물었다.
“찻잎이 또 줄어들었대.”
“또? 무슨 찻잎인데?”
“며칠 전에 들어온 마리골드 찻잎 말이야. 엄청 비싼 거라고 하녀장님께서 신신당부하셨던 건데 오늘 보니 양이 줄어든 것 같다고 하더라고. 가주님께 드린 적도 없는데.”
그러자 앤이 빗자루질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이 저택에 귀신이라도 든 걸까?”
“뭐? 귀신?”
레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니 왜…… 요즘 본채 손님층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잖아.”
“본채 손님층?”
잠자코 회랑을 쓸던 에슬린이 물었다.
“그래…… 밤마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고 누더기를 입은 유령이 돌아다닌대.”
“그러고 보니 요즘 저택이 좀 이상하긴 해. 저택 여기저기에 이상한 액체들이 떨어져 있고 벽엔 알 수 없는 그을린 자국까지 나타나고…….”
“헉, 그거 설마……?”
“왜, 왜 그래, 앤?”
앤이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저주받은 걸까?”
“무……슨?”
“우리 가주님 손에 죽은 수많은 마물이 결국 원한을 품고…….”
참다못한 에슬린은 결국 작게 웃고야 말았다.
“왜 웃어? 에슬린 얘가 귀신 무서운 줄 모르네.”
“귀신은 아닐 것 같은데…….”
아마 수도에서 온 괴짜 마법사 때문일걸.
그러나 에슬린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어, 잠……깐만. 저거 뭐야?”
그때 레나가 사색이 되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앤과 에슬린이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게 왜……?”
어두침침한 회랑 구석.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동그란 빵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이었다.
“빵이…….”
“왜, 공중에서……?”
“으아악! 역시 저주야!”
“꺄아악!”
우당탕탕.
사색이 된 두 사람이 순식간에 손에 든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줄행랑쳤다.
에슬린은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진 둘의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소는 혼자 해야겠네.”
휘이잉. 고요한 정적 속 마른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잠시 빗자루질하다 더는 참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는 빵을 향해 말했다.
“이제 그만 나오시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빵을 든 사람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킁, 까칠한 얼굴의 마법사가 코를 한 번 울렸다.
“그쪽도 도망이나 치지 그랬어? 아주 볼만하던데.”
“그럴 걸 그랬어요.”
에슬린은 회랑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나뭇잎을 홀로 쓸며 중얼거렸다.
디에리안이 그런 에슬린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별안간 그녀의 손에 들린 빗자루를 빼앗았다.
뭐 하는 거냐고 물으려는데,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휙 움직였다.
그러자 세 개의 빗자루가 저절로 움직이며 회랑을 깔끔하게 쓸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마법 자랑이야?’
에슬린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쪽은 왜 여기 있어?”
디에리안이 툭 물었다.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나는 배고파서 간식 먹으러 나온 것뿐이야.”
그는 오른손에 쥔 빵을 흔들며 건조하게 말했다.
디에리안이 이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는 걸 아는 건 테베트와 에슬린, 그리고 그를 마중한 집사장뿐이었다.
식사야 집사장이 챙겨 주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다른 필요한 것들은 디에리안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듯했다.
에슬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모습을 드러내고 손님으로 대접받으면 편하시잖아요. 왜 굳이 이렇게 숨어 지내시는 거예요?”
“귀찮은 건 딱 질색이야. 마법에 무지한 멍청한 것들하곤, 말 섞고 싶지도 않고.”
그가 까칠하게 덧붙였다. 문득 그의 왼쪽 손에 시선이 갔다.
웬 청개구리 한 마리가 그의 손에 애처로이 들려 있었다.
“……손에 든 그건 설마, 개구리인가요?”
“아니.”
“네?”
“오다가 만난 이 집 하인 놈. 건방지길래 개구리로 바꿔 버렸지.”
그가 퉁명스러운 낯으로 말했다. 에슬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청소를 마치고 마법이 풀린 빗자루 세 개를 손에 쥐었다.
“뭐야, 안 믿네?”
“마법으로 사람을 개구리로 바꿀 순 없어요.”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맞아.”
그러자 디에리안이 모처럼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씩 웃었다.
“역시 말이 통하네.”
동시에 그의 발밑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단거리 이동 마법이었다.
디에리안은 한 번 더 하품하며 개구리를 흔들었다. 아마 손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럼 이따 봐. 오늘 저녁은 마리골드 찻잎을 준비해 놓을게. 왠지 싸구려인 것 같지만.”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저택의 귀신이 그렇게 모습을 감추었다.
에슬린은 청소 도구를 정리한 뒤, 앤과 레나를 대충 진정시키고(진정한 것 같진 않았지만) 디에리안이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왔어?”
“네.”
디에리안은 이상한 도형과 꼬부랑글씨가 가득한 책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아까 말한 대로 오늘은 마리골드야.”
매일, 에슬린의 모든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
에슬린은 기억 치료를 명목으로 디에리안과 기묘한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그럼 어디…….”
디에리안이 책을 탁 덮더니 몸을 일으켰다. 에슬린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였다.
그게 그가 차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걸 깨달은 에슬린은 황급히 나섰다.
“아, 제가 할게요.”
디에리안은 까칠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됐어. 나 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들거든.”
에슬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거짓말.’
하마터면 그 말이 튀어나오려 했기 때문이었다.
예전, 디에리안은 종종 에슬린에게 차를 우려 주곤 했다.
물론…… 그 맛은…….
‘디엘, 이게 무슨 맛이야?’
‘맛있는 차 맛이죠. 왜요?’
‘왜요? 라니…… 쓴맛밖에 안 나는데?’
‘아. 그거 전하께서 꿀을 안 넣으셔서 그렇습니다.’
‘나 참, 꿀을 안 넣어도 이 정도 쓴맛은 말이 안 되는데? 아, 젝스 경! 그거 마시지 마. 거의 독극물이야.’
‘……까탈스러운 황족 입맛이란.’
‘나 다 들리거든!’
결국 차는 에슬린이 직접 다시 만들어야 했다. 자신의 호위 기사였던 젝스가 몸 둘 바를 모르던 게 생생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에 에슬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옆에서 심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억에 젖어 있던 에슬린이 번뜩 고개를 돌렸다.
“제가! 제가 할게요, 마법사님. ……제발.”
간절한 어투에 다기를 만지작대던 디에리안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 정 그렇게 원한다면야.”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에슬린은 빠르게 차 두 잔을 만들었다. 머리가 다 아찔해질 만큼 진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향이 좋네.’
그렇게 생각하며 말린 찻잎에 시선을 두었다.
자연스럽게 백금초 찻잎이 떠올랐다.
‘포장지만 바꿔 잘 넣어 두긴 했지만…….’
남부의 다이아몬드는 아직 에슬린의 짐가방 속 깊은 곳에 고이 묻혀 있었다.
백금초 특성상 오래 숙성해도 상관없겠지만, 어쨌든 그 찻잎을 해결하긴 해야 했다.
끄응. 에슬린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좁아 들었다.
그걸 무슨 신호로 알아들었는지, 디에리안이 그녀를 흘끔 보았다.
“뭘 읽는데 그래?”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퀭하게 꺼진 눈동자가 에슬린의 손 언저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식지잖아.”
“아……. 맞아요.”
그녀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을 때울 겸 방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 종이 다발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디에리안이 갑자기 미간을 팍 구겼다.
“잠깐만. 날짜가 한참 지났잖아.”
그는 더러운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날짜가 지난 걸 버리기 전에 받아서 읽는 거니까요.”
에슬린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디에리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을 뒀다 뭐 해?”
“네?”
“딱 봐도 그쪽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잖아.”
디에리안은 아주 당연한 사실을 가르치는 사람처럼 말했다. 에슬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디에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소식지 하나 구해 달라고 말도 못 해?”
“전 하녀잖아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
갑자기 터져 나온 소리에 에슬린이 고개를 들었다. 까칠한 마법사의 얼굴에 특유의 빈정거림이 떠올라 있었다.
“그냥 툭 던져 봐. 아마 소식지가 아니라, 출판사를 사다 바칠걸?”
“비꼬지……”
“비꼬는 거 아닌데. 농담도 아니고.”
에슬린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디에리안이 앞에 놓인 차를 후후 불어 마셨다.
“하여튼 잘 활용해 보란 소리야.”
에슬린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솔직히 말하자면, 기억이 없으니 좀 부담스러워서요. 뭘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뭐, 훌륭한 자세긴 해.”
“네?”
“저 악마의 속내를 누가 알아? 함부로 막 부탁하고 빚 만들고…… 나라면 절대 안 그래. 그러다 약점이라도 잡히면 나만 손해인데 왜 스스로 무덤을 파? 으!”
……부탁을 하라는 걸까, 말라는 걸까? 디에리안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도 다 나 같은 사람들 얘기고…… 그쪽한테는 다 예외겠지.”
그는 테이블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원치 않는 말을 하는 사람처럼 창백한 볼이 살짝 떨렸다.
“그러니 그쪽은 마음대로 휘둘러 보는 게 어때? 그 악마는 아마, 휘둘리는 걸 알면서도 변태같이 기뻐할걸.”
“…….”
에슬린은 가만히 찻물의 표면을 응시했다. 테이블에 턱을 괸 디에리안이 말할 때마다, 그 여파로 표면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근데 그게 문제겠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디에리안의 표정이 몹시 험악해졌다.
“미친 변태 공작이 사랑을 한다는 거…….”
그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입맛을 한 번 쩝 다셨다.
“뭐…… 그쪽에겐 심심한 유감을 전할게.”
그러면서 차를 술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 * *
며칠 뒤, 북쪽 사용인 별채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쿠웅!
로비 한쪽 벽면에 커다란 장식장이 놓인 것이었다.
“가주님께서 제국에서 나오는 모든 소식지를 사용인 별채에 두신대.”
하녀 하나가 그렇게 속삭이는 게 들렸다.
“왜 갑자기?”
“글쎄?”
의아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쿵쿵쿵!
그러거나 말거나 하인들은 바쁘게 장식장을 날랐다. 순식간에 로비 한쪽 벽면이 온갖 소식지로 도배되었다.
“아무도 안 볼 것 같은데……. 헉, 설마 불시에 시험 보고, 뭐 이런 거 아니겠지?”
“에이, 설마.”
사용인들은 저마다 속닥거리며 사라졌다. 그들은 그 변화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 참…….’
오직 에슬린만이 그 앞을 멍하니 지켰을 뿐이었다.
누가 테베트에게 소식지에 관한 이야기를 흘렸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